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政治.社會 關係

[조선데스크] '同志냐, 敵이냐'

鶴山 徐 仁 2005. 12. 18. 16:28
金侊日 문화부 부장대우 kikim@chosun.com
입력 : 2005.12.16 19:32 29'


▲ 김광일 문화부 부장대우
출근길 어깨가 졸아든다. 귀가 떨어져 나가게 춥다.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겨울강 눈보라에 내 몸이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외벽에 걸린 정호승 시인의 시다. 날씨가 추우면 헐벗은 이웃이 걱정이다. 소매 경제는 호황의 자극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부터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른 수십 명의 사람들이 확성기 음악에 맞춰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아 동지여(동지여!) 적들은(적들은!) 무노동무임금의 억지를 부려/ 아 동지여(동지여!) 적들은(적들은!) 파업의 나팔소리 멈추라 한다/…”

그들 뒤에는 ‘○○○○ 철회하라’는 플래카드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행진곡풍으로 계속되는 노래는 여성가수가 녹음한 목소리다. 젊은 피를 끓게 할 만큼 선동적이며, 비장하고, 단호하다. 피눈물, 자본가, 총파업, 빛나는 상처, 환호성, 나팔소리 같은 어휘로 이어지는 가사는 죽창보다 선연하게 날을 세우고 있다. 어떤 대학생은 이 노래를 들으면서 공부를 했다고 자신의 블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자본가여, 먹지도 말라”는 대목을 인용해 놓고, “열심히 공부하자!”는 다짐을 하고 있다. 이들이 이곳에 확성기를 틀어 놓고 ‘옥외 투쟁’을 벌인 지는 오래됐다. 그들의 노래도 이미 귀에 익었다.

그들 곁을 지나는 수많은 출근하는 시민들은 거의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귀는 빌려주고 있는지는 몰라도 새삼 그들을 바라볼 여유는 없다. 그들이 하는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세히는 몰라도 이쯤은 오늘날 서울의 평범한 길거리 풍경에 편입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오늘 저녁도 차가운 보도(步道)에 앉아서 깜깜한 밤 공기에 저항의 촛불을 들고 있을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1만 년을 이어온 우리의 농업이 망했다”는 안타까운 목소리도 섞여 있다. 화해와 용서와 감사의 물결이 넘쳐흘러야 하는 12월의 길거리에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원한처럼 붉은 머리띠가 넘실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정작 무서운 일은 우리 사회가 이제 “동지여, 적들은…”이란 피아(彼我) 구도에 자꾸만 익숙해져 간다는 사실이다. 황우석 교수의 논문 검증 시비도 벌써부터 정치 투쟁의 대상처럼 변질되면서 전 국민을 상대로 “당신은 황 교수에게 동지냐, 적이냐”라고 묻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말해야 동지가 생기고, 적을 적이라고 지칭해야 내가 속한 진지(陣地)가 분명해 보이기 때문일까. 한 경제전문가는 내년도 경제의 화두(話頭)가 ‘양극화’란 걱정스러운 진단을 내놓았다. 희망·사랑·나눔의 불빛은 올 연말에도 환하게 세상을 밝히기 시작했는데, 해소되지 못한 우리의 응어리는 아직까지 “동지여, 적들은…”을 외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이다.

낮에는 투쟁 구호를 외치던 그들도 저녁에는 수백만 개의 형형색색 전구를 밝힌 루미나리에 행사에 가족과 친구의 손을 잡고 가벼운 발걸음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웃은 없고 “동지냐 적이냐”만 생각하게 하는 풍토가 자꾸 두렵다. 개인이 하는 일도, 단체나 회사가 하는 일도, 국가가 하는 일까지도, 이웃을 만들기보다 동지와 적으로 선명하게 가르기만 하는 지금 시대의 사악한 강박관념이 진정 두렵다.

나라 안팎으로 좋은 이웃들이 자꾸만 등을 돌리고 있는 게 안 보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