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航空 宇宙 관련

2천의 계기 속에 갇힌 고독(3)

鶴山 徐 仁 2005. 7. 31. 22:52
게재일   8601 현재위치   3/3
출 전   월조 조 회   956
  2천의 계기 속에 갇힌 고독(3)

환상적인 루체른 호수

국제법상 비행기나 선박은 움직이는 영토다. 항로는 국경을 세계 속으로 확산, 확장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대한항공의 노선이 들어가는 도시는 일단 한국인에겐 가깝게 느껴진다. 미국인들조차 변경의 달동네 정도로 알고 있는 앵커리지가 한국인에겐 익은 이름이 됐다. 파리가 런던보다 더 친숙하게 받아들여지는 한 이유도 대한항공 노선이 런던엔 들어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항공의 노선이 계속 확장됨에 따라 한국인의 국경의식도 넓어질 것이다. 「갈 수 없는 아득한 먼 곳」이란 개념은 점차 한국인의 잠재의식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런 변화가 우리를 보다 대담하고 진취적으로 만들 것임은 물론이다.

스위스의 취리히도 대한항공이 주 2회 취항함으로써 우리와 보다 가까워진 도시다. 대한항공의 취리히 공항 소장 홍기덕(洪基德씨/39)는 『스위스에선 물건 잊어버리기도 힘듭니다』는 말로써 스위스 칭찬을 시작했다. 몇 년 전 스위스 항공은 온 세계의 신문 잡지에다가 승객이 두고 내린 가방 사진을 광고하여 주인 찾아주기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다. 내다 버린 것도 누가 주워서 친절하게 돌려주는 판이라 골치가 아프다고 우스개하는 한국사람도 있었다.

공항에서 차로 5분 거리인 메벤픽 호텔 방에 들어갔더니 탁자 위에 파란 사과 하나가 인쇄된 쪽지 위에 놓여 나를 반겼다. 「하루에 사과 하나씩 먹으면 의사가 필요 없다」는 금언이 적힌 쪽지였다. 어쨌든 기분이 좋아졌다. 이 첫 인상은 다음날 취리히를 떠날 때까지 계속됐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나도 모르게 스위스 홍보맨이 돼 있었다. 취리히 공항 지하에 있는 관광안내소에 가서 필라투스까지의 교통권을 끊었다. 무슨 영수증 같은 종이에 아무렇게나 긁적여 준 것이 표였다. 그 뒤 다섯 번이나 교통편을 바꿔 탔지만 이 표 하나로 다 통과가 됐다. 신용?바탕한 능률성의 표본이었다.

취리히에서 고도(古都) 루체른의 필라투스 봉우리를 돌아보고 내려오는 데는 다섯 가지 교통편을 이용해야 한다. 루체른 역까지는 기차, 클리엔스 역까지는 무궤도 전차, 클리엔스에서 해발 2천1백32m인 필라투스까진 케이블카. 이 케이블카를 타고 산기슭을 따라 오르니 구름 층을 뚫고 청명한 양광 아래로 나오게 됐다. 거기서 보이는 알프스의 경치에 대해선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엄청나게 좋다는 것만은 확실하니까.

필라투스라는 바위 봉우리로 올라가는 케이블 카는 마지막엔 거의 수직으로 달려 올라간다. 아래를 보면 오금이 저리지만 『케이블카는 스위스제가 최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마음이 놓였다. 신용은 공포감까지 물리쳤다. 필라투스 꼭대기에선 융프라우, 아이거 등 알프스의 거봉들이 잘 보인다. 눈을 아래로 돌리면 새파란 루체른 호수가 절벽 같은 산 아래에 펼쳐져 있다. 꼭대기에서 이 호수까지는 톱니바퀴로 움직이는 등산열차를 이용했다.

48도 경사를 곤두박질치며 내려가는 이 열차는 19세기말에 완성됐다. 스위스인들은 지독한 사람들이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배는 시내 버스처럼 중간 중간의 선창가에 멈춰 사람들을 태운다. 석양 속의 호수로 떨어지는 수백 길의 낭떠러지, 그 꼭대기의 교회, 그 중턱에 걸린 물안개, 장난감 같이 아기자기하게 꾸민 집, 집집마다 갖고 있는 자가용 보트 계류장, 호수를 병풍처럼 감싼 알프스의 연봉들, 호반공원의 낙엽 깔린 벤치… 환상적인 수상관광이었다.

