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鶴山의 넋두리

아가페[agape]적인 사랑과 에로스[Eros]적인 사랑

鶴山 徐 仁 2006. 1. 23. 12:59

 

우리 인간의 삶에서 사랑(love)이라는 말은 인종이나 지역, 종교를 초월하여, 인간 정신생활의 기본적 감정으로서 가장 즐겨 사용하고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로 손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예술이나 문학에서나 도덕 및 철학과 종교를 포함하여 우리 인간의 삶 가운데 많은 영역에서 모두가 중요시 하는 가장 근본적인 관념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고대 그리스 인들은 오늘날의 사랑을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라는 세 종류의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인간의 총체적인 사랑을 구분하여 표현했으나 1973년도와 1976년도에 존 앨런 리는 두 가지 연구결과 발표를 통해서, 사랑의 상태를 여섯 가지층으로 구분을 하고 대부분의 사랑에는 이들 형태 중 두 가지, 혹은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나타난다고 설명을 하고 있다.
그 처 번째는, 에로스(Eros)로서, 에로스 타입은 완전히 육체적이고 성적인 매력에 매료된 사랑 관계로서, 이같은 사랑은 '깜짝 사랑, 영 이별 '이라는 우리네 속담처럼 빨리 불붙고 곧 없어지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루두스(Ludus)로서, 루두스 타입은 장난스러운 우연한 사랑을 말한다. 서로 크게 상대에게 관심을 보이지는 않으나 서로 만나는 게 재미있고 즐거우니까 좋아하는 관계로서, 상대가 다른 만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서로의 의존을 피하기 위해 서로 용납하고 관계를 유지한다. 특별한 온정의 상호 교류는 없으나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
세 번째로, 스토르지(Storge) 타입은 열정이나 탐닉은 많지 않으나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정이나 따스함을 느낄때다. 이 타입은 우정에서 사랑으로 변하는 경우에 흔히 볼 수 있는 상태다. 많은 경우 사랑 인지 단순한 우정인지 자신도 구별 못할 때가 많다. 애정의 위기 같은 것도 없고 비교적 지속 력이 강한 상태이나 극적인 정열이 없는 것이 흠이다.
네 번째의 마니아(Mania) 상태는 격정적인 사랑을 말한다. 즉 광기와 분이 계속되는 상태로서,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상대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지만 환희와 절망이 성난 파도처럼 교차되는 폭풍 노도 시대, 그러나 종말은 갑작스런 파탄을 가져올 확률이 많다.
다섯 번째는, 프라그마(Pragma)로서, 프라그마는 보다 현실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가슴보다 머리가 앞서는 사랑이다. 상대가 여러모로 자기에게 맞으니까 사랑한다는 타입이다. 성격이 맞고 조건도 그만하면 됐으니 한번 사귀어 보자고 하다가 시작된 사랑이다. 그러다 서로 더욱 마음이 맞으면 진한 사랑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아가페(Agape)로, 아가페는 지극히 기독교적인 사랑이다. 이해와 양보와 희생을 통해 벼루어 가는 사랑을 말한다. 플라토닉 러브의 기본 패턴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실제로 존재하기 힘든 사랑이어서 돈 환의 경우처럼 우리의 생각이나 이상 속에서만 살아 있는 실체라고도 한다. 
물론 이들 각각은 다소 상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앨런은 사랑은 이 중 2가지 혹은 3가지가 복합되어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럼 오늘날 대표적으로 대비해서 많이 사용하는 아가페와 에로스에 관해서 알아보년, 우선 그릿시대에 사랑으로 구분 했던, 아가페는 신적인 혹은 이타적인 사랑을 에로스는 육체적인 혹은 이기적인 사랑을 필리아는 정신적인 혹은 상호적 사랑을 의미한다. 아가페는 모든 인간을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나아가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사랑을 주기만 한다. 에로스는 플라톤에 의해 주장된 사랑으로 상대방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는 사랑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주장된 필리아는 상대방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무엇인가를 주는 사랑이다. 아가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랑이 아니다. 그리고 필리아는 사랑이라기 보다는 우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아가페는 종교적 도덕적 차원에서는 더욱 더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특히 종교 가운데서도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로도 불리워지고 있는 것처럼, 사랑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초기에는 서양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의 문화권에서는 거의 기독교적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근본 사상이 전개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서양에서의 전유물은 결코 아니며, 동양에서도 일찍부터 인(仁)과 자비(慈悲)라는 사상이 생성되었으며, 이는 바로 공자가 말하는 '효도는 의 근본'이라는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형제라는 혈연에 뿌리를 둔 사랑으로부터 발단되는 것이지만 종국에는 이러한 감정을 아무런 인연이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넓혀가고자 하는 것이 인(仁)의 도(道)라고 할 수 있는 인도(仁道)이다. 따라서,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의 시작이다"라고 말하면서 사람을 불쌍히 생각하고 가련히 여기는 동정심에서 사랑이 생긴다고 말했다.

