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駐韓미군 철수저지工作의 내막

鶴山 徐 仁 2006. 1. 23. 23:21
[연재] 근대화 혁명가 朴正熙의 생애 (10권 1장)
美 군부, 金載圭·朴正熙와 짜고 카터를 물 먹이다!
 
 카터의 自害的인 철군계획에 분노한 베시 駐韓미군 사령관과 참모장 싱글러브는 朴정권과 공조하고 언론을 이용해 카터를 함정에 빠뜨리는 데 성공한다!
趙甲濟   
朴대통령, 金日成에 식량지원 제안
 1977년 1월21일 朴正熙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對北(대북) 식량원조를 제안했다.
 
 『북한의 식량사정이 매우 심각한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재작년인 1975년부터 主穀(주곡)인 쌀과 보리는 자급자족합니다. 작년 우리는 쌀 3600만 석을 생산했는데 이는 1960년에 비교하면 58%를 증산한 것이며, 일제 때 남북한 전체 생산량의 두 배입니다. 금년 말에 가면 쌀이 1175만 석, 보리가 1145만 석 정도 남습니다.
 
 북한 측에서 받겠다고 한다면 상당량을 지원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나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북한에서 식량소동이 나고 있지만 전쟁용 비축식량을 풀어 먹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14년 전 1963년 10월5일 金日成은 金日成 군사대학 제7기 졸업식에서 한 연설을 통해서 對南 식량원조를 제안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5∼6년 전부터 쌀을 사오지 않습니다. 남조선 군대들이 먹는 양식은 다 미국 잉여농산물입니다. 남조선에서 朴正熙가 중농정책을 쓰고 자립경제를 건설하자는 목소리가 울려나오는 것만 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찬성합니다. 그러나 그 자립경제는 미국과 일본의 돈을 꿔다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식민지로 됩니다. 우리 북반부와 합작을 해야만 자립경제가 됩니다』
 
 2006년 북한 노동신문 신년사는 식량문제 해결을 가장 강조했다.
 
 <올해에도 농업전선을 경제건설의 주공전선으로 내세우고 다시 한번 농사에 모든 력량을 총동원, 총집중하여야 한다. 「쌀은 곧 사회주의다」라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유훈을 강령적 지침으로 삼고 온 나라가 농업전선에 한 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한다.
 
 우리는 올해에 농사를 본때 있게 지어 사회주의조선의 대지에 오곡백과 주렁지게 하고 식량문제, 먹는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는 당의 의도와 결심을 빛나게 실현하여야 한다>
 
 2006년의 북한은 43년 전의 金日成 시절보다 더 퇴보한 것이다. 반면 한국은 朴正熙 시절의 성장을 확대 발전시켜 지금은 음식 쓰레기와 비만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나라가 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민족사 최악의 守舊(수구)인 金日成 부자를 「진보와 자주의 태양」이라고 숭배했던 집단이 한국의 조종실에 들어가 국민들을 「살찐 돼지」로 만들고 북쪽의 「야윈 늑대」에게 뜯어먹히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南北 逆轉의 1970년대
 
 1972년 남북회담 때 남측의 간사 역할을 했던 당시 정보부 간부 鄭洪鎭(정홍진)씨에 따르면 몇 차례의 남북한 대표단 왕래로 해서 북한 측은 「만나면 만날수록 우리가 손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우리 기자들과 대표단은 평양에 가서 절망했으나 북한 측은 서울의 발전상에 놀랐기 때문이다. 이 회담을 통해서 金日成이 얻은 것은 남한이 북침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점이라고 鄭洪鎭씨는 말했다. 金日成이 1974년부터 「사회주의 대건설」이란 구호를 내걸고 평양에 고층건물을 짓기 시작한 것도 그런 안도의 표현이었다.
 
 북한은 자본도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1973년엔 서방차관도입액이 3억7500만 달러로 소련차관(1억900만 달러)의 세 배를 넘었다. 1960년대에 군사 제1노선을 추구했던 金日成은 1970년대엔 경제건설에 중점을 두게 되는데, 때가 늦었다. 무역수지의 적자폭이 커지더니 1975년부터 외채상환이 늦어지고 1976년부터는 외국자본을 도입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이 시기에 金正日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해서 사상통제를 강화함으로써 경제건설의 절대조건인 사회의 자율성과 창발성이 약화되었다.
 
 1970년대 초 金日成은 金正日을 후계자로 삼기 위한 여러 가지 무리를 범했다. 金日成은 金正日을 위해서 黨과 軍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고, 金正日은 金日成을 위한 신격화작업을 지휘함으로써 父子 간에 북한체제를 경직화시키는 상승작용이 일어났던 것이다. 한국에 온 黃長燁(북한 노동당 비서 출신)씨에 따르면 1973년부터 후계자로 떠오르기 시작한 金正日은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우상화하는 일에 매진하여 金日成과 북한체제를 인격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망가뜨렸다는 것이다.
 
 金日成은 주민들을 철저하게 조직하고 사상교육을 강화해 갔다. 그 결과 학교에서 실무기술교육을 받는 시간보다 이념교육, 특히 金日成 家系의 소위 혁명역사 교육을 받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1977년 미국 CIA는 남북한의 노동생산성을 비교한 보고서에서 「긴 사상교육 때문에 북한의 노동생산성이 기술교육을 위주로 하는 남한에 뒤지기 시작했다」고 핵심적인 지적을 했다. 1970년대 북한정권은 산업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무능한 충성분자만 양성하고 있었고, 그 결과는 1980년대 이후 경제파탄으로 나타난다.
 
 반면 朴正熙 정부는 몸집이 커지는 경제를 바탕으로 1974년부터 戰力증강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남북한 군비경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1976년부터는 국방비 지출에서도 北을 앞서기 시작했다. 1966∼1970년 사이 남한은 10.4%, 북한은 5.8%의 年평균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1971∼1975년 사이엔 남한은 연평균 9.7%, 북한은 2.3%에 그쳤다.
 
 한국은 1970년대 후반기부터 중화학공업, 새마을사업, 中東건설시장 진출의 과일을 따 먹기 시작했다. 이해부터 中東건설시장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中東에서 사오는 원유값을 지불하고도 남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기에 마냥 행복했던 것은 神이 된 金日成이었고, 쫓기고 있던 것은 한국을 선진국 문턱까지 끌어올리려고 고민하던 朴正熙였다. 金日成은 여유 있게 60代 후반을 보내고 있었고, 1977년에 만 60세가 된 朴正熙는 미국 카터 행정부와 언론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고 있었다. 재앙은 축복처럼 오고, 축복은 재앙처럼 오는 수도 있는 모양이다.
 
 
 金載圭 정보부장 임명
 
 金大中 납치사건이 李厚洛씨의 실각을 가져왔듯 1976년 미국에서 터진 朴東宣 로비사건으로 이해 12월4일 申稙秀 정보부장이 개각 때 물러나고, 후임에 金載圭 건설부 장관이 임명되었다. 朴대통령이 3년 뒤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인사를 한 것인데, 그 인사의 요인이 韓美갈등이었다는 것이 매우 상징적이다.
 
 주로 미국의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금품과 이권을 뿌렸다는 朴東宣 사건 자체는 金炯旭과 李厚洛 부장 시절에 그 씨가 뿌려졌으므로 申부장의 책임이라 할 수 없었다. 朴東宣씨의 신분이 미국의 언론에 의해 노출되자 우리 정부에선 「김한조」란 在美동포를 새로운 로비스트로 기용했다. 그는 수십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받아 미국 내의 여론을 親정부적으로 돌려 놓는 일을 맡게 됐던 것이다.
 
 「백설작전」으로 불린 이 공작에서 돈의 사용처에 따른 여러 가지 말썽이 생겼다. 金씨와 서울 사이의 연락을 책임지고 그를 감독한 사람이 駐美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인 정보부 요원 金相根씨였다.
 
 金相根씨는 1976년 11월에 「즉시 서울 본부로 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1월23일, 그는 「27일의 대한항공기 편으로 서울로 가겠다」고 보고하고 다음날 뉴욕으로 갔다. 거기서 金相根씨는 옛 상사로서 미국에서 망명객이 되어 있던 前 정보부장 金炯旭을 만났다. 金炯旭은 金相根씨에게 망명을 권했다. 돌아가면 처벌받을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이틀 뒤 金炯旭은 뉴욕 라구아디아 공항 근처에 있는 홀리데이인의 커피숍에서 金相根씨를 만났다. 곧 FBI 요원 3명이 나타났다. 金炯旭이 미리 연락을 해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金相根의 미국 망명이 이뤄졌다. 그 뒤 金씨는 미국 의회에 나가서 한국기관의 對美공작 등에 대해 많은 말을 하게 된다. 金炯旭은 「뉴욕 타임스」에 金相根씨의 망명을 귀띔해 주어 이 사건을 시끄럽게 보도하도록 만들었다.
 
 
 金載圭의 간곡한 귀국종용 私信
 
 申稙秀씨가 해임된 것은 이 망명사건 직후였다. 신임부장 金載圭의 눈에는 1973년 4월부터 미국에 머물던 金炯旭이 시한폭탄처럼 보였을 것이다. 6년간이나 정보책임자로 있으면서 朴대통령과 朴정권의 어두운 면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金炯旭. 그가 한국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외국에서 성난 늑대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이 金載圭로서는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보부장 취임 한 달 만인 1977년 1월17일 金載圭는 金炯旭에게 자필편지를 보냈다.
 
 <…각하께서는 「그 친구가 돌아온다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자유롭게 왕복한다면 남이 보아도 좋고 본인은 얼마나 떳떳하겠는가, 또 돌아와 일하겠다고 하면 원하는 중책도 맡기지」 하시더군요. 金相根 망명이란 불상사에도 불구하고 金부장께서 다시 조국에 돌아온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의의 깊은 일이겠습니까>
 
 2월14일에도 金載圭는 私信을 보냈다.
 
