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외국작가 畵壇

브뢰겔의 풍속화

鶴山 徐 仁 2005. 9. 27. 15:17
소더비 경매장 日記 / 브뢰겔의 풍속화
자연스럽고 익살스럽지만 인생에 대한 체념·냉소 담아

브뢰겔은 인간 유형들을 폭넓게 아우르며 인간심리의 바닥까지 훑어 준다.

박정민 미술품 경매 분석가·큐레이터
이화女大·同 대학원을 졸업. 삼성 옥션, 소더비, PBS 방송국의 「앤티크 로드쇼」, 록펠러 3세 컬렉션, 크리스티에서 실무를 거쳐 현재 뉴욕에 거주하며 미술품 경매 분석가·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소더비社의 시니어 스페셜리스트 가렛의 개인 연구원을 겸임. 저서 「경매장 가는 길」


「스탕달 신드롬」

얼마 전 잠시 뉴욕을 방문한 부모님께서 신신당부하신 엄명이 하나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반신욕」을 하라는 것이다. 저녁은 그렇다 쳐도, 아침에 침대에서 늑장을 피우다 헐레벌떡 집을 나가는 나에게 아침 반신욕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예상외로 반신욕을 하며 책 읽는 맛이 쏠쏠한 나머지, 책이 물에 젖어 전화번호부만 한 두께로 불어 버려도 아침에 자동으로 욕조에 물을 받는 습관이 생겼다. 부모님과의 약속 때문에 억지로 시작한 반신욕을 하면서 읽은 첫 번째 책이 제프리 초서(1320~ 1400)가 쓴 「캔터베리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읽을 때마다 경외롭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나 단테의 「신곡」에 버금가는 고전인 이 걸작은 영국의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 문학의 출발점을 이루기도 한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는 인생의 부조리한 면과 모순, 교훈을 깊이 있게 천착한다. 그러면서도 삶에 대한 낙천적인 자세를 잃지 않고, 유머와 관용을 일관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1996년作 영화 「스탕달 신드롬」에서 여주인공이 미술관에 걸린 작품 「이카루스의 비행」을 본 후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장면이 나온다. 뛰어난 미술품이나 예술작품을 접했을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각종 정신적 쇼크나 패닉, 분열 증상을 「스탕달 신드롬」이라 한다.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풍속화가 피터 브뢰겔

나는 美術史의 제프리 초서로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풍속화가인 피터 브뢰겔(1525~1569)을 꼽고 싶다.

영화 「스탕달 신드롬」에 나오는 「이카루스의 비행」을 그린 화가이기도 한 브뢰겔은 넘치는 기지와 관찰력으로 일상생활의 인물들을 화폭에 묘사했다. 아무리 까다로운 사람일지라도 브뢰겔의 작품에 담긴 활기찬 유머를 만나면 미소짓지 않을 수 없다.

브뢰겔은 다소 어리숙한 듯, 재주가 모자라는 듯한 그림을 그려내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경계심을 풀면서 그림에 접근하도록 한다. 시골 농부들의 일상사를 묘사한 그의 그림은 삶의 교훈을 들려주는 듯하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장면은 상당 부분 네덜란드 속담과 연관돼 있다.

한 사람은 양털을, 한 사람은 돼지털을 깎는 모습의 의미는 「한 사람은 이롭고, 한 사람은 이롭지 않은 일을 한다」는 속담을 묘사한 것이다. 엎은 밀가루 반죽을 주워 담는 그림은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는 헛수고를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브뢰겔의 구도 잡는 재능을 가장 높게 평가한다.


브뢰겔의 「농부들의 춤」

장대비가 내리다 갑자기 많은 먹구름이 걷힌 후, 그림 같은 풍경이 뉴욕 빌딩 숲 사이로 펼쳐졌다. 美術史에서 하늘에 대한 아름다움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인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이 봤으면 당장 밖으로 나와 그리고 싶어할 것 같은 하늘이었다.

