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스크랩] 유상곡수연이었던가 남산신께 제사지냈는가 / 포석정

鶴山 徐 仁 2005. 12. 5. 02:14

포석정

포석정에 대한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인식은

신라의 별궁으로 왕이 연회를 즐기던 곳이며 특히 55대 경애왕이 이곳에서 놀다가 후백제의 견훤에게 살해된 곳으로 신라 멸망의 상징적인 장소로 알려져 있다.

고려·조선시대의 시인들이 신라패망의 비운을 노래한 곳이기도 하다.

포석정은 본래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AD300년경 중국의 왕희지(王羲之)가 집안에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 작은 섬을 만들어 시인묵객들이 시를 지으면서 연못에 술잔을 띄워 벌주를 마시는 놀이를 하던 것이

중국 전체에 퍼지고 신라의 경주까지 전해진 것인데 이를 유상곡수(流上曲水)라고 한다.

그러나 신라의 포석정은 조각솜씨가 아주 우수한 것으로 보아 신라의 전성기인 8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포석정>

그러나 포석정은 신라인들의 유희장만은 아니었다.

포석정은 신라왕이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음복하면서 여흥을 즐기며 술잔을 띄우던 신성한 곳이었다.

또한 그 위치도 남산신성에서 가까운 곳이다.

신성이 어떤 곳인가? 신성은 나라가 위급할 때 신라의 조정이 피난가는 곳이며 이곳에서 항전을 벌이는 곳이다.

적과 항전을 벌이는 가까운 장소에서 유희를 즐길 수 있단 말인가?

견훤이 신라를 칩입할 당시는 12월 한겨울이었고

신라조정에서는 견훤이 이미 영천까지 진주한 것을 알고 개성으로 사신을 보내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해놓고 있는 상태였고,

왕건은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경주로 이동 중이었다.

즉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던 경애왕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조를 보자

헌강왕이 포석정(鮑石亭)에 나갔더니 남산의 산신이 임금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다.

측근자들은 못 보는데 왕만이 이것을 보았다.

그것이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는 대로 왕도 이것을 따라 스스로 춤을 추어 보였다.

그 귀신의 이름을 혹은 상심(祥審)이라고도 하므로 지금까지도 우리 나라의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해오면서 어무상심(御舞祥審)이라고도 하며 혹은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도 한다.

더러는 말하기를 원래 그 귀신이 나와서 춤을 출 때에 그 모양을 "자세히 본떠(審象)" 조각장이를 시켜 그대로 새겨 후대에 보였으므로 "상심(象審 : 본을 자세히 뜸)"이라고 하였다 한다.

혹은 또 상염무(霜髥舞 : 흰 수염 춤)라고도 하였으니 이것은 그 형상에 따라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處龍郞望海寺)조>

그렇다. 포석정은 임금이 신을 만나는 공간이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것이다.

경애왕 역시 꺼져 가는 신라 사직을 구하기 위해서 왕건에게 구원요청을 해놓고 포석정으로 와서 남산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경애왕이 포석정에 간 때는 12월이었다.

경애왕(景哀王)은 이제 더 이상 버틸 능력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한 겨울에 포석정에 술잔을 띄워놓고 유상곡수연(流上曲水宴)을 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최근의 발굴 결과가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1999년 5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포석정 남쪽에 모형 전시관을 건립하기 위해 시굴작업을 벌여 이곳에서 '砲石(포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암키와편을 수습하였다.

포석 명문기와와 함께 출토된 자른 기와들에 줄무늬, 혹은 비스듬한 격자 무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포석'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의 제작 연대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만 명문의 글자가 鮑자 가 아니라 砲자인 것은 글자의 획수를 줄이기 위한 것으로 이는 금석문에서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포석정>

이같은 사실이 중요성을 갖는 것은 지난 89년과 95년 잇따라 발견된 화랑세기(花郞世紀)필사본에서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祀), 혹은 줄여서 포사(鮑祀)라는 이름으로 진평왕(재위579∼632)대에 등장하고 있고 사(祀)라는 글자를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당 사(祀)자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흥청망청 술을 마시며 가무를 즐기던 곳이라는 종래의 학설과는 정반대로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사당터였다는 것이다.

출처 : 불국사초등학교21회 동기생모임
글쓴이 : 최광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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