 <사필귀정을 신념으로 삼고 지금까지 지켜온 金부장의 침묵을 귀국이라는 행동으로서 깰 때가 됐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싱긋이 웃으며 김포공항의 트랩을 내리는 金부장의 그리운 모습을 생각하면서…>
 
 朴대통령도 미국에 들르는 고관들을 통해 여러 번 金炯旭의 귀국을 종용했다. 金炯旭은 美 의회에서 『白斗鎭 前 국무총리, 丁一權 前 국무총리를 비롯해 張坰淳, 洪鍾哲, 金東祚씨 등이 나에게 귀국을 권유했고 멕시코 대사직까지 제의했었다』고 폭로했다.
 
 1977년 3월엔 金鍾泌 前 총리가 샌프란시스코 근방에서 3일간 육사 동기생인 金炯旭과 같이 골프를 치며 귀국을 종용했다. 이런 시도는 다 수포로 돌아갔다. 그 사이 金炯旭은 비수를 갈고 있었다.
 
 1977년 6월2일 金炯旭은 뉴저지의 어느 모텔에서 「뉴욕 타임스」의 아시아 문제 전문기자인 리처드 헬로란과 단독회견을 가졌다. 金변호사가 통역을 맡았다. 金炯旭은 이 회견에서 자기가 中情부장 시절 기용했던 朴東宣씨의 과거에 대해서 언급하고, 朴정권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카터 대통령의 駐韓미군 철수 계획엔 반대한다고 했다.
 
 이 회견내용은 6월8일자 신문에 1면기사로, 그 다음날엔 속보형식으로 크게 보도됐다. 아마도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은 金載圭였을 것이다. 金載圭는 金炯旭이 내친 김에 6월22일에 美 하원 국제문제위원회, 즉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증언하기로 했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다.
 
 
 閔丙權·金炯旭 담판
 
 1977년 6월8일 정보부 뉴욕분실장 孫호영씨는 정보부 본부로부터 긴급 電文(전문)을 한 통 받았다(이하 인용하는 電文은 美 의회에 제출된 증거물임).
 
 <6월5일자 「뉴욕 타임스」 헬로란 기자와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金炯旭은 朴東宣이 KCIA의 정보원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대통령 각하에 대한 비난도 서슴지 않았음. 金炯旭의 발언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발생했음.
 
 ① 국내언론이 6월7일자로 이를(선택적으로) 보도
 ② 문공부 대변인이 부인성명 발표
 ③ 丁一權 국회의장도 부인성명 발표
 귀관은 문제된 기사의 내용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앞일에 대처하도록 할 것>
 
 6월17일에 孫호영씨는 서울 정보부 본부로부터 중요한 연락을 받았다. 電文은 「閔丙權 무임소장관이 6월17일 TWA 904편으로 서울을 출발, 다음날 뉴욕 케네디 공항에 도착할 것」이라고 전했다. 閔장관의 訪美 목적은 「金炯旭에게 정부의 입장을 알림으로써 그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것」이라 했다.
 
 閔丙權 장관은 金炯旭의 고향 및 軍 선배였다. 6월20일 오후 孫씨는 정보부로 장문의 긴급電文을 보내 두 사람의 대화를 보고했다.
 
 <閔장관은 19일 오후 4시∼9시30분 사이에 알파인 골프 하우스에서 金炯旭을 만났음. 참석자는 7명: 閔장관, 金炯旭부부, 柳永洙(金炯旭의 보좌역) 부부, 白泰夏 부부.
 
 1. 金炯旭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 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음.
 ㉮ 한국에 있을 동안 朴정권 측에서 나를 아주 냉대했다. 집을 수색했고 나를 체포하려는 기미가 보여서 미국으로 달아난 것이다.
 ㉯ 미국에서도 모두가 나를 멀리했다.
 ㉰ 처와 아들의 여권을 신청했더니 거절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귀국하라는 것은 잡아넣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 미국의 기관들은 나로부터 정보를 빼내려고 애썼고, 프레이저 의원은 2년 전부터 청문회에 나오도록 계속 요청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었다.
 ㉲ 그들(한국 언론)은 확인도 하지 않고 나를 반역자라고 매도하고 있다. 이것이 나의 결심을 촉발시켰다.
 
 2. 金炯旭은 이어서 고향선배인 閔장관이 일부러 미국까지 온 데 대해 감사했음. 그리고 두 가지 질문을 했음.
 ㉮ 나에 대한 대통령 각하의 감정은 어떠한가?
 ㉯ 나에 대한 요구사항은?
 
 3. 閔장관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음.
 ㉮ 대통령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과연 그가 이럴 수가 있을까?』라면서 지금도 당신이 그런 일을 했다고는 믿으려 하지 않고 있고 유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감정을 감안할 때 만약 당신이 대통령 각하께 편지를 써서, 과거의 행동을 사과하고 앞으로는 反국가적인 언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각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이다.
 ㉯ 이런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거북하다면 첫째, 청문회에 나가지 말 것, 둘째, 제3국으로 가서 당분간 살아 주었으면 좋겠다. 첫째 요구를 들어 주기 어렵다면 출석을 2주간만 연기해 달라. 청문회에 다시 나가더라도 국가원수에 대한 언급만은 일체 피해 달라. 그렇게 하면 미국 수사기관의 기분도 크게 상하게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4. 金炯旭은 위와 같은 선에 따라 다음과 같은 문답을 주고 받았다.
 
  그렇게 하면 나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조국을 배반하는 것보다는 낫지. 자, 이제 어떻게 할까.
 
  다시 만나죠(金炯旭은 閔장관을 20일이나 21일에 집을 초대해 아내가 장만한 냉면을 대접하겠다고 했음>
 
『제3국으로는 못 갑니다』
 
 두 번째 면담은 6월20일 오후 6∼10시 사이 뉴저지州에 있는 金炯旭의 집에서 이뤄졌다. 孫호영씨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두 번째 면담엔 閔장관, 金炯旭, 白泰夏, 柳永洙(PR회사 경영) 등 4명이 참석했음. 閔장관은 제3국으로 갈 것, 청문회 출석을 연기할 것, 증언 내용 중 「독소조항」을 제거할 것 등을 요청했음. 金은 이 요구사항을 전부 거절했음. 다만 선배인 閔장관의 입장을 생각하여 「독소조항」의 제거문제는 신중하게 고려하겠다고 약속함.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음.
 
  한국 정부는 韓美 관계가 어렵게 된 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정부의 고관들조차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정보를 보고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파티를 열면 미국인들은 오지도 않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면 카드만 받고 선물은 돌려줄 정도입니다. 한국 외교관들은 이런 사실을 보고하지 않음으로써 정부의 정책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군철수 문제에 대해 朴대통령은 『철수하고 싶으면 하라』고 큰소리 치고 있습니다.
 
  어제의 이야기를 계속하겠는데, 제3국으로 갈 수 없나?
 
  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증언을 해야 할 텐데 좀더 신중한 준비를 하기 위해 출석을 연기할 수 없나?
 
  나 스스로 연기하기는 어려워요.
 
  그러면 증언하더라도, 국가원수에 관련된 부분은 빼고 하도록 하지.
 
  선배님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하지요.
 
  그렇게 결심했다면 대통령 각하께 편지를 써야 하네.
 
  뭐라고 쓰죠?
 
  이런 취지로 쓰도록. 「제가 신문에 말한 것으로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조국과 각하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대통령이 나를 박대한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를 추가하지요.
 
  자네가 그런 걸 안 쓰더라도 사과하는 내용의 편지만 쓰면 지나간 오해는 만족스럽게 풀릴 거야.
 
  내가 의회에 나가서 읽을 내용을 柳永洙씨와 함께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내일(21일) 정오에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함께 할 때 편지를 드리죠.
 
  출석 연기 문제가 편지보다 더 시급하지 않으세요.
 
  연기를 해야 하나?
 
  閔장관에게 선물을 하나 드려야죠.
 
  (갑자기 외면하면서) 대통령이 편지를 안 보냈는데, 왜 내가 편지를 써야 합니까. 왜 정부 대변인을 시켜 나를 용공분자라고 부릅니까? 나를 반역자라고까지 했어요. 반역자가 도대체 뭡니까(그는 입에 거품을 품었으며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음). 청문회에서 발표할 성명서 작성을 아직 끝내지 못했으니 그 일부터 해야겠어요.
 
 2. 白泰夏가 (김형욱이) 제3국으로 갈 경우의 경비문제를 꺼냈더니 閔장관은 金炯旭의 의견을 물었음. 金은 제3국행을 거절했음.
 
 3. 柳永洙는 金의 성명서에서 독을 많이 뺐으나 아직도 각하와의 관계에 금이 갈 정도의 내용이 더러 남아 있다고 함. 閔장관이 강력하게 金이 대통령께 편지를 쓰도록 요구하자 金은 계속 그러면 미국 의회에 나가 閔장관이 자신을 달래로 온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말했음. 21일 오전 7시에 閔장관, 白泰夏, 柳永洙와 다시 만나기로 했음. 그러나 절망적임>
 
 
 도화선에 불붙은 시한폭탄
 
 6월21일 아침 閔丙權 장관 일행은 약속대로 金炯旭 집에 갔다. 그러나 그 15분 전 金炯旭은 워싱턴으로 출발해 버렸다. 金炯旭은 『만나 보았자 서로가 괴롭고, 나의 결심은 이미 확고부동할 뿐만 아니라 閔丙權씨는 갖은 방법으로 나를 설득할 것이 예상되므로 일찍이 집을 떠났다』고 20여 일 뒤의 성명에서 밝혔다.
 
 이날을 워싱턴 교외의 모텔에서 지내면서 증언에 대비해 원고를 검토한 金炯旭은 22일 美 하원 국제기구 소위원회에 증인으로 나타났다.
 
 金炯旭은 의원들과의 문답에 앞서 성명서를 낭독했다. 그는 『朴正熙씨 개인에게 설사 인간적인 배신자가 되는 것을 감수한다 하더라도 국민과 역사 앞에 배신자가 될 수는 없다고 믿기에 이르렀다』면서 자신이 증언대에 선 입장을 밝혔다. 묘하게도 金炯旭의 말과 똑같은 말을 2년 뒤 金載圭가 하게 된다. 10·26 뒤 시해사건 군사법정에서였다.
 
