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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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함경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 돈돌날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鶴山 徐 仁 2005. 8. 12. 22:40

함경도 전역에서 구전, 전승되었던 놀이이다. 함흥, 정평, 이원, 풍산, 단천, 삼수,

 

갑산, 함경북도에는 길주, 명천, 성천지역에서도  널리 불려진 노래와 춤이다. 특히

 

북청지방에서는 새로운 문물을 전파하는 교통의 요지이자(북청==> 청진, 북청

 

==> 혜산진)  경제적으로 풍부한 자원을 뒷받침으로 전통민속놀이가 번성된것으

 

로 추측한다. 함경남도 북청지방에서는 한식 다음 날 부녀자들이 중심이 되어 남

 

대천邊(변)에서 속후면 모래산  기슭에서 달래를 캐고, 오후가 되면 일종의 유희

 

(遊戱)를  하였던 풍습이 있었다.

 

이 놀이틀 일명 '달래터 놀이'  라고 하며 이때 추는 춤을 '달래춤' 이라고 한다.

 

이때 돈돌날이 민요와 함께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 '돈돌날이' 춤으로 발전하였다.

 

 이때의 민요는 2/4나 4/4 박자가 주류를 이루어 아녀자들이 쉽게 따라 부르고 흥

 

겹워 경쾌하며 신명이 절로 난다.  「돈돌」이라는 단어적 의미는 여러 뜻을 내포

 

하고 있다.  언어학적으로 살펴보면 [회전]을 말한다.  함경도 사투리로 표현한

 

다면 「제 구비 」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더불어 『동틀 날 』즉 【여명 】의 뜻도

 

내포하고 있다.   고 양 주동 박사는 아리랑을 어원을  한글의 고유어와 한자의 혼

 

합적 해석을 통해 규명하면서 아리랑을 《광명, 光明》으로 밝히고 있어 이것이 각

 

지방의 사투리로  바뀌면서 로  함경도지방에서는 돈돌날이로 발전된것으로

 

추측된다. 대체적으로 함경도 민요들의 특징은 지역적, 역사적인 내용을 많이 표

 

현하고 있어 민초들이 삶은 가난하고 어려움의  연속이었지만  내일에 희망과 의

 

지를 가지고 살아가겠다는 신념의 표현이다. 이것이 조선의 말엽 대원군시대에는

 

경복궁 중수로 인하여 전국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백성들의 원성과 분노가 「애원

 

성」, 구한말 시대에는 「고향 떠나간지」일제가 강점시에는 「거스러미 」노래로

 

항일성격을 띈 노래로 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돈돌날이 민요가 시대적 변천에 따라 민초들이 의식을 정확히 반영하였다는

 

특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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