鶴山의 草幕舍廊房

精神修養 마당

名文 시리즈/金普燮의 '淸貧禮讚'

鶴山 徐 仁 2006. 1. 27. 02:27
자족의 취미와 자기의 역량을 어딘지 다른곳에다 轉置(전치)할 수 있는 정신적 재능이야말로 사람을 부자이게 하는 요소다.
金普燮   
 편집자 注: 金普燮은 1930년 ‘母頌論(모송론)’을 발표하며 본격 수필문학 데뷔. 주로 철학적·사색적 수필을 많이 썼다. 이 글은 1963년 문원각에서 나온 ‘한국수필문학전집’에서 옮겨 싣는다. 신봉승씨 추천.
 
 이는 또 무어라 할 窮相(궁상)이 똑똑 흐르는 사상이뇨 하고, 독자 여러분은 크게 놀라실지도 모른다. 확실히 사람이 이 황금만능의 천하에서 淸貧(청빈)을 예찬할 만큼 곤경에 빠져 있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이왕 부자가 못 된 바에는 貧窮(빈궁)은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일이니, 사람이 청빈을 極口禮讚(극구예찬)함은 우리들 선량한 貧者(빈자)가 이 世上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것은 절대로 필요한 한 개의 힘센 무기요, 또 위안이다.
 혹은 부유라 하며, 혹은 빈곤하다 말하나, 대체 부유는 어디서 시작되는 것이며, 빈곤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이냐? 사람이 부자이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많이 가져야 되고, 사람이 가난키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적게 가져야 되는냐? 그러나 물론 이것을 아는 이는 없다. 보라! 이 세상에는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실로 대단한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가난하다 생각하며, 사실에 있어 또 이 느낌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徒輩(도배)는 허다하지 않은가?
 그들은 어느 날에 이르러도 자족함을 알지 못하고, 전연히 필요치 않은 많은 것을 요망한다. 말하자면, 위에는 위가 있다고 할까, 도달할 수 없는 상층만을 애써 쳐다보곤, 아직도 자기에게 없는 너무나 많은 것을 헤아리는 것이다. 포만함을 알지 못하고 ‘충분타’하는 아름다운 말을 이미 잊은 바, 그러한 徒輩(도배)를 사람은 도와줄 도리가 없다.
 그런데 또 보라! 이 세상에는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넉넉타 생각하며, 사실에 있어 또 이 느낌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허다치 않은가? 이 사람들에겐 명색이 재산이라 할 만한 것이 없음은 물론이요, 대개는 손으로 벌어서 입으로 먹는 생활이 허락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정말로 필요한 것조차를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고, 말하자면 밑에는 밑이 있으니까, 밑만 보고 또 이 위에도 더욱 가난할 수 있을 모든 경우를 생각하고,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切迫(절박)한 곤궁 속에 주리고 있는가 생각한다. 이리하여, 이 위안의 名流(명류)들은 마치 그들이 그들의 힘과 사랑을 어딘지 다른 곳에다 두는 듯한 느낌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래가 빈부의 객관적 표준은 있을 수 없으므로, 빈궁의 문제를 쉽사리 규정하여 버릴 수는 없다. 문제는 오직 조그만 주머니가 곧 채워질 수 있음에 대하여, 구멍난 大囊(대낭)이 결코 차지않는 물리적 이유에만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빈부의 최후의 결정자는 그 사람 자신일 뿐이요, 주위에 방황하는 제3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또한 사람이 참된 부유를 자손을 위하여 남기려거든, 드디어 한이 있는 물질보다는 밑을 보는 才操(재조)와 缺乏(결핍)에 사는 기술을 전함에 지남이 없을 것이다. 자족의 취미와 자기의 역량을 어딘지 다른 곳에다 轉置(전치)할 수 있는 정신적 재능이야말로 사람을 부자이게 하는 바 2대 요소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는 과연 빈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여기 두 가지 종류의 빈궁을 지적할 수가 있다. 그 하나는 물질적 빈궁이라 할 수 있으니, 이제 벌써 할 일이 없고, 그러므로 쓸데없는 존재가 된 사람이 그보다 밑바닥에 있는 사람은 없는 까닭으로 활동과 생존에 대한 권리를 이미 잃고, 여기는 영구히 자족과 質素(질소)의 어떠한 예술도 적용될 수 없을 때, 실로 그 때 그는 참으로 가난하며, 실로 거기 참된 빈궁은 있다.
 다른 하나는 정신적 빈궁이라 할 수 있으니, 그것은 사람이 그의 참된 역량과 그의 참된 사랑을 바칠 수 있는 하나의 정당하고, 또 아름다운 다른 곳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치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다른 곳을 어리석은 나로서 嘲笑(조소)하므로 의하여 자기 자신을 無用(무용)의 長者(장자)로뿐만 아니라, 그의 생존과 활동이 의미를 상실할 때, 이 결핍을 맛보라 하지 않고, 지향 없이 탐욕만 추구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다른 의미에서 가난한 자라 아니할 수 없으며, 또 우리는 이곳에 다른 하나의 참된 빈궁을 발견치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여기 우리가 가장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제2유형의 빈자가 냉담하고 倨慢(거만)한 태도로 제1유형의 빈자 옆을 지나친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디오게네스는 그의 조그만 통 속에서도 극히 쾌활하게 살았다. 그러나 알렉산더에겐 이 세상 전체가 한없이 작은 것이었다. 여기 만일에 사람이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富를 더욱 큰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면, 그의 청빈은 확실히 적은 ‘재산’은 아니다.
[ 2006-01-26, 09: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