 金炯旭은 공화당 정권의 실상, 유신체제 설립과정과 그 영향, 金大中 납치사건과 朴東宣 사건 등의 소제목에 따라 성명문을 낭독해 갔다. 전직 정보책임자로서 신랄하면서도 권위 있는 폭로였다. 그는 朴대통령의 개인적 스캔들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카터 대통령의 駐韓미군 철수계획에도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는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철수하는 것에 대해선 찬성한다고 했다. 金炯旭은 朴대통령이 고관들을 보내 자신의 귀국을 종용한 사실도 밝혔다. 이어서 장시간 문답이 진행됐다.
 
 이 자리는 金炯旭의 가장 화려한 무대인 것 같았다. 5·16 이후 어느 누구도 이처럼 지독하게, 또 증거를 들이대면서 朴대통령에게 도전한 사람은 없었다. 그가 권좌에서 밀려난 이후 朴대통령과 그 측근으로부터 받았던 냉대로 응어리진 원한을 다 쏟아 놓는 것 같았다.
 
 이틀간의 증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金炯旭은 『할 말을 다 하지 못한 아쉬움과 깊은 인간적 고독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는 새벽녘에 집에 도착해『커피 한 잔을 들고 서재에 들어가 창 밖의 여명을 바라보면서 회고록의 첫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고 뒤에 말했다.
 
 金載圭는 부장에 취임한 직후 朴東宣사건을 한 달간 면밀히 검토한 끝에 이것은 유신체제에 대해서 미국 정부가 우회적인 방법으로 압력을 넣는 것이란 판단을 했다고 한다(10·26 재판 증언). 그래서 1977년 2월 朴대통령에게 체제 완화를 건의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金載圭는 親美的(친미적) 성향을 띠기 시작한다.
 
 
 金炯旭은 협박, 金載圭는 전전긍긍
 
 1977년 7월15일 金炯旭은 「내외국민에게 드리는 특별성명서」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朴대통령을 협박했다.
 
 <나는 정보전문가로서 朴正熙씨에 대하여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朴正熙씨가 유치한 방법으로 나를 계속 중상한다면 이를 천하에 폭로할 작정입니다. 한 가지만 언급한다면 나는 朴正熙씨를 참된 반공주의자로 믿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朴대통령의 사상문제를 암시한 것으로 金載圭를 더욱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1977년 8월23일 정보부 뉴욕 분실장 孫호영씨는 「업무를 인수인계하고 9월25일까지 서울 본부로 귀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孫씨는 자신의 金炯旭 설득공작이 실패한 데 대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겁을 먹었던 것 같다. 그도 귀임하는 대신 미국 망명의 길을 택했다.
 
 孫씨는 1977년 11월29일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와 증언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귀임명령을 받았을 때 나는 위협을 느꼈습니다. 金炯旭과 교섭이 실패한 책임을 내가 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가족은 8월16일부터 미국 연방정부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됐습니다』
 
 孫호영씨의 망명은 1976년 11월 말에 있었던 駐美 한국대사관 1등서기관 金相根씨의 망명에 이어 정보부 간부로서는 두 번째였다. 金씨의 망명이 申稙秀 부장의 해임을 가져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金載圭로서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의 私信까지 공개해 버린 金炯旭을 그래도 회유해 보려고 정성을 다해 관용으로 대했는 데도 실패한 데다가, 그 비밀교섭의 현지 책임자가 관계문서까지 들고 미국에 망명했으니말이다.
 
 사나이의 위신을 귀중하게 여기는 사무라이 숭배자 金載圭로서는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1976년 2월13일 「워싱턴 포스트」의 맹렬 여기자 맥신 체사이어가 한국 측 對美 로비스트 朴東宣의 활동을 폭로하기 시작한 이후 약 3년간 한국 정부는 미국 언론·의회와 수사기관의 「동네북」이었다.
 
 
 「동네북」이 된 한국 정부
 
 한국 공화당에 대한 걸프(대한석유공사와 합작한 회사)의 정치헌금, 朴東宣 사건, 金大中씨 납치사건, 金炯旭의 폭로, 통일교 문제, 在美교포에 대한 한국 정보기관의 협박, 정보부 간부들의 잇단 망명사건에다가 미국이 제기한 駐韓미군 철수 문제와 한국內 인권 문제에 대한 미국의 압력 등이 엎친 데 덮쳐 한국은 샌드백이 되어 갔다.
 
 미국 의회 안에서도 여러 소위원회가 한국을 상대로 제각기의 방향에서 조사하는 바람에 망명객 金炯旭·金相根씨 등은 이리저리 불려 가 겹치기 증언을 하는 등 탤런트가 되고 있었다. 이런 청문회에서 드러난 것은 대부분이 韓美관계의 그늘이고 얼룩이었다. 범죄는 범죄대로, 비극은 비극대로 미학이 있는 법인데 이 조사에서는 치졸한 한국인의 모습만 부각됐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을 내쫓았던 미국 언론은 朴정권을 하이에나처럼 물고 늘어졌다.
 
 金炯旭·金相根씨처럼 朴정권에서 고관을 지낸 한국인이 하루아침에 변신해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같은 한국인을 상대로 손가락질을 하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駐美 대사관의 전직 공보관은 金東祚 대사가 100달러짜리 지폐를 20여 개의 봉투에 나누어 넣고 미국 의원들에게 건네주러 나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미국 쌀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생긴 커미션을 한국의 실력자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암투하는 사정도 무자비하게 폭로됐다.
 
 對美 로비가 한국의 안보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은 무시됐다. 美 하원 보고서는 朴東宣씨가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돈을 준 것은 「한국을 돕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에서라기보다는 朴씨 자신을 돕도록 만드는 데 진짜 목적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닉슨 보좌관의 뇌물작전 폭로
 
 이 무렵 한국 정부의 이미지에 특히 나쁜 영향을 주고, 金載圭 정보부장의 신경을 건드린 폭로로서는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을 지낸 존 니데커의 의회증언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74년 5월에 한국을 방문, 뇌물을 받은 이야기를 실감나게, 또 비아냥거리는 투로 털어놓았다. 1978년 6월1일 니데커가 美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국제기구 소위원회에서 한 증언의 요지는 이러했다.
 
 <더윈스키 한국 방문 때 선물을 받았나요?
 
 니데커 예, 몇 장의 그림과 작은 골동품들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돌을 파서 만든 술 쟁반이었습니다. 2400년 된 것이라더군요. 나는 그 선물을 우송해 달라고 했죠. 잘 아시다시피 50달러짜리 이상의 선물은 모두 국무성에 넘겨야 합니다. 그 뒤에 「워싱턴 포스트」의 체사이어 기자에게 들었는데, 내가 인계한 선물 가운데 하나는 경매에 붙여져 일리노이州의 어느 박물관에 1만 달러의 값으로 팔렸답니다.
 
 더윈스키 한국 방문의 마지막 날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할 수 있나요?
 
 니데커 비행기 탈 시간에 임박해서 노진환 의원(유정회) 일행이 저를 찾아와 「朴正熙 대통령에게 작별인사를 하자」고 했습니다. 대통령의 사저에 갔는데, 대통령은 朴鐘圭 경호실장과 골프를 치러 나가고 없었어요. 나는 「비행장으로 나가야겠다」고 했더니, 盧의원이 문제가 없다고 해요. 내가 예약한 JAL기를 붙들어 놓도록 했다는 겁니다. 내가 탈 때까지 말입니다. 기다리다가 끝내 대통령은 만나지 못하고 나오게 됐는데, 젊은이가 오더니 봉투를 하나 주어요.
 
 朴鐘圭씨의 사인이 쓰인 봉투였죠. 젊은이는 「비행기에 타기 전에는 뜯어 보지 말라」고 합디다. 그 말에 의심이 버럭 났어요. 김포공항으로 가는 차중에서 봉투의 귀퉁이를 뜯어 보니 달러 현찰이에요. 나는 공항에 도착하자 수행한 駐韓 미국대사관의 크라우즈씨에게 봉투를 건네주면서 하비브 대사에게 전해 주라고 했습니다.
 
 제가 비행기에 탔더니, 저 때문에 한 시간이나 기다린 승객들이 화가 나 있더군요. 미국에 돌아와서 알아보았죠. 그 봉투에는 현금 1만 달러가 들어 있었답니다. 나는 하비브 대사로부터 현금 봉투를 朴鐘圭씨에게 돌려준 사실을 통보받았습니다.
 
 더윈스키 당신은 이 사건을 보고했나요?
 
 니데커 나는 즉시 국무성의 한국과장 레이너드씨와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 그리고 헤이그 비서실장에게 보고했습니다.
 
 프레이저 당신이 귀국한 뒤 노진환 의원과 다시 접촉한 사실이 있나요?
 
 니데커 두세 번 만났죠. 어느 날 그는 많은 선물을 갖고 왔습니다. 헤이그 실장에겐 그림, 헤이그 부인에겐 진주목걸이, 닉슨 대통령 부인과 로즈메리 우드 여비서에겐 진주귀고리, 그리고 나의 아내에게 줄 향수 등을 가져왔어요.
 
 나는 그 선물들을 받을 사람에게 보인 뒤 다시 끌어모아 포장해 한국 국회의사당의 盧의원 앞으로 발송해 버렸죠. 盧씨는 朴鐘圭씨가 미국을 방문할 때 내가 그를 접대해 주었으면 한다고 했지만 나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盧의원과 만날 땐 꼭 제3者를 입회시켜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프레이저 盧씨는 선물말고는 다른 부탁을 하진 않았습니까?
 
 니데커 그는 『상하원 의원들에게 1인당 5000∼3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대고 싶은데, 누구에게 주었으면 좋을지 이름을 뽑아 달라』고 했고 저는 거절했습니다>
 
 1977년 3월3일, 朴대통령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초청해 공보비서관들과 점심을 함께 했다. 보도금지를 전제로 朴대통령은 긴 이야기를 했다.
 
