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김정희
종이에 수묵
23cm x 69.2cm
개인 소장
1844(헌종 10)
〈세한도〉는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가로로 긴 지면에 가로놓인 초가와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를 매우 간략하게 그린 작품으로 그가 지향하는 문인화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갈필로 형태의 요점만을 간추린 듯 그려내어 한 치의 더함도 덜함도 용서치 않는 까슬까슬한 선비의 정신이 필선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그림에는 김정희 자신이 추사체로 쓴 발문이 적혀 있어 그림의 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였던 김병선이 소장하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대학 교수이며 추사 김정희의 연구자였던 후지즈카를 따라 도쿄로 건너가게 됐다.
당시 고서화 수장가인 손재형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일본으로 건너가 신발이 헤어지고 무릎이 헐 정도로 찾아가 매달린 끝에 결국 다시 찾아왔다.
당시 후지즈카가 소장했던 김정희에 관한 그 밖의 수많은 자료들은 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군의 폭격으로 대다수가 타버리고 말았으니 <세한도>는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화를 피한 셈이다.
부작란도
김정희 종이에 수묵 55cm x 30.6cm 개인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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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란도〉는 김정희의 전형적인 난 그림과 글씨체를 동시에 잘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이다. 바람을 받은 듯 오른쪽 구석에서부터 꿈틀대며 힘차게 솟아 굽어진 난초를 화면의 중앙에 그려 넣고 그 주변의 여백에 제찬(題讚)을 써넣었다. 활짝 핀 난꽃에 있는 화심(花心)은 그림인지 글씨인지 구별이 잘 가지 않는다. 이러한 난 그림은 실제 난의 묘사라기보다는 난의 이미지를 나름대로 재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추사는 제주 한란을 아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글씨는 굵고 가는 획들이 서로 엇갈려 몹시 거칠면서도 힘차다. 난초의 굴곡진 모습이 마치 그의 글씨를 보는 듯하며, 그의 명성만큼이나 많은 도장이 찍혀 있다 |
예서대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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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중년마음의광장
글쓴이 : 황매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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