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량(金斗樑. 1696-1763)
자는 도경(道卿), 호는 남리(南里) . 예천(藝泉)으로 영조대에 주로 활동한
화원으로 산수 . 인물 . 영모 등에 두루 뛰어났다.
김두량은 영조 때에 활약한 화원(畵院) 화가로 자는 도경(道卿), 호는 남리(南里) 또는
예천(藝泉), 산수 및 인물, 영모(翎毛), 신장(神將) 등을 잘 그렸다고 합니다.
외조부인
함제건(咸悌健)은 통신사(通信使)의 수행원으로 1682년 일본에 다녀온 화원(畵員)이며, 부친 효강(孝綱)도 화원임이고. 아들
김덕하도1748년숙종어진 모사에 참가한 화원인것으로 보아 집안이 화업을 대물림한 집안임을 알수 있다.
남리는 영조가 하사한
사호(賜號)이며, 영조가 친히 제발(題跋)을 쓴 작품도 유존하고 있어서 당시 화가로서 명성이 높았으며, 또 강세황(姜世晃)은 그의 소 그림을
중국 당대(唐代)의 대가 대숭(戴嵩)에 비견하며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화폭 좌측 상단에
'갑자중추김두량사(甲子仲秋金斗樑寫)'의 창연(蒼然)한 묵서(墨書)가 있고, 이어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있다. 이로써 1744년 그가 49세 때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8월 한가위, 중천에 뜬 보름달은 크고 둥그나 달빛 아래 드러난 고목들은 이미 잎이 다 떨어진 나목(裸木)들이며,
안개 낀 숲은 마냥 적막한데, 힘찬 물살이 가을의 정취를 더합니다. 전경(前景)의 엇갈린 두 고목과 가지 묘사에 여전히 보이는 게발 같은
해조묘(蟹爪描) 등 북송 화풍의 여운이 짙으나, 수묵 위주에 담채(淡彩)가 가해진 용묵법(用墨法)은 중국의 산수화와 구별되는 한국 산수화의
면모입니다
김두량은 산수(山水), 인물(人物), 풍속(風俗), 영모(翎毛) 등 여러 방면의 그림에 능숙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북종화풍을
따르면서도 남종화법이나 서양화법을 수용한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목동오수(牧童午睡)>와
<추동전원행렵도(秋冬田園行獵圖)〉 같은 풍속화와 서양화법을 보여주는 〈긁는 개〉 등의 동물화도 전한다.
강세황은 김두량의 「고사몽룡도(高士夢龍圖」의 발문에서 명수(名手)라 평했고, 임금이 남리(南里)라는 호를 하사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김두량은 18세기 화단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작에 《월야산수도》가 있으며, 이 밖에도
《춘하도리원호흥도(春夏桃李園豪興圖)》《월하계류도(月下溪流圖)》《고사몽룡도(高士夢龍圖)》《목우도(牧牛圖)》《맹견도(猛犬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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