히드루―세계 최대의 국제공항

취리히로 돌아오는 기차 칸에는 경기관총을 든 군인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국민 모두가 민방위 군으로 총은 집에 가져가서 보관한다. 스위스의 행복과 평화가 타국의 선의에 의해 지켜지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스위스 사람들의 관상에서 풍기는 특징은 당당함이다. 내 잘 난 맛에 산다고나 할까, 내 직분을 다 하는 데 누구한테 굽신거리겠는가 하는 오기라 할까, 그런 떳떳함이 하나의 공통된 표정으로 되어 있었다. 노인들이 힘차게 일하는 것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열차 승무원, 케이블카 조작기술자,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노인네들은 활기에 차 있고 근엄해 보였다. 보람을 가지고 사는 인간의 꿋꿋한 생명력이 거기에 있었다.

한 치의 땅도 허비하지 않으면서도, 변소 문의 손잡이까지도 개성을 살려 설계한 스위스인의 철저한 창조성에 나는 전율했다. 다음날엔 스위스 항공의 A300기 편으로 런던 히드루 공항에 도착했다. 1시간 30분의 비행. 런던은 흐려 있었다. 이용 승객수에서 세계 최대의 공항은 시카고의 오헤어로서 김포의 9배쯤 되는 4천3백만 명이 해마다 내리고 탄다. 이·착륙은 47초마다 한번씩. 히드루 공항은 84년에 약 3천만 명의 승객을 취급, 오헤어에는 못 미쳤지만 3천만 중 2천4백만 명이 국제선 승객이었다. 이 부문에선 세계 최고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4만5천 명의 종사원들이 관리하고 있는 활주로 3개의 이 공항을 「세계 최대의 국제공항」이라 자랑하고 있다.

역사의 무게로 해서 도시 전체가 장중하게 가라앉아 있는 런던의 관광은 「역사와의 대화」일 수밖에 없었다. 웨스트민스터 성당, 세인트 폴 성당에서 나는 책을 통해 친숙해진 인물들의 무덤과 접할 수 있었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한 엘리자베드 1세,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자 넬슨 제독, 쌍방에서 6만 명이 죽거나 다친 워털루의 대회전에서 나폴레옹을 넘어뜨린 웰링턴 장군, 시인 테니슨, 브라우닝, 소설가 디킨스의 숨결을 느끼며 성당을 돌아 다녔다.

대영 박물관에선 미이라로 변해 있는 이름 모를 고대 이집트인과, 대구 근처의 절에서 뜯겨 나와 어찌하여 이곳에 와 있는지 알 수 없는 거대한 조선조 시대의 탱화와 만났다. 런던탑에선 피비린내 났던 중세 영국의 왕궁비사를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40대 남자인 관광안내원은 입에 침을 튀기며 어느 왕비가 도끼로 참수되던 사형장을 설명했다. 도끼가 제대로 들지 않아 몇 번이나 휘둘러야 했기 때문에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는 설명에 어느 미국부인은 정말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일상생활 속에 살아 있는 역사가 거기에 있었다.

위대한 인물과 비참했던 사건과 영광스러웠던 과거와 끊임없이 대화할 수 있는 도시, 그래서 역사가 생활화된 곳이 런던이었다. 런던 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는 정진석(鄭晉錫)교수(외국어대·언론사)는 런던의 공공문서 보관소에 소장된 한국관계 자료의 방대함을 설명하면서 영국인의 기록정신을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차갑고 차분하면서 끈질긴 영국인의 기질이 식민지를 조직적으로 수탈하는 데 기여했던 점도 있겠지만 수탈한 문화재를 인류에게 반환하는 방법으로서 박물관과 도서관을 지은 안목도 대단하다. 그래서인지 한 해에 4백만 명이 입장하는 대영 박물관은 입장료가 무료였다.

역사와의 대화가 일상화된 도시

2박3일간의 런던 관광 뒤 에어 프랑스 편으로 40분의 비행 끝?파리의 드골 공항에 닿았다. 에어 프랑스의 A300기안에선 스튜어디스의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유럽이나 미국의 국내선은 고속버스 같다. 파리의 2박3일도 역사 탐방이었다. 나폴레옹이 묻힌 엥발리드의 군사 박물관은, 루브르 박물관으로 상징되는 프랑스의 높은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가 가진 힘의 원천은 창, 칼, 대포, 즉 무력이었음을 일깨워 준다. 칼과 피스톨, 갑옷과 창의 정교함은 일본도처럼 그 자체로서 하나의 훌륭한 예술품이었다. 나폴레옹의 무덤을 돌면서 나는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워털루 전투 장면을 생각했다. 나폴레옹 숭배자인 위고는 이 소설에다가 구성상 엉뚱하게 느껴지는 워털루 전투 장면을 한 장(章) 끼워 넣었다.