 『이희호, 정일형, 공덕귀씨 등이 외신기자에게 전단을 배포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나도 그들이 보낸 서신을 받아보았는데 「朴正熙 귀하」라고 썼더군. 나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지, 허허. 편지에는 「귀하가 하는 정치는 나라 망하게 하는 정치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내용은 담담하게 봤지만, 불쾌한 것은 미국에 기대어서 헐뜯고 고자질하는 사대주의적 근성이야. 조만간 그런 버릇은 없어질 테지만 조금 시간이 걸리고 어려울 것 같아요.
 
 그들은 카터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대해 압력을 가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 같은데, 그들의 요청이 미국에는 손톱도 안 들어가고, 또 소용없다는 것도 곧 알게 될 겁니다』
 
 
 『인기 위주의 정치를 하면 나라가 후퇴한다는 것을 국민이 알았으면』
 
 朴대통령은 이른바 양심수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크리스마스 때 나온다. 카터 취임 전에 풀려 나온다. 카터 취임 후에 풀려 나온다」고들 떠들었다는데 나는 웃어넘깁니다. 우리 국민들의 생각이 그렇다면 정신 개혁을 먼저 해야지. 한국이 미국의 영향을 받는 것이 그렇게나 좋은 건지, 원. 독립국가의 국민인데…. 그렇게 헐뜯으니 우리나라가 업신여김을 받는 게 아닙니까.
 
 전 같으면 화도 냈겠지만 이제는 웃어넘기기로 했어요. 나는 當代의 평가에 구애받지 않고, 후세 史家들의 옳은 평가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인기 위주의 정치가 나라를 얼마나 후퇴시키는가 우리 국민도 알아 주면 좋겠습니다. 세종대왕도 최만리·황희 등 중신 대부분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창제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때 찬성한 사람은 신숙주·성삼문·정인지 같은 사람뿐이더군요』
 
 
 『미국은 자체 문제부터 해결해야』
 
 드디어 朴대통령은 駐韓미군 철수를 공언한 카터 미국 대통령에 대해서 정색을 하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카터 대통령에 대해서도 한마디하겠는데, 자기 나라의 부도덕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남의 나라에 대해 부도덕 운운하는 것은 거북스러운 일 아닙니까? 크메르 학살에 대해서는 왜 말을 못 해요? 북한에 대해서도 일체 함구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 뜻이 무엇입니까?
 
 미국의 스나이더 대사와 베시 8軍사령관 등이 본국 정부에 가서 카터와 국방성·국무성 인사들을 만나고 왔는데, 「그 사람들은 실천계획을 구상조차 하지 않고 있더라」고 한국에 돌아와서 나에게 말하더군. 이런 사정을 볼 때 미군 철수는 빠른 시일 내에는 없을 것 같아요.
 
 카터가 공약을 했으니 약간의 감축은 있을는지 모르지만. 설사 撤軍(철군)이 이뤄져도 이제는 북괴와 겨루어 볼 만합니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면 또다시 경제 시설이 파괴될 터이니 전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는 카터 대통령의 撤軍관련 발표가 나오기 며칠 전이었는데, 이날 대화록을 읽어 보면 朴대통령이 사태를 다소 낙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뒤이어 대통령은 수도이전 문제를 거론했다.
 
 『요 근래 행정수도 문제가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고 하던데 적어도 10년은 내다보아야 합니다. 후보지는 아직 없어요. 여기저기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무자들에게도 「백지상태에서 설계하라」고 했습니다. 실행 단계에서 地勢에 맞추면 될 것 아닙니까. 계획만도 2~3년 내지 3~4년이 걸립니다.
 
 지금 4차 방위산업 육성 계획 때문에 財源(재원)도 없어요. 우리가 그렇게 서두를 것이 뭐 있어요. 올봄에 국회에서 관계법을 통과시키고 地價(지대)를 묶어서 투기꾼들이 재미 못 보도록 해야겠어요.
 
 매년 서울의 인구가 마산 인구만큼 늘어나고 있어요. 그러니 우선 수도이전 문제를 발표하여 속을 트이게 해 주고 나면,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효과가 다소나마 있지 않겠어요? 수년 전 같으면 패배의식 때문에 수도를 옮긴다고 떠들었을 텐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지는 않는 것 같아요. 국력이 축적되었기 때문에 발표한다는 것을 관계자들은 다 알 겁니다. 행정수도에는 한꺼번에 기관들이 들어가지 않아도 됩니다. 중요하지 않은 부처부터 먼저 옮기고, 맨 나중에 청와대가 들어가면 됩니다. 지금 예정으로는 1980년대 중반에나 가서야 이전될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화제는 며칠 전 일본 후쿠다 총리가 의회 답변에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것으로 옮아 갔다.
 
 『후쿠다 일본 총리 입장에서 야당의 질문에 대해 독도가 자기네 영토가 아니라고 답변한다면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을 것 아닙니까? 으레 하는 발언입니다. 어느 누가 총리가 되더라도 그랬을 겁니다. 나는 그들의 국회 답변을 이해하고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 문제가 된다면 공군으로 대응 비행하거나 기관포를 갖다 놓고 위협사격을 가해서 쫓아 버리면 됩니다. 이 독도 문제를 韓日 분쟁의 요소로 삼을 생각은 없어요』
 
 잠시 야당 인사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신민당의 李哲承 당수가 미국에 가서 駐韓미군 철수 반대를 주장하고 다니는 데 대해 높게 평가했다.
 
 『李哲承씨는 나름대로 확고한 안보관이 있는 것 같아요. 야당이 외국에 나가서 그런 말을 하면 남이 듣기에도 좋습니다』
 
 
 카터, 일방적 撤軍 통고
 
 李총재는 이즈음 워싱턴에 가서 험프리 상원의원과 브레진스키 대통령안보보좌관을 만났다. 존슨 대통령 시절 부통령이었던 험프리는 자신이 암을 앓고 있다고 털어놓은 뒤 『야당이 국가를 위해서 이런 외교를 한다는 것에 감동했다』고 말하고, 李총재의 뜻을 카터 대통령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브레진스키 보좌관은 『나는 폴란드 출신이기 때문에 한국이 처한 상황에 동정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카터는 베트남전 반대운동, 펜타곤 페이퍼 폭로사건, 워터 게이트 사건을 일으키면서 미국 사회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던 反기성적 左派 언론과 여론을 타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朴대통령을 싫어하는 생각이 앞선 나머지 1976년 대통령 선거 때 駐韓미군 철수를 공약했다. 그는 인권탄압을 하는 국가를 응징한다는 명분만 보고, 미국의 국익에 타격을 준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정도로 편향된 시각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駐韓미군 철수를 맨 먼저 주요정책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맹국인 한국 정부와 한 번도 논의하지 않고 일방적인 결정을 내리고 밀고 나가려 했다.
 
 1977년 3월5일 카터는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과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에게 메모를 내려 보냈다. 그 요지는 「駐韓미군 중 지상군은 철수, 공군은 유지. 美 의회와 미국 언론이 결정하게 될 韓美관계는 최악상태. 朴이 정치범들과 관련하여 개방적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인권문제에 대한 나의 참을성과 군사원조는 유동적이 될 것임」이었다.
 
 1977년 3월 초순 워싱턴을 방문한 朴東鎭 외무장관은 카터 대통령을 만나 일방적 撤軍 통고를 들어야 했다. 카터는 『이것은 나의 大選 공약이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카터는 미국 언론이 만든 反韓감정을 이용하기 위해 미국의 세계전략에 크나큰 영향을 줄 駐韓미군 철수 문제를 논리나 전략 없이 추진했기 때문에 행정부나 참모진 안에서조차 단 한 사람의 진정한 지지자도 확보하지 못했다.
 
 요사이 盧정권이 얼치기처럼 밀고 나가는 反美親北 노선과 매우 닮았다. 세계 어디서든 좌파적 인간형은 「위선」과 「무능」이란 공통점을 가졌다. 그들은 인기영합과 위선적 도덕론을 판단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국가이익을 도외시하기 쉽다.
 
 撤軍정책을 책임지고 추진해야 할 밴스 국무장관과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 그리고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은 카터의 지시를 수행하는 척하면서 이 정책을 번복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브레진스키 보좌관은 撤軍 반대자들이 카터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言路(언로)를 막지 않았다.
 
 이들은 공식석상에서는 마음에도 없는 목소리로 카터의 撤軍정책을 지지하고 뒤로는 이 정책을 사보타주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과 러시아조차도 駐韓미군 철수를 크게 환영하지 않았다. 金日成만 카터를 지지하고 있었다.
 
 지금 뒤돌아보아도 철없는 짓을 많이 한 것이 카터였다. 카터는 선거기간 중 『한국엔 700개의 核폭탄이 있다. 나는 단 한 개라도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실제로 그때 한국엔 683개의 核폭탄이 있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 撤軍에 앞서 이 核폭탄을 먼저 철수하려고 했다. 核물리학자이기도 한 브라운 국방장관은 카터의 마음을 돌려놓는 데 진땀을 빼야 했다.
 
 1977년 3월15일 朴대통령이 주재하는 정부여당 연석회의가 청와대에서 열렸다. 대통령은 朴외무장관이 워싱턴에서 갖고 온 撤軍통보에 대해서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비록 일방적 선언이라고 해도 동맹국 원수가 결정한 것이니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대비하는 수밖에 없지 않는가』라는 태도였다. 지상군 철수의 順次와 撤軍에 따른 보완조치를 협의하기 위해 카터의 특사가 온다고 하니 그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朴대통령의 태도로 해서 이날 撤軍 문제는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1977년 4월20일 저녁 본관 식당에서 朴대통령이 비서관들과 식사를 함께 했다. 朴대통령은 비서관들과 둘러서서 칵테일을 한 잔씩 들면서 청와대 물맛을 자랑했다.
 