한편으로, 묵자는 "하늘 아래 서로 겸애하라"(〈묵자〉 겸애편)고 말했으며 혈연이나 친족과 다른 사람들을 서로 구별하지 않고 대하는 평등한 사랑을 주장했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자'(慈)라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우정을 말하는 것이며 '비'(悲)는 것은 연민과 상냥함을 뜻한다. 따라서, 이 양자는 거의 같은 심정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는 자비라는 단어로 묶어서 하나의 관념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공자의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가르침에서처럼,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비를 베풀고 사랑한다는 것이 아주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으로 볼 때는 너무나 자명하다고 볼 수 있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을 연민하고 위로하는 가운데서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다른 사람과 자신과의 관계에 놓여지는 사랑이 담고 있는 일반적으로는 거의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것에 도전하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했다. 이를 몸소 실현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써 참된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달성될 수 없다는 모범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기독교는 이같은 절대적인 사랑을 원형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보통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엄격한 생활을 명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의미는 대체로 그리스어에서 파생 된 것으로 알고 있는 에로스(ers)와 아가페(agap) 그리고 필리아(philia)라는 3개의 단어로 표현되고 있다. 이들은 사랑에 있어 본질적인 3가지의 위상을 각각 가리키는 것으로 에로스는 정애(情愛)에 뿌리를 둔 정열적인 사랑이며, 철학자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말했듯이 곧잘 광기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일자(一者)와 합일하여 참 실재(實在)로 녹아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지상에서 육체적으로 생존하고 있는 한 신적인 것과의 일체화를 실현할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에 망아황홀(忘我恍惚)을 계속 구해가면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죽음과 만나게 된다. 에로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삶, 참 실재와의 만남을 계속 추구한 끝에는 "삶보다 죽음이 바람직하다"라는 기이한 결론에 이른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한 귀결이었다.

플라톤과 관련하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플라토닉 러브라고 하는 플라토닉이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에게서 유래하는 것이긴 하나 실상 이 플라토닉 러브는 플라톤 자신의 사상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이것과 관련해서 플라톤은 <향연()> 기타의 작품에서 사랑을 찬양하였는데 그것은 결국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은 이같은 에로스적인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신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무한한 질적 차이'라고 이름지은 것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신과 인간 사이에는 융합도 실체적 합일도 일어날 수 없다. 다만 신과 인간의 교제가 있을 뿐이다. 신과 인간은 절대의 심연에 의해 격리되어 있는데 어떻게 교제할 수 있는 것일까? 거기야말로 예수의 참된 존재의 의의가 인정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른바 신과 인간의 중보자(仲保者)였으며, 신의 아들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탄생했다는 것이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유일한 증거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신을 안다. 이 중보자가 없다면 신과의 모든 교제는 단절된다"(파스칼,〈팡세〉). 이같이 아가페적인 사랑에서는 자아가 신을 향해 가는 고조도, 열광적인 해체도 없다. 신과 인간 사이의 교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2개의 주체가 마주하여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고 존재하는 데에서만 이웃사랑의 교제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필리아의 사랑도 독립된 이성간에 성립되는 우애를 말하며, 이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은 자기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것을 바라는 사람', 또는 '자기와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자기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이며, 필리아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에 귀착한다. 이렇듯 이기적인 사랑으로 영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뜻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 악인까지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리아의 사랑이 아가페에까지 고양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신이 아닌 한 인류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하기는 불가능하며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신한다면 위선에 빠지게 될 것이다. 결코 위선에 빠지지 않는 사랑은 자기애적인 에로스뿐이며 필리아는 에로스적 요소를 잃는 정도에 따라 위선적인 사랑에 빠지기 쉽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필리아적 사랑은 아가페와 에로스의 양 극단을 오가게 된다.

그럼, 지금부터는 아가페 [agape]와 에로스 [Eros]를 중심으로 사랑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 보고자 한다.