일종의 르포인데 박진감 넘치는 묘사로 희대의 명문으로 꼽힌다. 말발굽 소리, 창부딪치는 소리, 비명, 포성이 작렬하는 듯한 이 장면의 서술에서 그는 나폴레옹을 위한 변명을 하고 있다. 대희전의 그날 만약 비가 안 내렸다면, 전투는 2시간 일찍 시작됐을 것이고 나폴레옹은 프러시아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웰링턴을 격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영국군에 결정타를 가하기 위해 돌격한 나폴레옹 친위 용기병 5천이 척후대가 미리 발견하지 못했던 그 메마른 하천에 모조리 처박히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한 소년이 갈림길에서 길을 묻는 프러시아 원군에게 길을 잘못 가르쳐 주었다면 나폴레옹은 승리했을 것이다….

이런 가상 질문을 던지고 또 답하게 만드는 것이 생활 속에 살아 있는 문화재의 기능인 것이다. 런던과 파리의 엄청난 고 건축물을 보고는 우리 나라가 뒤늦게 동양 제일의 빌딩이니 하는 식으로 건물의 크기로 자랑을 삼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는 깨우침을 받았다. 17세기에 완성된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은 돔이 직경 34m, 높이 1백11m이고 무게는 6만4천t이나 된다. 크레인도, 기중기도 없었던 시절 이런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종교의 힘이었다. 인간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도록 만드는 것은 종교다. 「위대한」이란 형용사가 붙는 인물이나 건축물, 그리고 예술품은 거의가 종교와 관련이 있는 법이다.

맥킨리 산 지나며 코피 한 잔

10월31일 오후 2시 나는 대한항공의 902편 점보기에 몸을 싣고 드골 공항을 떴다. 아이슬랜드, 그린랜드를 지나 북위 80도의 북극권을 통과, 앵커리지에 이르는 9시간 반의 북극항로는 지구의 꼭지점 위를 나는 기분을 내게 했다. 나는 조종석에서 지도와 기상 레이다와 육안을 총동원하여 입체적으로 천하의 세계를 감상했다. 지도를 보고 3백30도 방향 3백km 근방에 그린랜드 해안이 있음을 확인하면 얼마 뒤 어김없이 레이다 스코프에서는 바로 그 방향에 샛노란 육지의 음영이 나타나고, 그 몇 분 뒤에는 아득한 수평선 너머 가물거리는 해안선이 육안으로 포착되는 것이었다.

그린랜드를 지나면서부터 숨막힐 듯한 장관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왼쪽엔 해, 오른쪽엔 달이 떠 반쪽의 낮과 반쪽의 밤사이로 점보기는 날아갔다. 지평선은 붉은 노을로 불타고 있었다. 그 색깔은 하늘이 높아질수록 노랑, 코발트 블루, 네이비 블루, 다크 블루로 변색되어 하늘의 화폭에다가 열정적인 그림을 그려 놓고 있었다. 그 아래로 전개되는 백색의 대륙은 신이 만든 거대한 아이스크림이었다. 높이가 4천m 이상인, 눈 덮인 얼음산은 그 눈의 부피로 해서 푹신푹신한 얼음과자의 느낌을 주었다. 쫙쫙 갈라진 얼음 바다, 빙하, 얼음산 언저리를 도끼로 쳐 낸 것처럼 쭈뼛한 빙산, 끝없는 대빙원, 거창한 접시 모양의 분화구가 계속 나타났다.

인간의 손이 한번도 닿은 적이 없는, 태초 그대로의 자연 위를 현대 기술문명의 정수가 날아가고 있었다. 노(盧)재성 기장은 앵커리지에서 캐나다를 지나 뉴욕까지 가는 항로의 경치가 더 아름답다고 했다. 북극항로에서 북극점에 가장 가까이 갔을 때는 북위 81도였다. 옛날엔 이곳을 지날 땐 북극권 통과 기념품을 주었다고 한다. 이날 천상 관광의 압권은 알라스카에 있는 북미대륙의 최고봉 맥킨리산(6천1백94m)이었다. 대한항공 902편은 캑킨리의 정상을 오른쪽으로 약 20km 위치에 두고 지나갔다.

대 빙원에서 우뚝 솟은, 뾰죽뾰죽한 봉우리 군은 괴기한 분위기를 풍겼다. 정상에서는 눈보라가 안개처럼 부옇게 일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조종실 창 밖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신만이 만들 수 있는 예술품이었다. 이때 모델처럼 잘 생긴 스튜어디스가 들어오더니 조종석의 네 사람에게 코피 한 잔씩을 돌렸다. 외기 온도는 섭씨로 영하 5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얼어붙은 순백색의 얼음 세계를 내려다보면서 조종석에서 마신 따끈한 코피의 맛을 어찌 잊을 것인가.