 『우리 수출이 너무 확대되는 데 대해 미국이 별로 신통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제가 늘고 수출이 확대되면 미국이 우리를 멀리하지 못해요. 이번 駐韓미군 철수 문제만 하더라도 우리가 撤軍을 만류하기를 미국이 은근히 기다린 흔적이 보이는데 우리 경제와 국방력이 이만한데 왜 그런 짓을 하겠소』
 
 
 『카터는 땅콩장사나 해서 경륜이 없다』
 
 朴대통령은 이 말을 하면서 파안대소했다. 고소하다는 뜻의 웃음이었다. 잠시 후 식탁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朴대통령의 카터 비판은 계속되었다. 대통령은 뉴질랜드 총리의 말을 인용했다.
 
 『뉴질랜드의 멀둔 총리도 기자회견에서 「카터는 땅콩장사나 해서 그런지 경륜이 없다. 카터 정책을 좋아할 사람은 크렘린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비꼬더군』
 
 柳赫仁 정무수석 비서관이 언론계 간부들의 전방 시찰 결과를 보고하면서 화제가 바뀌었다.
 
 『여기 있는 鮮于煉 비서관의 伯氏(백씨) 鮮于주필이 이번 토요일 전방에 갔다 온 것을 주제로 時論(시론)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時論을 쓰겠다고? 가슴이 답답하다가도 鮮于주필의 사설이나 時論을 보면 시원하고 후련해져. 鮮于주필이 때로 정부 시책을 공격해서 아프기는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 사람 얘기가 거의 다 맞아요』
 
 朴대통령은 최근 방위산업 특집 프로에서 MBC는 잘한 반면 KBS는 부족했다고 지적하면서, 『사진기자들이 대통령만 찍고 전체를 찍지 않아요. 나는 두세 컷만 찍으면 되는 것이오』라고 했다.
 
 『동아일보 사설도 미군 철수에 대해서 쓸 것을 썼더군. 어떤 때는 사설을 읽고 나서 「이것이 진짜 동아일보인가」 하고 표제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볼 때가 있어요. 과거에는 같은 反共 사설을 써도 꼭 「그러나」 하고 꼬리표를 달아서 정부를 비난하기에 나는 한때 「反共의 방법이 우리와 다른가」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하긴 지금 反共과 駐韓미군 철수 문제에 대해 우리 정부와 의견이 다른 언론기관이 있겠소?』
 
 1977년 5월20일, 朴대통령은 朴槿惠씨와 비서관, 기자단을 불러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이날도 대통령은 駐韓미군 철수 문제를 장시간 거론했다.
 
 
 『美 8軍 장성들은 駐韓미군 철수 반대』
 
 『동맹이란 것은 한 나라만의 이익을 위해서 맺는 것이 아니라, 당사국의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세가 변화되면 서로 의논해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그 사람들(미국)은 그렇지 않더군요.
 
 지난 1년 동안 駐韓미군 철수 문제가 라디오나 신문에 등장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 스나이더 대사를 만났을 때 食傷(식상)하다고 했지. 가든 안 가든 결정은 지어야겠어. 그런데 美8軍 장성들은 모두 철수를 반대하더군. 골프를 초대받은 적이 있어서 경기 끝나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모두들 하나같이 반대야. 내가 「카터 대통령이 軍 출신이니까 잘할 것 아니냐」고 했더니 美軍 장성들이 「그 사람, 잠수함을 석 달 탔습니다. 그것도 軍 경력에 들겠지요」라고 대답하더군.
 
 미국 대통령 선거 때 카터 참모들이 駐韓미군 철수를 주장해야 표가 많이 나온다고 건의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대통령이 되고 나면 국방성도 있고, CIA도 있고, 국무부도 있어서 이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서 해야 하는데. 하긴 선거 공약이니 안 할 수도 없겠지. 그들끼리도 의견 대립이 있는 모양이야』
 
 1977년 5월22일, 朴대통령은 비서진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는 마치 교사가 학생에게 훈시하듯 국정에 관계된 것뿐만 아니라 평소 느낀 점들을 자상하게 털어놓았다. 이날도 어김없이 화제는 카터 비판으로 옮겨 갔다.
 
 『한국에 어떤 인권 문제가 있는가, 하고 미국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물으면 그들도 대답을 못 합니다. 인권 침해란 법에 의하지 않고 재판도 하지 않고 탄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헌법에 따라 3심을 거치고 그것도 공개리에 외국 기자들한테까지 방청을 시키면서 법으로 확정해서 처벌하는 것을 어떻게 인권 침해라고 할 수 있는가 말이오.
 
 지난번 울프 의원도, 스나이더 대사도 「카터가 한 얘기이니까 미국의 체면을 봐서 제스처라도 해달라」고 내게 말했는데, 내가 제스처를 할 것이 있어야지. 지금 잠깐 들어가 있는 사람도 전에 민청학련 사건과 같이 개과천선하면 사면될 수도 있는 것이오.
 
 反체제 사람들이 콧대를 높이는 것은 바로 미국 사람들 때문이야. 미국이 도움이 안 된다고 느낄 때라야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생각이 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놓아 줄 수 있지. 이 기회에 그 사람들의 사대근성을 뿌리 뽑아야 됩니다. 외세에 의존하는 근성을 버리지 않고는 진정한 자주독립 국민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동안 미국에서 反정부 운동하던 사람들, 李龍雲 前 해군참모총장이나 文明子씨 등이 한 근거 없는 말들을 미국은 그대로 언론에다 실었단 말이야. 駐韓미군이 東北亞 평화를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직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 평화가 정착되거나 적어도 북괴를 확실히 능가할 힘이 생길 때까지 駐韓미군이 있는 것이 좋지. 그러나 그들이 일방적으로 간다고 했소. 한반도의 안보는 한국만의 책임인가? 韓美 양국의 공동 책임입니다. 그들이 떠나가더라도 장비를 넘겨주고 공군력만 증강한다면, 유사시에 우리 힘으로도 능히 敵을 막을 수 있어요.
 
 나는 월남사태 때 이미 駐韓미군 철수를 예상했어요. 모든 정세로 보아 북괴가 남침해도 중국·소련이 병력 지원을 안 할 것으로 봅니다. 우리의 힘이 강해지면 오히려 중국·소련이 북괴의 남침을 견제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산당의 전술이지』
 
 『미국이 核 가져가면 우리가 개발할 것』
 
 朴대통령은 이날 각오한 듯 말을 이어갔다.
 
 『내년에 프랑스에서 장갑차 150대를 도입하고, 가을에는 서해에서 미사일 시험 발사도 할 것입니다. 이번에 하비브 美 국무차관이 오면 核을 가져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텐데, 가져가겠다면 가져가라지. 그들이 철수하고 나면 우리가 개발할 생각이오』
 
 이 무렵 朴대통령의 대화록을 분석해보면 駐韓미군 장성들과 교감하면서 카터의 撤軍을 비판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駐韓미군 장성들이 주둔국 대통령 앞에서 자신들의 최고사령관을 비방했다는 것인데, 이로 미루어 朴대통령과 이들은 撤軍반대로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1977년 3월17일 美 합참은 「1982년 9월까지 3만2000여 명의 駐韓 美 지상군 병력 중 우선 7000명 정도를 철수시키자」는 내용의 건의서를 카터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철수시한을 차기 대통령 임기까지 미루는 지연작전이었다. 하지만 카터는 5월5일 『4∼5년 안에 全 駐韓美 지상군을 철수한다』고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 지시각서」 12호에 담아 美 합참에 내려 보냈다.
 
 1977년 5월19일자 「워싱턴 포스트」紙는 駐韓 美 8軍 참모장 존 싱글러브 소장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이 회견에서 존 싱글러브 소장은 『만약 (카터의) 撤軍 계획대로 4∼5년 동안에 駐韓미군을 철수시킨다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12개월간의 정보수집 결과 북한 戰力(전력)은 계속 증강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은 3년 전의 낡은 정보 속에 묻혀 있다』고 비난했다. 美 8軍 참모장의 이런 폭탄발언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撤軍을 반대하는 美 8軍사령관 베시 대장의 공작이 있었지 않나 의심할 만한 근거가 있다.
 
 
 하우스먼의 전화
 
 1977년 5월17일, 그러니 워싱턴 포스트 기사가 나오기 이틀 전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인 李東馥씨는 오랫동안 가까이 알고 지내던 駐韓미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인 제임스 하우스먼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긴급한 용무가 있으니 가급적 가까운 시간 안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李보좌관과 하우스먼은 다음날 서울시청 맞은편 프라자 호텔의 한 객실에서 마주 앉았다. 여기서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李특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에게 보고했다.
 
 <駐韓 유엔군사령관 특별보좌관 짐 하우스먼은 5월18일 12:15∼13:30 當部 부장 특별보좌관을 접촉하고 베시 유엔군사령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전제하에 다음 사항을 부장에게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음.
 
 1. 5월24일에 내한하는 하비브 국무차관과 브라운 합참의장을 맞이해 베시 사령관은 駐韓 美 지상군 철수문제에 관하여 현지 사령관으로서의 기본입장을 다음과 같이 보고할 계획임.
 
 가. 베시 사령관은 1차적으로는 駐韓 美 지상군을 현재의 상태에서 동결, 어떠한 규모의 감축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백히 할 것임. 사령관의 논거는 6·25 때 駐韓미군이 철수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한 반면 휴전 이후에는 전쟁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駐韓미군이라는 전쟁 억지력이 엄존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할 것임.
 
 나. 만약 하비브 차관과 브라운 의장을 통해 美 행정부의 駐韓 美 지상군의 감축이 기정방침으로 확인될 경우 베시 사령관은 차선의 방안으로 다음 사항을 건의할 방침임.
 
 1) 駐韓 美 지상군의 감축은 상징적인 규모로 국한할 것. 美 육군 제2사단의 3개 여단 중 1개 여단에서 여단 建制는 그대로 둔 채 2개 대대만을 1979년 6월 이후에 철수하고 나머지 부대는 무기한(최소한 5년간) 한국에 잔류시키도록 결정할 것.
 
 2) 철수하는 2개 대대의 각종 화기와 장비는 한국에 남겨두어 한국軍에게 인계할 것.
 