먼저, 아가페[agape]는 신약성서〉에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사랑'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명사로서. 신약성서에서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과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 그리고 이 사랑에서 반드시 귀결되는 인간 서로간의 사랑을 가리키는 데 이 단어를 사용한다. 즉, 교회의 교부(敎父)들은 빵과 포도주를 모두 사용하는 의식과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는 사귐의 식사를 모두 가리키는 '애찬'(愛餐 love feast)이라는 뜻으로 아가페라는 말을 사용해왔다. 아가페, 주의 만찬(Lord's Supper), 성찬식(Eucharist)이 역사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이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아가페가 주의 만찬의 한 형태였고, 성찬식은 이 의식의 성사(聖事)적인 면이었다고 믿는다.

또다른 학자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자주 가진 모임을 본떠 만든 사귐의 식사로 아가페를 해석하고, 예수의 죽음을 강조하는 성찬식은 후대에 이 식사와 연결되기는 했으나 결국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믿는다. 예수가 당시의 유대교 의식(儀式) 모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아가페에 대한 해석은 복잡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원래[Eros]는  철학에서 정신적 사랑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으나 오늘날에는 아가페와 비교하여 육체적인 성적(性的) 사랑으로 대비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으로, 전설에 의하면 에로스는 대지와 함께 카오스(혼돈)에서 태어난 태초의 힘 또는 밤의 여신 닉스의 알에서 태어난 신이라고도 전한다. 헤시오도스(BC 700년경에 활동)가 쓴 신통기(神統記) Theogony〉에 따르면, 에로스는 우주의 태초적 공허인 카오스의 아들로서 초기에 생긴 신이었다. 그러나 그후의 전설은 그를 성애(性愛)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제우스이거나 아레스(전쟁의 신) 또는 헤르메스(신들의 전령)로 되어 있다. 에로스는 정열의 신일 뿐 아니라 풍요의 신이기도 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으로, 로마시대에는 큐핏(Cupid) 또는 아모르라고 불렸다.  이같이 고대부터 에로스를 둘러싸고 시인·종교가·철학자들이 여러 가지 해석을 하고 있으므로, 모든 것을 결부시켜 사랑의 힘을 구현하는 에로스는 처음에는 변덕스런 미소년으로 그려졌으나 그의 나이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점점 어려져 마침내는 활과 화살을 지닌 어린아이로 표현되었다. 헬레니즘시대의 시인들은 에로스가 가니메데스와 함께 호두 열매를 가지고 노는 모양을 읊었으며, 한편 폼페이 벽화에서 에로스는 유아의 모습으로 여러 신들로 묘사되어 있다. 에로스가 장난삼아 쏘는 화살은 사람뿐만 아니라 신들의 가슴에도 상처를 내, 사랑의 괴로움을 안겨준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조역의 역할을 하는 에로스는 프시케와의 사랑이야기에서는 주역이 되고 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세속의 에로스와 천상의 에로스라는 두 종류의 에로스를 구분하여, 세속의 에로스는 제우스와 디오네의 딸인 나이 어린 아프로디테의 자식으로서 사랑의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즉 세속의 에로스는 남성도 사랑하고 여성도 사랑한다. 또한 세속의 에로스는 영혼보다 육체를 사랑하지만, 육체는 시간 속에 소멸하기 때문에 세속적 사랑은 지속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가장 우둔한 사람을 사랑한다. 그러나 천상의 에로스는 우라노스가 어미 없이 낳은 나이 많은 아프로디테의 자식으로서, 세속의 에로스와 달리 육체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보다 더 용감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사랑한다. 특히 천상의 에로스는 성인 남성과 어린 소년 사이에 성립할 수 있기에, 성인 남성은 어린 소년을 통해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어린 소년은 성인 남성에게서 덕을 훈련받을 수 있다. 그리고 플라톤에 있어서 사랑은 영혼이 승천하는 데 필요한 원동력으로서, 인간은 사랑의 힘에 의해 진리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인간이 진리에 도달하기까지는 네 단계를 거쳐야 하는 데, 우선 육체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단계거쳐야 하며, 영혼은 다른 사람의 육체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육체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이 모두 같은 종류의 아름다움임을 알게 된다. 다음 단계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단계로서, 영혼은 육체의 아름다움보다는 영혼의 아름다움이 중요함을 깨닫는 것으로, 영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영혼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는 과정을 통해 모든 종류의 아름다움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다음 단계인 학문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단계상승하게 된다. 즉 영혼이 학문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되면 개별적인 아름다운 것들을 넘어서서 아름다운 것들을 아름답게 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추구하게 되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영혼은 마침내 아름다움 자체를 사랑하는 단계도달하게 된다. 아름다움 자체는 아름다운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아름답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아름다움 자체는 영원불변하고 완전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이러한 아름다움 자체가 진리라고 생각했으며,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사랑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며, 바로 이것을 철학이라고 했다. 이같이 에로스는 고그리스의 사랑의 신으로, 기원전 7~6세기 서사시에서는 무서운 힘과 예측할 수 없는 습격을 하는 신, 사랑의 쾌락과 미()의 신으로 생각되었는가 하면, 또 우주혼돈의 질서화의 원리라고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은 파르메니데스 등의 철학자에게로 흘러들었는데, 플라톤은 이 말이 원래 갖고 있던 성적 의미를 없애고 철학용어로 사용하였는데, 후에 플로티노스를 통해 신() 플라톤주의, 나아가서는 중세의 신비주의적 사랑의 개념으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플라톤에 의한 에로스란 절대의 선()을 영원히 소유하려고 하는 차원 높은 충동적 생명력이며, 멸()해가는 것은 그 본성으로서 될 수 있는 대로 영원불멸하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오직 생식()에 의해 낡은 것 대신 새로운 것을 남김으로써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를 소유하고자 하는 사랑을 모든 육체의 미(), 심령상의 미, 직업이나 제도의 미, 나아가서는 교육이나 예술, 철학상의 미에 대한 사랑으로까지 승화시켜, 마침내는 미 그 자체인 이데아의 인식에까지 이르는 데 에로스의 참뜻이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에로스는 인도철학의 바크티(신들의 경지에 이르는 열광적 절대귀의의 감정)나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애(), 또는 그리스도교에서의 아가페나 필레오와는 구별되는, 가장 그리스적인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프로이트는 1920년 정신분석 용어로서 처음 이 말을 썼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에로스는 일종의 에너지와 같은 것이어서, 그 목적은 생명을 보존하고 추진시키는 데 있으며, 그것이 성()의 본능과 결부될 때는 리비도가 되고, 자기 보존의 본능과 결부될 때는 자아() 리비도로 나타나기 때문에 에로스를 생명의 극한이라고 한다면 그 반대의 극한은 죽음의 본능이라고 말하였다.