아! 좁은 대한민국

칼날 같은 백색의 산맥으로 둘러싸인 앵커리지 공항에 내려 점보는 3시간을 쉬었다. 이곳에선 승객을 태울 수도, 승객이 보세지역을 벗어날 수도 없게 돼 있다. 한국인이 많이 들리는 보세지역의 竄“×【?우동도 팔고, 한국교포 점원도 있었다. 점보는 기름을 가득 싣고 현지 시간으로 오후 4시10분에 이륙했다. 새로 조종간을 잡게 된 교체 기장은 장재문(張在文)씨(50)였다. 공군에서 L19, T6, F51, T33, F86F, F5A 등 거의 모든 기종을 다 몰아 본 전투조종사 출신. 전투기 비행시간(3천4백)을 포함 1만1천7백 시간의 조종경력을 가진 그는 권투선수가 샌드백을 칠 때 끼는, 손가락이 드러난 장갑을 오른손에 착용, 절도있게 계기를 조작해갔다.

007사건 이후 대한항공만은 R20항로를 일단 포기, 남쪽으로 약 1백km 내려온 안전한 항로를 날고 있다. 점보가 육상관제소가 없는 북태평양 상으로 나오자, 張기장은 위치 체크에 더욱 신경을 썼다. 위치를 확인하는 데 지표가 되는 것은 북쪽의 소련 섬들, 그리고 그 남쪽에 있는 시미아 등 미국의 섬들이었다. 포착 반경이 3백km인 기상 레이다에는 이들 육지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점보는 파리 이륙 뒤부터 줄곧 태양을 향해 날고 있었다. 20시간 이상 낮이 계속되는 항로다.

점보는 A급 태풍의 두 배쯤 되는 초속 70∼80m의 어마어마한 맞바람을 받으며 날았다. 뭉개 구름의 상공은 난기류이기 때문에 비행기가 흔들린다. 위험하지는 않지만 승객의 안락을 위해, 張기장은 INS에서 수동조종으로 바꿔 우회해갔다. 그 며칠 전 JAL기는 난기류를 피한 뒤 항법 스위치를 다시 「INS작동」쪽으로 돌려놓는 것을 잊어먹어 소련 영공 쪽으로 접근하는 사고를 냈었다. 단추만 한 스위치의 단순한 조작이 수백 명의 안위(安危)와 직결된다는 점에 현대 기술문명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레이다 스코프에 섬도 해안선도 안 잡히는 북태평양 한가운데서 우리는 반가운 동반자를 만났다. 타이항공의 점보가 우리보다 6백m 높은 상공에서 나란히 날고 있었다. 이날은 고도가 높을수록 역풍도 강해 타이항공의 점보는 서서히 뒤로 쳐지기 시작했다. 동체에 쓴 글짜가 보일 정도의 근접거리를 두고 우리는 타이 점보를 앞질렀다. 일본 상공을 지날 무렵부터 어두워졌다. 천상 지도여행을 즐기면서 나는 이 지구가 한 뼘 밖에 안 되는 지도나 레이다 스코프에 축소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새삼 지도의 정확성에 감탄했다.

오늘의 이 지도를 있게 한 위대한 탐험가들을 생각하기도 했다. 조선조 철종시절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선생은 30여 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 지금도 고적답사를 나가는 사람들은 이 지도를 꼭 갖고 가야 할만큼 정확무비하다. 金正浩 선생은 돈을 벌기 위해 지도를 만들지는 않았다. 당대에 명예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도 아니었다. 金선생의 가슴속에서 그토록 오래 불타고 있었던 열정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 열정은 아마도 아문젠과 스코트를 북극과 남극으로 내몬 것과 비슷한 호기심, 그리고 인간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었을 것이다.

11월1일 밤 7시쯤(한국시간) 내가 탄 점보는 드디어 포항 상공을 지나 서울로 접근하고 있었다. 포항 울산 부산 경주 대구 구미 등 도회지에서 내뿜는 불빛이 야간경기 때의 잠실야구장처럼 이곳저곳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정말 좁은 국토로구나 하는 실감과 함께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부모와 조국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 조국이 10km상공에선 거의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서로 지지고 볶고 할 이유가 뭐람, 육상에 내리면 나 자신부터 좀 순화시켜야겠다는 등등의 상념에 빠져 있는데 어느 새 서울 상공이었다. 김포 활주로의 불빛을 12시 방향에 놓고 점보는 눈에 안 보이는 유도 전파의 미끄럼틀을 타고 서서히 내려가고 있었다. 착륙바퀴를 내리면서 조종실의 세 사람은 더욱 바빠졌다. 「콜 아웃」의 듬직한 목소리가 이번 착륙도 부드럽고 포근할 것임을 보증해 주는 듯 했다. 10일간의 지구 일주가 끝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