 3) 현재 2개 대대 弱의 규모인 駐韓 美 공군은 완전규모의 3개 대대를 각기 거느리는 2개 비행단으로 증강시키되 증강되는 항공기는 태평양 공군으로부터가 아니라 본토의 공군으로부터 가져올 것(태평양 공군은 駐韓 美 공군의 후비로 이미 사실상 한반도에 들어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태평양 공군으로부터의 증강은 실질적으로는 증강이라고 볼 수 없음).
 
 4) 한국軍 현대화를 위해 다음 조치들을 강구할 것(생략).
 
 2. 베시 사령관은 앞으로 있을 韓美 협의 때 朴대통령 각하께서는 물론 고도의 정치적 차원에서 말씀을 하셔야 하겠으나 관계장관 이하의 실무자는 이상 베시 사령관의 기본입장을 감안해 그보다 더 강경한 주장을 할지언정 더 온건한 주장을 하지는 말아 줄 것을 요망함.
 
 3. 베시 사령관은 하비브와 브라운 來韓 이전에 극비리(駐韓 美 대사관에 대해서도 비밀로) 韓美 양 국군 간에 사전 의견조정을 가질 것을 희망함. 그 방식은 1단계로 합참의 孫章來 장군이나 柳炳賢 장군과 유엔군사령부의 번스 副사령관, 싱글러브 참모장 또는 콜러 작전참모 간에 협의를 갖고 2단계로 베시 사령관과 국방부 장관이 만나기를 희망함(단, 이러한 접촉은 베시 사령관의 입장에서는 美 행정부에 대한 일종의 항명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극도의 보안을 요망함).
 
 4. 베시 사령관은 지난번 渡美, 카터 대통령을 만났을 때 『駐韓미군 철수 문제는 절대로 졸속한 결정을 회피할 것』을 건의했고, 이에 대해 카터 대통령도 『장군과 먼저 협의하지 않고는 駐韓미군 문제에 대한 어떠한 결정도 단독으로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으므로 미국이 일방적으로 감축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고 만약 카터 대통령이 이러한 약속을 저버릴 때는 『군복을 벗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우스먼은 말하고 있었음>
 
 
 金載圭-베시 비밀 요담
 
 李특보가 듣고 보니 실로 중대한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문민통제의 원칙이 확립되어 있는 미국에서 육군의 한 최고지휘관이 참모들과 짜고 미국대사관을 따돌린 채 자신의 대통령이 소신을 갖고 추진하는 정책을 저지하기 위하여 외국의 정보기관장과 내통하겠다고 나섰으니 말이다. 李특보는 金載圭 부장에게 베시 사령관을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다음날인 5월19일 오후 3시15분부터 4시30분까지 두 사람의 밀담이 美 8軍 영내 사령관 관사에서 이뤄졌다. 李특보가 통역을 위해 배석했다.
 
 李특보의 기록에 의하면 이 자리에서, 베시 사령관은 그가 金부장을 만나자고 한 진짜 이유를 털어놓았다. 그는 우선 撤軍 문제에 관한 카터 대통령의 옹고집에 분노를 터뜨렸다. 그리고, 카터의 撤軍 공약은 결국은 이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왜냐하면 이 공약은 『너무나 현실과 괴리된 것이고 잘못하면 전쟁을 유발할 수도 있는 그릇된 정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터의 撤軍 공약이 이행될 경우에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撤軍은 보완조치 없이는 진행될 수 없다』면서 韓美 양국 간에 즉각 「撤軍 보완조치」에 관한 협상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撤軍 보완조치」가 비용 면에서 駐韓미군을 계속 유지하는 것보다 비싼 것으로 만들어서 「비용 對 효과」의 차원에서 미국內, 특히 美 의회 안에서, 駐韓미군 철수에 대한 찬반 토론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 베시의 본심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완조치」로 인해 駐韓 美 지상군의 撤軍을 강행하는 것이 계속 유지하는 것보다 비용 면에서 비싼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경우 틀림없이 의회가 나서서 撤軍 강행을 저지하게 되리라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한국 정부 안에서 그의 대화 상대는 徐鐘喆 국방장관과 柳炳賢 합참본부장이었다. 이 무렵 朴正熙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에게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그렇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우리는 구걸하지 않겠다. 우리는 우리 길을 간다』고 자주국방을 외치면서 오히려 「駐韓미군 철수 不반대」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카터의 오만에 맞서서 주권국가의 대통령으로 국민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朴대통령의 대응은 「과연 대통령다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에게 해당되는 것」이었고 그를 보좌하는 주무장관이나 참모들의 경우는 그와는 다른 것이었다.
 
 베시는 『대통령이 그렇게 할수록 정부 관계자들은 실무적 차원에서 가령 撤軍이 이루어지더라도 그로 인한 위험부담이 최소화되도록 미국을 물고 늘어져 최선의 보완조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했다.
 
 
 特上보고
 
 문제는 한국 정부의 주무장관 등 관계 참모들에게 있었다. 베시가 그들을 접촉해 보니 그들은 『대통령보다 한술 더 떠서 더 격앙되어 있었고, 더 강경해서 도저히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우스먼은 『베시 사령관이 徐鐘喆 국방장관 등 한국군 고위층으로부터 「미군이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아연 실색했다』고 전했다.
 
 카터 대통령은 撤軍 문제와 인권 문제를 가지고 한국 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1977년 5월24일 필립 하비브 국무차관과 조지 브라운 합참의장을 서울에 보내기로 했다.
 
 베시 사령관의 생각으로는 하비브와 브라운의 訪韓이야말로 이들 앞에 「撤軍강행」보다 훨씬 高價의 「보완조치」 보따리를 풀어놓아 이들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 국방 관계자들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귀띔해 줄 절대적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길이 없었다. 베시는 金부장에게 그의 충정을 朴대통령에게 전달해, 朴대통령으로 하여금 徐鐘喆 국방장관 등이 즉각 베시 사령관과 협의해 「撤軍 보완조치」를 마련하도록 지시해 줄 것을 희망했다. 그렇게 되면 하비브 차관 및 브라운 의장의 訪韓 때를 기점으로 韓美 간에 「撤軍 보완조치」 협상을 본격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金부장은 눈에 띄게 감동했다. 필동 중앙정보부 분실 6층의 부장실로 돌아온 金부장은 李특보에게 베시 사령관과 나눈 대화를 對談 형태로 정리해 부장이 대통령에게만 올리는 보고 형식인 「特上보고」(일명 「빨간 딱지 보고」)로 작성해 달라고 주문했다.
 
 金부장은 다음날인 5월20일 청와대로 올라가 朴대통령 앞에서 이 보고서를 낭독했다고 한다.
 
 필자가 대통령 면담일지를 구해서 대조해 보니 5월20일 金載圭 정보부장은 오전 11시27분부터 한 시간 동안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朴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적혀 있다. 朴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직후 출입기자들과 점심을 함께 하면서 미군 장성들이 카터를 업신여기는 발언을 한 것을 소개했던 것이다.
 
 이날 朴대통령은 駐韓 美 지상군 철수문제와 관련된 회의를 긴급히 소집했다. 오후 2시14분부터 약 두 시간 동안 계속된 회의에서는 베시 사령관의 희망에 따라 미국 특사에게 撤軍 보완 조치와 관련된 협의를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의에는 총리·국방장관·외무장관·청와대 주요참모·합참의장·합참본부장, 그리고 康仁德 정보부 북한국장 등이 참여했다.
 
 
 『카터가 생각 없이 뱉어놓은 공약 때문에』
 
 이날 金載圭 부장이 올린 特上보고서엔 재미있는 대화내용이 있다.
 
 <金載圭 장군은 하비브 차관이 이곳에 와서 인권 문제를 거론하리라고 보는가?
 
 베시 카터는 분명히 한국을 돕고 싶어한다. 그런데 한국을 돕기 위해서는 美 의회와 여론의 지지가 필요한데 美 의회와 여론사회에서는 한국의 인권 문제에 관해 카터에게 모종의 행동을 취하라는 강력한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카터로서는 이 같은 압력 때문에 비단 한국관계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정책에 관해서도 美 의회의 협조를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아마도 카터는 이번 訪韓하는 특사 편에 이 같은 정치적 고충을 朴대통령께 말씀드리고 이에 대한 朴대통령의 말씀을 들려 달라고 요청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호사가들은 朴대통령의 강력한 영도력 행사는 불안정한 국내 政情(정정)을 안정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악선전하고 있다. 2주일 전에 朴대통령께서 美8軍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시고 본인의 숙소에 들르셔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신 일이 있다. 그 때 朴대통령께서 아주 편안한 기분으로 하루 저녁을 지내시는 것을 보고 본인도 무척 기뻤었다.
 
 본인은 장기적으로는 한국도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믿는다. 朴대통령은 이미 국내에서 강력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쌓아 올리셨고 그렇기 때문에 선거를 지금 당장 실시한다고 해도 아마 80∼90%의 지지를 얻어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시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본인이 보기에 朴대통령께서는 국민의 복지증진과 안보, 그리고 경제건설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정치작태를 낭비적이고 非생산적인 것으로 보아 정치를 멸시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반면, 카터 대통령 같은 사람은 좀 시끄럽기는 하더라도 선거를 통해 다수의 지지를 얻어 국가를 이끄는 것이 좀더 좋은 방법이라고 보는 데서 차이점이 생기는 것 같다.
 
 金載圭 요즘은 신문이 횡포 정도가 아니라 독재라 해야 할 정도인 것 같다.
 
 베시 그렇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신문 독재의 제물들이다>
 
 
 『撤軍하면 전쟁 터진다』(싱글러브)
 
 위의 대화록을 읽어 보면 朴대통령이 기자들에게 한 말의 수수께끼가 풀린다. 朴대통령은 『미군 장성들에게 골프를 초대받은 적이 있어서 경기 끝나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모두들 하나같이 撤軍에 반대야. 내가 「카터 대통령이 軍 출신이니까 잘할 것 아니냐」고 했더니 미군 장성들이 「그 사람, 잠수함을 석 달 탔습니다. 그것도 軍 경력에 들겠지요」라고 대답하더군』이라고 했었다. 카터를 이렇게 평한 사람은 베시였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베시 사령관이 金載圭를 통해서 朴대통령과 내통하던 바로 그 시간대에 베시의 참모장 존 K 싱글러브 소령은 워싱턴 포스트 존 사르 기자를 만나고 있었다. 사르 기자는 이때 카터 특사 필립 하비브 국무차관과 조지 브라운 합참의장이 朴대통령을 만나러 오는 것을 취재하러 서울에 와 있었다.
 