사랑이라는 단어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아가페적인 것과 에로스적인 것을 살펴 보았지만 아무리 정신적인 사랑이라 하더라도 정신만으로는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정신 세계에서의 인간의 사랑을 우정이라고 한다면, 사랑과 우정은 근본적으로 다르며, 사랑은 자연스런 애정으로서 발생하고 또한 자연스런 감정으로서 어느 사이에 사라진다는 점에서, 결혼이라고 하는 제도 속에서의 남녀(부부)간의 애정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뿐만 아니라 연애감정은 이 감정을 제도화하고 형식화하는 일체의 것에 대해서 심한 반발을 느낀다.

육체적 기초 위에 꽃피는 자연스런 애정은 상대방의 선택에서도 신비적인 요소를 가진다. 한 남자가 어떻게 하여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지 그 동기나 이유도 잘 알 수 없다. 단순히 용모가 아름답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또는 상대방의 인격을 잘 안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연애감정은 첫눈에 싹트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한 사람의 이성()에 대해서 명확하게 의식된 어떤 가치관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스탕달은 이 사랑은 일종의 착각에 바탕을 둔 것으로 생각하여, 이 착각이 하나하나 쌓여가는 과정을 결정작용()에 비유했다. 그러나 오르테가는 이와 같은 사랑의 해석에 반대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랑애에서의 상대의 선택은 인간의 ‘영혼’의 심부()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것은 가장 신비적이고 불합리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애감정이 상대방의 일체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강렬한 감정이라는 면에서는 에고이스틱한 성질을 갖고 있고, 그러면서도 상대방을 생각하고, 상대방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일체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는 순수한 애타주의적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자기를 잊고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이 자기 모순적인 성격 때문에 연애감정 속에는 언제나 사랑과 미움이 공존한다. 흔히 연애감정이 식어갈 무렵에서의 좌절감 ·실연 ·배신 ·원한 등이 사랑의 참극을 초래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상대방의 일체를 소유하고 상대방과 문자 그대로 한 몸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은 인간성의 한계를 넘어선 무리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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