오후 5시, 친구인 첼시가 일하고 있는 갤러리 오프닝장으로 향했다. 그 친구와는 거의 연락도 안 하고 서로 잘 챙겨 주는 것도 없는 무미건조한 우정이지만 진짜 맛있는 베이글 빵은 크림치즈를 안 발라도 맛있듯이, 「제대로」 된 사교는 포장과 가공이 없어도 서로가 느낄 수 있다. 첼시는 그러한 나의 게으른 생각을 이해해 주는 고마운 친구다. 오프닝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의 회전문을 돌렸다.

『일찍 왔네? 차 안 막히든? 뭐 마실 거 줄까?』

갤러리의 책상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던 첼시가 나에게 다가왔다. 지하철 2호선의 순환선같이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 잡담을 나누던 중에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빈 국립미술관에서 빌려 온 브뢰겔의 작품이 지하 창고에 있는데, 보여 줄까? 복제품이긴 하지만 미술관 전시용이야. 네가 보면 아주 좋아할걸?』

그녀를 따라서 간 갤러리 지하에는 브뢰겔이 나무판에 그린 유화 작품 「농부들의 춤」(1567년作, 빈 미술사 미술관 소장)이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짐가방처럼 스티커가 붙여진 채 비닐에 곱게 싸여 있었다.

그 그림은 시골 농부들의 초라한 잔치 장면이었다. 파티의 흥을 돋워야 하는 연주자들이 몹시 배고픈 표정으로 죽그릇을 바라보고 있다. 주정뱅이는 술을 더 달라고 아우성이고, 다락방 아낙네와 농부는 즐겁게 춤을 추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키스를 하고 있고, 거지는 돈을 달라고 조르고 있다.

브뢰겔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450여 년 전의 풍속화였지만 서울이나 뉴욕의 한복판을 걸을 때 만나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농부들의 결혼식과 피로연

브뢰겔이 그린 인간 희극들 중 가장 완벽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는 작품은 결혼에 관련된 것이다. 농부들의 결혼식과 피로연을 다룬 작품인 「시골의 결혼잔치」를 살펴보자.

인물과 경치를 표현해 내는 방법에 있어서 완성도가 높고 묵직한 중력감이 느껴진다. 퍼즐같이 빼곡한 인물들은 모두 견고하지만 평면적으로 채색되어 있다. 결혼식장 장소는 곡식을 쌓아 두는 곳간이다.

푸른 휘장 밑에 앉아 있는 신부는 빨갛게 상기된 뺨에 조용히 만족한 웃음을 지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신부의 왼쪽에는 그녀의 부모가 앉아서 잔치를 즐기고 있다. 오른쪽으로 하얀 두건을 쓴 두 여인의 옆에서 음식 먹는 데만 열중하고 있는 신랑이 앉아 있다. 왼쪽 구석에는 한 남자가 술을 따르고 있고, 맨 앞에는 접시를 왼손에 든 채 커다란 빨간 모자를 쓴 어린아이가 앉아서 게걸스럽게 음식을 핥아먹고 있다.

이 외에 다른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화면의 왼쪽 배경으로는 아직 식사를 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기다리고 있고, 배가 고픈지 허기진 눈빛으로 운반되어 오는 음식을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악사도 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음악처럼 연주하는 그림

식탁 밑에 개도 보이며, 하늘색 옷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남자와 나무 숟가락을 모자에 꽂은 남자는 나무 문짝으로 들것을 만들어 수프를 나르고 있다. 식탁의 모서리에 앉은 한 하객은 사람들에게 들것에서 바로 음식을 전달하고 있다. 신부의 부모 옆에서 젊은 수도사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마을 이장의 모습은 브뢰겔의 자화상과 비슷하게 생긴 점으로 미루어 보아 브뢰겔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이 작품은 영리하고 복잡하지만 동시에 유쾌하고 단순해 보인다. 브뢰겔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화가가 이러한 수많은 인물들이 함께 있는 공간을 풍부하고 실감 있게 정리해 그려낼 수 있겠는가. 그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음악처럼 연주하는 브뢰겔의 구도 잡는 법은 수준급이다.