 사르 기자가 싱글러브 참모장에게 『귀하는 카터 대통령의 撤軍계획이 전쟁을 부를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싱글러브는 전역한 직후인 1978년 여름 白斗鎭 국회의장의 소개로 일본의 「新視点」이란 잡지 주간과 인터뷰를 했다. 이 녹취록을 구한 白씨는 자신의 회고록에 그 全文을 실었다.
 
 이 녹취록에 따르면 싱글러브는 자신이 『그렇다』고 대답한 것은 북한군의 戰力증강에 대한 최신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북한군은 1970년대 전반기에 대포와 전투기를 倍增시켰고 장갑차는 세 배로 늘렸으며, 수륙양용차와 수송기를 4배로 증강시키면서 휴전선 가까이 공군기지를 만들고 병력을 전진배치하고 공격대형을 취했다. 이런 정보를 미군은 1976년 초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카터가 1975년부터 駐韓미군 철수를 주장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싱글러브는 카터가 대통령이 된 이후엔 군부로부터 보고를 받고 撤軍주장을 취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워싱턴 포스트 기자에게 『나는 撤軍에 반대하지만 만약 대통령이 그렇게 결정한다면 우리는 직업의식과 열성을 다해 이를 수행할 것이다』고 덧붙였다는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인터뷰를 보도하면서 이 부분은 생략했다.
 
 5월19일 워싱턴 포스트 기사를 읽은 카터 대통령은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에게 즉시 싱글러브 참모장을 불러들여 데리고 오라는 지시를 했다. 브라운 국방장관은 한국에 가 있던 조지 브라운 합참의장에게 이 지시를 전달했고, 브라운 의장은 베시 사령관에게 명령해 싱글러브 소장을 백악관으로 보내게 했다. 워싱턴으로 불려 온 싱글러브 소장에게 브라운 장관은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한다.
 
 『대통령을 만나면 모든 책임을 기자에게 전가하세요.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고, 나는 撤軍을 지지합니다」라고 하란 말입니다』
 
 싱글러브 소장은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장관께선 잘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 기자는 본인의 발언을 정확하게 보도했습니다. 저는 제 생각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카터-싱글러브 면담
 
 브라운 장관은 싱글러브 소장을 데리고 카터 대통령 집무실로 갔다. 이상한 면담은 한 시간 반 동안 계속되었다. 카터 대통령은 경위를 물었고 싱글러브는 설명했다.
 
 『저는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발언을 한 시기는 韓美 간의 撤軍 협의가 있기 전이었으므로 각하께서 정책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撤軍 결정이 내려지면 이를 열심히 수행할 것이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런 결정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군인은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카터는 군대에 대한 민간통제의 전통에 대해서 강의하듯이 이야기했다. 녹취록에서 싱글러브는 『그런 것들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이므로 필요없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카터 대통령도 싱글러브를 달리 처벌할 근거가 없다는 판단을 했다. 다만, 그를 다른 부대로 전출시키라고 장관에게 지시했다. 美 하원 군사위원회의 소위원회는 싱글러브 소장에게 출두명령을 내렸다. 싱글러브는 소위원회에 나가서도 撤軍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이 소위원회는 그 뒤 한국을 방문하고 撤軍반대 의견을 냈다.
 
 이렇게 되니 싱글러브 소장의 인터뷰 파문은 워싱턴의 가장 큰 뉴스로 부각되고 카터는 곤경에 처했다. 브라운 국방장관은 싱글러브에게 한국으로 歸任하지 말고 바로 조지아州 육군사령부로 가라고 명령했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짐은 잘 챙겨서 보내 주겠다고 설득했다.
 
 강력하게 반대한 것은 베시 사령관이었다. 브라운 장관은 싱글러브 소장에 대한 성대한 환송파티나 훈장수여를 금지시키고, 朴대통령에 대한 離任(이임)인사차 방문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아 베시 사령관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싱글러브는 朴대통령을 만나지 못했으나 대통령은 사람을 보내 위로의 뜻을 전했다. 싱글러브 소장의 회고에 따르면 이임을 앞두고 일주일간 휴가를 얻어 한국을 여행했는데 가는 곳마다 보통시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식당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곤했다는 것이다.
 
 싱글러브는 조지아州의 육군사령부 참모장으로 전속되어 근무하다가 1978년 4월에 또 공개석상에서 카터의 중성자탄 제조연기, B-1 폭격기 생산계획취소 조치를 비판했다고 해서 전역당했다.
 
 이상의 경과를 살펴보면 베시 駐韓미군 사령관과 싱글러브 참모장은 카터의 撤軍특사가 朴대통령을 만나러 오는 시점을 D데이로 삼고 작전하듯이 反카터-反撤軍 공작을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駐韓미군 사령부는 朴대통령과 손잡고 카터를 물 먹인 셈이다. 이런 공작이 발각되었다면 군법회의에 넘겨졌을 만한 일을 감행해 가면서 베시와 싱글러브가 카터의 撤軍정책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撤軍의 논리와 전략이 너무나 허술하여 군부 전체의 웃음거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軍心이 완전히 떠난 상태에선 아무리 최고사령관의 의지가 강해도 먹히지 않는다는 교훈을 남긴 셈이다.
 
 
 『대단히 현명하지 못한 결정이다』
 
 1977년 5월25, 26일 양일간 미국 카터 대통령의 특사 하비브 국무차관과 브라운 합참의장이 청와대를 방문하여 朴대통령에게 카터의 撤軍계획을 통보했다. 첫날은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1시5분까지 소접견실에서 회의가 진행되었다. 한국 측에선 崔圭夏 국무총리를 비롯해 외무·국방장관, 대통령비서실장, 의전수석(통역)이 배석했다. 미국 측에선 스나이더 駐韓 미국대사와 베시 駐韓미군사령관이 배석했다. 둘째날인 26일에도 오후 4시부터 1시간 15분 동안 회의가 이어졌다.
 
 하비브와 브라운은 朴대통령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들의 설명요지는 이러했다.
 
 <撤軍은 한반도의 군사력 균형을 파괴하거나 북한의 오판을 유발하지 않도록 진행될 것이다. 한국의 자주국방 능력 향상을 위한 한국 측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對韓방위공약은 변함이 없다. 美 공군은 계속해서 주둔한다>
 
 朴대통령은 2~3일 전부터 꼼꼼히 메모해 두었던 견해를 조목조목 털어놓았다.
 
 <미국 대통령이 자기 나라 군대를 빼겠다는데 다른 나라가 막을 수는 없다. 駐韓 美 지상군을 4~5년내에 완전히 철수한다는 것은 韓美 양국을 위해서 대단히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美 지상군은 북한군의 再남침을 저지하는 관건이자, 일본과 東아시아의 방위를 위해서도 크나큰 기여를 하고 있다. 駐韓미군은 미국의 세계전략 차원에서 볼 때도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더불어 소련을 견제하는 2大 근간이다. 유엔군사령관을 겸하고 있는 駐韓미군사령관은 4만여의 駐韓미군과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60만 한국군, 그리고 고도의 훈련을 쌓았으며 전투경험도 있는 250만 내지 300만 명의 예비군까지 지휘하고 있다.
 
 소련은 그 병력의 3분의 2를 西歐에, 3분의 1을 극동에 배치하고 있다. 3분의 2에 대해서는 NATO軍이, 3분의 1에 대해서는 駐韓미군사령관 휘하의 韓美연합군이 대처하고 있다. 이런 미국의 세계군사전략으로 볼 때 駐韓미군을 완전히 철수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 朴대통령은 駐韓미군의 主力인 지상군이 철수하면 駐韓미군사령관에게 위임해 놓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도 再검토해야 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朴대통령은 金載圭 정보부장과 베시 사령관 사이의 밀약에 따라 「先보완 後철군」을 요구했다. 하비브 차관과 브라운 합참의장은 『카터 대통령의 방침은 보완과 撤軍을 병행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이 이견을 해결하기 위한 韓美 간 실무자회담을 수용했다.
 
 
 『카터 대통령의 체면을 살려주시오』
 
 1977년 5월26일 오후 撤軍관련 회담을 끝낸 朴대통령은 鮮于煉 공보비서관에게 회담에서 논의된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이렇게 구술했다.
 
 <먼저 하비브 美 국무차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고 한다.
 
 『대통령께 이제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카터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카터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입장이 어렵다는 것을 각하께서 잘 좀 이해해 주십시오. 카터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입장이나 얼굴,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간청합니다만 뭔가 제스처를 좀 써 주십시오』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스나이더 대사에게는 이미 이야기했지만 한국에 소위 인권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카터 대통령의 입장을 고려하고 이해해 달라는 이야기는 같은 정치인으로서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 내에 소위 인권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대통령에게 사면권은 있습니다. 나 자신 대통령으로서 사면권을 과거 몇 차례 행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민청학련 사건 때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 여부는 본인들, 즉 복역자들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개과천선하고 개전의 정을 보이고 또 복역 자세가 좋을 경우에는 내가 사면을 해왔고, 또 사면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복역자들의 자세가 마치 영웅이나 된 것처럼 경거망동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특히 귀하들이 온다니까 구세주나 오는 것처럼 기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면을 하겠소? 사면은 못 합니다. 그들이 왜 그런 자세를 갖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미국에서 소위 한국의 인권 문제가 거론되고 제기될 때마다 미국 정부가 「관심을 표명한다」는 식의 논평을 내니까 그들이 자세를 안 바꾸는 것 아닙니까?』>
 
 朴대통령은, 1977년 5월27일 오후 4시부터 두 시간 동안 신민당 당수 李哲承을 청와대로 초청해 韓美회담 결과를 설명했다. 李총재는 나중에 이렇게 기억했다.
 
