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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대유감 -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브레히트)

鶴山 徐 仁 2005. 8. 6. 14:14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브레히트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 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 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이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

 

작가소개: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1956]

독일 극작가·연출가. 아우크스부르크 출생. 본명은 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뮌헨대학 의과 학생이었으나 연극으로 전환, 1922년 《한밤의 북소리》로 클라이스트상을 받았다. 24년 베를린으로 옮겨 연출가 M. 라인하르트를 도와 활동하였고, 이때부터 마르크스사상을 공부하였다.

 

28년 여배우 헬레네 바이겔과 결혼하고, 같은 해 초연된 《서푼짜리 오페라》가 대성공을 거두었다. 30년부터는 《시도(試圖)》라는 제목으로 계속 작품을 출판하였다. 33년 오스트리아·스위스 등지를 거쳐 덴마크로 망명하고, 35년에는 파리의 국제작가회의에 참석하여 반나치스활동에 힘썼으며, 36년부터는 모스크바에서 독일망명작가 기관지인 《말》을 L. 포이히트방거·W. 브레델과 함께 발행하였다.

 

4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지만 47년 비미활동심사위원회(非美活動審査委員會)의 심문을 받고 유럽으로 탈출, 스위스를 거쳐 48년 동독으로 돌아와서 49년 부인과 함께 베를린에서 극단 <베를리너앙상블>을 설립하였다. 52년 브레히트의 모든 저작에 국민상이, 54년에는 레닌평화상이 주어졌다. 56년에 베를린에서 죽었다.

 

브레히트는 젊어서부터 관념·이상·도덕과 타협하지 않는 공격적이고 냉소적인 시를 씀과 동시에, 스스로 작곡하여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중심으로 한 초기의 연극작품에는 《발(Baal, 1923)》 《밤의 북(1922)》 등이 있다. 《도시의 정글(1923)》 《사나이는 사나이(1927)》는 대도시나 전쟁을 다루어 그 본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서푼짜리 오페라(1928)》 《마하고니시(市)의 흥망(1929)》이다. 이 두 작품은 K. 바일이 곡을 붙여 성공한 음악극인데, 브레히트의 서사극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매우 뜻깊다.

 

감정이입을 중심으로 한 <연극의 희곡적 형식>에 <연극의 서사시적 형식>을 대치시킨 브레히트의 시도가 작품에 붙여놓은 <주>를 통해 나타나 있다. 그 뒤 창작활동과 더불어 연극이론에 대해서도 적극적이어서 《오락연극인가 교육연극인가(1935)》 《실험 극장에 대해(1939)》 등을 썼고, 그 밖에도 《가두장면》 등 많은 유고를 모은 《놋쇠 사들이기(1937∼51)》, 정리된 이론서《연극을 위한 참고서(1949)》 《극장에서의 변증법(1953년 이후)》 등이 있다. 브레히트는 비(非)아리스토텔레스적 서사시적 연극이론에, 관객이 비판적으로 보고 환경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이화효과(異化效果)>이론을 더하였다.

 

중기에는 《예외와 원칙(1930)》 《예스맨과 노맨(1932)》 《조처(措處, 1932)》를 비롯한 이른바 교육극이 있고, 혁명운동을 넘어 변혁된 미래의 새로운 연극을 전망하였다. 역사가 역행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도살장의 성 요한나(1930, 1959년 초연)》 《어머니(1931)》가 완성되었다. 파시즘과의 투쟁 속에서 《뾰족머리와 둥글머리(1933, 1936년 초연)》 《카라르부인의 총(1937)》 《제3제국의 공포와 빈곤(1937, 1938년 초연)》이 상황과 목적에 따라서 어떤 때는 우화식으로,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수법으로, 어떤 때는 몽타주방식으로 창작되었다. 망명생활이 길어짐에 따라 작품은 내면적인 깊이도 보이며 우화와 역사극이 두드러졌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1939, 1941년 초연)》 《세추안의 착한 여자(1940, 1943년 초연)》 《푼틸라씨와 그의 종 마티(1941)》 《갈릴레이의 생애(1943)》 등이 그 보기이다. 미국 망명중에는 《제 2 차세계대전중의 슈베이크(1943)》 《코카서스의 백묵원(1945, 1948년 초연)》 등을 썼고, 그 뒤의 작품으로 《코민의 나날(1948)》 《안티고네(1948)》 《가정교사(1949)》 등과 그 밖에 많은 단막극 및 단편(斷片)인 유고가 있다. 희곡에 못지않게 시도 많은데, 초기 시집 《가정용설교집(1926)》, 망명기의 《스벤보르시집(1939)》 등은 그의 생애의 커다란 정신적 지주이다. 독특한 산문이 많이 실린 《코이나씨 이야기(1930∼50)》 《메티(1966)》 《망명자의 대화(1961)》, 장편 《서푼짜리 소설(1934)》 《카이사르 장삿속》 등은 서사시적 연극인인 그에게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가져온 곳: [북경이야기(北京故事)]  글쓴이: 지우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