긴 식탁은 원근법에 의해서 뒤로 후퇴하고 있지만, 뒤로 따라간 우리의 시선은 기다리고 있는 군중들의 다채로운 움직임으로 모인 후 다시 식탁에서 음식먹기에 여념이 없는 하객들, 음식을 나르고 있는 두 사람에게로 도착한다.


브뢰겔의 인물분석과 시대 배경

브뢰겔은 농민들의 결혼식 모습을 그리기 위해 직접 농부 차림을 하고 시골을 찾아다녔다. 처음 본 신부의 가족을 위해 축의금 봉투도 준비하는 등의 성의를 보였다고 한다.

그가 그린 농민들을 통해 보여 준 결혼식은 화려하지 않고 가식적이지도 않다. 곳간에 모여 빌린 그릇으로 하객을 맞이하고, 문짝을 떼내어 들것으로 사용하고, 긴 식탁에 둘러앉아 테이블보도 깔지 않고 하루 잘 먹고 즐기면 되는 즐거운 일상으로 이해하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브뢰겔은 교양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계층의 소박한 삶을 그림의 중심 주제로 다룬 유럽 최초의 화가였다. 사소한 일상들을 예술의 주제로 삼을 수 있다는 발상은 당시에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귀족들의 주문이나 후원으로 유지된 탓에 실제보다 멋있게, 젊게 그려진 초상화나 자신의 업적을 미화한 역사화, 거룩한 종교화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진부한 전통에 생명력 불어넣어

브뢰겔이 활동하던 당시의 플랑드르(벨기에 서부를 중심으로, 프랑스 북부와 네덜란드 남부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방)는 칼뱅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국가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모진 탄압을 받았다.당시 北유럽은 16~17세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회화가 계속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심각한 위기상태에 빠져 있었다.북부에서는 많은 新敎 사람들이 교회 안에 더 이상 舊시대의 산물 같은 聖像(성상)을 반대하고 제단화를 없애자고 주장해 화가들은 하루아침에 수입원을 잃어버리게 된다.

유럽의 新敎 국가 중 종교개혁을 무사하게 넘긴 유일한 나라는 이미 오래 전부터 미술이 발전해 온 네덜란드였다. 그 이유는 화가들 나름대로의 전문분야를 개발하여 신교도들이 반대하지 못할 틈새시장을 개척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탈리아人처럼 인체를 완벽하게 그려내지는 못했지만 자연을 보이는 대로 정확히 그리는 데는 으뜸가는 사람들이었다.

「최고의 풍속화가」라는 수식어가 이름 앞에 붙는 브뢰겔이 정치적·종교적 탄압 속에 일생을 걸쳐 정진한 작업은 진부한 전통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평범한 일상 속 삶의 진실

그는 평범한 일상 속에 감추어진 삶의 진실이 지닌 위력을 「풍자」라는 방법으로 확인시켰다. 브뢰겔의 고객이나 후원자들은 농민이 아닌 왕후 귀족들과 집권세력이었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이미 큰 성공을 거둔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이 가난한 농민을 그렸음에도 위협을 주지 않는 해학성을 담고 있었고, 그러기에 부유층과 귀족들에게 현실의 부조리를 잊게 해주고 전원생활을 통한 색다른 위안의 세계를 던져 주었다.

브뢰겔은 네덜란드 북쪽 브라반트州 스헤르토겐보스 근방의 브뢰겔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1553년 이탈리아 유학에서 귀국하여 앤트워프에서 작품생활을 하다가 1563년 스승의 딸과 결혼, 브뤼셀로 이사하여 그곳을 활동 본거지로 삼았다.

브뢰겔은 「한스 프랑커트」라는 신사적이고 귀족적인 상인을 후원자로 두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게 된다. 그들은 매일 만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고 농부들의 축제나 결혼식장을 그리기 위해 함께 동행하기도 했다.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 출품될 브뢰겔의 작품을 뉴욕 고객들에게 직접 보여 주기 위해 일주일간 뉴욕 소더비 10층에서 전시가 열렸다.

개인적으로 브뢰겔의 그림을 볼 때마다 종종 헷갈리는 실수가 있다. 전시장에 걸려 있는 그의 그림을 멀리서 보다가 천천히 앞으로 다가가면서 「저것이 아버지 브뢰겔의 그림일까, 아들 브뢰겔의 그림일까」 추측했다.