 <인권과 미군철수를 흥정하는 미국의 압력에 그는 참으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국가안보를 볼모로 하여 정권투쟁을 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나는 중도통합의 철학에 따라 反정부와 反국가는 구별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쿠라라는 욕을 먹으면서도 朴대통령의 입장을 옹호했던 것이다>
 
 
 『李兄, 고맙습니다』
 
 李총재는 미국과 일본을 방문해 미군철수를 반대한다는 견해를 要路에 전달하는, 야당외교를 벌이기도 했었다. 이 자리에서 朴대통령은 『李兄, 撤軍에 반대하는 야당외교,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1950년대 사단장, 1군 참모장, 6관구 사령관을 지낼 때부터 야당의 국방위원이던 李哲承과 친했다.
 
 朴장군을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던 韓雄震(특무부대장 출신)이 李哲承 의원과 동향으로 두 사람을 연결해 주었다. 그때도 不義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의 朴장군은 국정감사를 오면 꼬치꼬치 문제를 따지고 드는 李의원을 좋아해 軍內의 문제점과 非理를 알려 주었다.
 
 4·19 혁명 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李哲承 의원은 당내 소장파의 선두에 섰고 국회 국방위원장으로서 張勉 정권의 실력자였다. 그때 매그루더 駐韓미군사령관은 젊은 장교들의 下剋上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이 朴正熙 소장(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라고 보고 새삼 거의 좌익 前歷을 문제 삼아 전역시킬 것을 張勉 총리에게 요구했다. 張총리는 이 문제로 李哲承과 의논했다.
 
 李의원은 朴소장의 인품을 이야기하면서 감쌌다. 朴소장도 李의원을 찾아와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朴소장은 전역당하는 대신에 대구의 2군 부사령관으로 전출되었다. 閑職(한직)이었기 때문에 쿠데타 모의에는 좋은 자리였다.
 
 가까운 영천엔 韓雄震 준장이 정보학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쿠데타 모의를 진전시켜 나갔다. 5·16 그날 밤 처음부터 끝까지 朴소장을 동행했던 이가 韓준장이었다.
 
 5·16 군사혁명이 나자 李哲承은 외국에 있다가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反朴운동을 벌이게 된다. 그는 약 8년간 정치휴학생이 되는 바람에 金大中·金泳三씨한테 밀리게 된다.
 
 이런 인연을 가진 李哲承 신민당 당수는 朴정권을 상대로 「참여하의 개혁」 노선을 추구했다. 외교·국방 문제에선 超黨的 협조를 하고 국내정치 문제에선 견제한다는 「중도통합노선」이 그것이다. 李哲承씨는 1978년 12월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 공화당보다도 득표율에서 1.1%를 이긴 것은 선거법·국회법·정치자금법에서 야당이 유리하도록 고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개정이 가능했던 것은 안보부문에서 朴정권에 협조해 주었으므로 朴대통령이 공화당의 반대를 꺾고 야당편을 들어 준 덕분이라고 한다.
 
 현재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서 애국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李씨는 『나는 대안 없는 兩金식 강경투쟁이 생리에 맞지 않았다』고 말했다.
 
 
 金日成, 카터에 美·北 직접 협상 제의
 
 「두 개의 한국」이란 책을 쓴 돈 오버도퍼 기자에 따르면 카터의 撤軍 특사 하비브와 브라운은 카터 대통령이 1977년 5월 초에 서명한 1급 비밀문서(撤軍일정표)를 朴대통령에게 설명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1978년 말까지 1개 여단 6000명을 빼내가고, 1980년 6월 말까지 또 1개 여단과 지원병력 최소 9000명을 철수하며, 한국에 있는 핵무기는 줄여 가다가 撤軍완료와 함께 다 가지고 나간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韓美 간 합의에 따라 카터가 낸 撤軍보완 예산이었다. 이 해 7월 브라운 국방장관이 19억 달러의 撤軍보완 예산을 의회 지도자에게 설명하자 한 사람도 撤軍을 찬성하지 않았고, 많은 의원들이 반대했다.
 
 의원들이 撤軍보완 예산 통과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朴대통령을 지지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싫어해서였다. 그들은 인권탄압, 對美불법로비, 한국 진출 미국계 회사들에 대한 정치헌금 강요, 金大中 납치사건 등으로 미국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朴정권에 대해서 그런 지원을 승인해 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 측에 撤軍에 따른 보완을 약속해 두었는데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撤軍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카터가 당면한 여러 장애물 중의 하나였다.
 
 金日成은 카터가 駐韓미군 철수를 공약하자 이 기회를 활용하여 對南 적화통일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다. 그는 1976년 11월 카터가 당선되자마자 파키스탄 대통령을 통해서 당선자에게 편지를 보내 직접 접촉을 제의했다.
 
 1977년 2월 허담 북한 외무상은 파키스탄 주재 미국대사관을 통해서 사이러스 밴스 美 국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국을 제외하고 미국과 직접 대화하자」는 내용이었다. 미국 측은 한국 정부가 참여해야 대화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1977년 7월 駐韓미군의 헬리콥터가 비행 실수로 북측 비무장지대 상공으로 들어갔다가 격추되어 미군 3명이 죽고 한 명은 억류되었다. 북한은 이례적으로 사흘 만에 유해와 생존 미군을 돌려주었다. 金日成은 가봉의 봉고 대통령, 유고슬라비아 티토 대통령,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대통령을 통해서도 카터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美北 직접 대화를 제의했으나 그때마다 미국은 「한국을 끼워야 한다」고 답변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金日成은 점점 카터에 대해 비판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는 카터가 撤軍 시기를 늦추면서 당초 계획을 변질시켜 가자 참지 못하고 그를 「사기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反共주의자라도 민주인사가 정권 잡아야』
 
 1977년 12월9일 오전 10시부터 평양에서 열렸던 에리히 호네커 東獨 공산당 서기장과 金日成 회담은 대화 기록이 통일 후 독일정부 손에 넘어가 공개되었다. 이 대화록은 朴대통령이 韓美관계로 苦戰하던 시기 金日成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金日成은 동갑내기인 호네커와 매우 친했다. 생일이 늦은 그를 「동생」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날 회담에서 金日成은 『美 제국주의자들이 남한을 30년 이상 지배하고 있지만 남한의 학생들은 우리를 지지하고 있습니다』라고 자랑했다.
 
 『남한의 학생들은 오늘날까지 단 한 번도 우리를 반대하는 시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남한의 학생들은 괴뢰정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우리와)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으며 우리와 평화협상도 안 하고 그들의 군대를 남한에서 철수시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남한의 애국자들이 권력을 쥘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내를 갖고 이 사업을 계속 추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한에서 朴正熙 같은 사람이 정권을 잡지 않고 정당한 민주인사가 정권을 잡는다면 그 사람이 반공주의자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든 그런 사람이 권력을 잡는다면 통일의 문제는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朴正熙를 고립시키고 남한의 민주화 투쟁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인내심을 갖고 투쟁해야 합니다. 남한에서 어쨌든 민주인사가 권력을 잡으면 조선의 평화통일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군사력을 감축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한을 공산주의로 만들고자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선언했기 때문에 그들도 우리의 사회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외국 군대는 물러가야 합니다. 남한의 애국세력이 민주화 투쟁은 더 많이 펼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朴正熙 괴뢰정부를 완전히 고립시켜야 합니다.
 
 며칠 전 정부의 억압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습니다. 朴正熙가 무너졌을 때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남한에서 민주적인 상황이 이루어진다면 노동자와 농민이 그들의 활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朴正熙와 협상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朴正熙와 함께 협상을 진행한다면 朴正熙에 반대하는 남한의 정치세력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미국은 항상 朴正熙와 우리를 함께 앉히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와는 협상을 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위의 대화에서 金日成은 對南赤化 전략의 본질을 공개하고 있다.
 
 ① 군사독재정권보다 反共민간정부가 유리하다.
 
 ② 민간정부下에서는 노동자·농민의 활동이 자유로워질 것이다.
 
 ③ 그렇게 되면 남한 국민들은 사회주의를 선택하게 된다.
 
 金日成이 朴正熙·全斗煥 정권을 반대한 것은, 남한內 민주화 세력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은 군사정권의 철권통치로 남한에서 공산당 조직의 활동이 위축돼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민주인사들이 집권하면 사회의 민주화 바람을 타고 공산세력을 뿌리 내리고 확산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한 것이다.
 
 
 『金泳三이 金大中을 사기꾼이라고 하더군』
 
 1977년 8월23일, 대통령이 청와대 식당에서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들에게 저녁을 냈다.
 
 식사가 끝나고 칵테일이 시작되면서 대통령은 화제를 바꾸었다.
 
 『오늘 내가 국립박물관에 들렀더니 미국 CBS 기자들이 와 있더군. 의전수석이 소개를 해서 내가 「하우 두 유두」 하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친구들은 한국에 와서 취재며 사진촬영을 할 때는 좋은 것도 많이 찍어 가면서, 돌아가서는 나쁜 장면만 보도한단 말이야.
 
 근혜가 일본 TBS 텔레비전과 만난다고 하기에 내가 사전에 단단히 따지고 하라고 했어. 어떤 장면을 내고 안 낸다는 약속을 받은 다음에 만나라고 그랬지. 그 약속을 할 수 없다면 그만두라고 했어. 홍보라는 것은 잘해야지, 그렇지 않고 엉뚱한 장면만 내보내면 다음부터 누구와도 인터뷰를 안 할 생각이야』
 
 이날 朴대통령이 거명한 야당 정치인은 趙炳玉·柳珍山·李哲承·金泳三 등이었다. 朴대통령은 金泳三씨가 『어리고 까분다』고 아주 틀려먹었다는 평을 했다. 朴대통령은 1975년에 자신이 金泳三씨를 만났을 때 『金泳三 총재가 金大中은 사기꾼』이라고 하더라면서 金大中씨에 대한 평을 대신했다.●
[ 2006-01-23, 18: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