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우리나라 畵壇

[스크랩] 추사 김정희- 그림 글씨감상

鶴山 徐 仁 2005. 12. 21. 23:36

세한도

김정희
종이에 수묵
23cm x 69.2cm
개인 소장
1844(헌종 10)

〈세한도〉는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가로로 긴 지면에 가로놓인 초가와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를 매우 간략하게 그린 작품으로 그가 지향하는 문인화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갈필로 형태의 요점만을 간추린 듯 그려내어 한 치의 더함도 덜함도 용서치 않는 까슬까슬한 선비의 정신이 필선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그림에는 김정희 자신이 추사체로 쓴 발문이 적혀 있어 그림의 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였던 김병선이 소장하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대학 교수이며 추사 김정희의 연구자였던 후지즈카를 따라 도쿄로 건너가게 됐다.
당시 고서화 수장가인 손재형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일본으로 건너가 신발이 헤어지고 무릎이 헐 정도로 찾아가 매달린 끝에 결국 다시 찾아왔다.
당시 후지즈카가 소장했던 김정희에 관한 그 밖의 수많은 자료들은 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군의 폭격으로 대다수가 타버리고 말았으니 <세한도>는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화를 피한 셈이다.



 

부작란도

김정희
종이에 수묵
55cm x 30.6cm
개인 소장
〈부작란도〉는 김정희의 전형적인 난 그림과 글씨체를 동시에 잘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이다.
바람을 받은 듯 오른쪽 구석에서부터 꿈틀대며 힘차게 솟아 굽어진 난초를 화면의 중앙에 그려 넣고 그 주변의 여백에 제찬(題讚)을 써넣었다.
활짝 핀 난꽃에 있는 화심(花心)은 그림인지 글씨인지 구별이 잘 가지 않는다.
이러한 난 그림은 실제 난의 묘사라기보다는 난의 이미지를 나름대로 재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추사는 제주 한란을 아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글씨는 굵고 가는 획들이 서로 엇갈려 몹시 거칠면서도 힘차다.
난초의 굴곡진 모습이 마치 그의 글씨를 보는 듯하며, 그의 명성만큼이나 많은 도장이 찍혀 있다



예서대련


조선 후기의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체로, 북비(北碑)와 남첩(南帖)과 전예(篆隸)를 토대로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만들었다.
그의 독특한 서체는 제주도 유배시에 완성되었는데, 유배 생활의 고통이 엉클어진 듯 각이 지고 비틀어진 듯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특징이 있다.

출처 : 중년마음의광장
글쓴이 : 황매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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