나는 여전히 두 사람의 그림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아버지 브뢰겔이 그린 그림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 그림 옆에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아들 피터 브뢰겔(1564~1637)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구별하기 힘든 두 父子의 작품

몇 번 마주쳤던 스페셜 리스트 아스테가 10층 식당에 있기에 『나는 이 두 사람의 작품이 도무지 구분이 안 되는데, 이 똑같은 그림을 그린 父子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지?』라고 물었더니 아스테가 귀에 대고 말하기를, 『사실 나도 구별할 때마다 애를 먹어』 하고 웃으며 위로해 준다.

기둥을 물어 뜯고 있는 사람, 남편에게 파란 덧옷을 입히는 부인, 남편이 부재중임을 알리는 빗자루를 대문간에 걸어두고 외간 남자를 유혹하는 아낙네, 아궁이를 향해 하품하는 사람, 냄비를 던지는 사람,빈 도마를 하염없이 써는 인간 군상들을 그린 것도 아버지 브뢰겔과 같고, 색깔이며 구도도 똑같은 아들 브뢰겔의 그림. 도대체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브뢰겔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인 피터 브뢰겔과 차남 얀 브뢰겔이다. 두 아들 중 부드러운 벨벳 같은 화법을 개발한 차남 얀은 나중에 아버지보다 더 유명한 화가가 된다. 그 이후 브뢰겔의 집안에서는 20여 명의 화가와 판화가가 배출된다. 장남 브뢰겔과 아버지 브뢰겔은 비슷한 작품이 많다.

지난 7월7일 소더비 런던 경매장에서 앤트워프 미술관이 소유하고 있던 작품 「세인트 조지의 축제」는 413만 달러에 거래되었다. 아버지 브뢰겔이 제작한 한 작품은 1965년에 120만 달러에 거래된 적이 있다.

14세기 작가의 소설과 16세기 화가의 그림을 비교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중 하나는, 세계 문학사와 미술사의 거장들은 시대와 사회가 바뀌는 데도 불구하고 몇백 년에 걸쳐 경외로운 존경심과 再평가를 오가며 살아 숨쉬고 있다는 점이다. 고전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별 생각없이 넘길 수도 있겠지만 매일 쏟아지는 많은 양의 책·정보·그림들 중 인류문명사에 사라지지 않는 작품이 탄생한다는 점은 신기하고 감사하게 느껴진다.

브뢰겔은 드로잉과 판화를 제외하면 단 50여 점의 유화작품만이 존재하지만, 「풍속화」라는 장르를 탄생시켰고, 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는 미완성인데도 중세문학의 기념비라 불리고 있다. 브뢰겔은 「풍속화의 아버지」로서, 초서는 「영문학의 아버지」로서(후대 셰익스피어를 제외하면) 이처럼 명예의 전당에 자리잡고 있다.

브뢰겔과 제프리 초서는 부유하게 자랐고, 종교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종교적이고 교훈적인 작품을 남긴 공통점이 있다. 풍자와 상이한 아이러니를 심도 있게 분석하며 세분화시킨다는 점도 비슷하다.


브뢰겔과 초서의 공통점-인간심리의 바닥까지 훑어

브뢰겔은 당시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는 사회구조가 얼마나 강대한 것인지,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생존 토대는 全유럽적 기독교 세계의 촘촘한 그물망 가운데 작고 연약한 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었기에, 브뢰겔의 풍자는 자주 자신들에 대한 자조로 귀결된다.

브뢰겔의 그림은 자연스럽고 익살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대해 다소 체념적이고 냉소적이다. 그에 반해 초서의 작품은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한 낙천적인 자세를 잃지 않고 있으며, 현실을 관찰하는 눈에서 유머와 관용을 일관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의 작품은 현실적으로 인간 유형들을 폭넓게 아우르며 인간심리의 바닥까지 훑어 주고 있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 점이 시대가 변해도 그들의 작품이 사랑받을 수 있는 생명력으로 자란 씨앗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