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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5시26분에 김포를 출발했던 점보가 샌프란시스코 상공에 다다랐을 때는 현지시간으로 23일 오전 10시30분께였다.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잇는 다리가 내려다 보였다. 점보는 여기서 우회전했다. 캘리포니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종실이 바빠졌다. 지상관제소와 수시로 통화하면서, 그쪽 지시에 따라 고도와 방향을 자주 바꾸곤 했다. 왼쪽으로 호수와 사막, 사막 속을 실핏줄처럼 흐르는 수로, 그리고 민둥산들이 보였다. 착륙 30분전부터 점보는 고도를 낮추며 속도도 줄이기 시작했다. 조종방법도 INS에서 수동으로 바꿨다. 옆으로, 또 밑으로 스치는 비행기가 많아지고, 개방된 무전기에선 여자관제사의 목소리가 뒤섞인 비행기-관제소 교신이 쉴 사이 없이 들려왔다. 현지시간 11시10분께 점보는 로스앤젤레스 상공에 도달했다. 평원에 퍼져 있는 거대한 도시가 한 눈에 들어왔다. 뉴욕 맨해턴이 수직 도시라면 로스앤젤레스는 수평도시다. 끝간데 없이 뻗어 있는 시가지다. 점보는 로스앤젤레스의 국제공항의 6개 활주로 중 24R(R=Right 24번 오른쪽 활주로)로 접근했다. 이륙보다 착륙 때 신경이 더 오랫동안 쓰이지만, 기장들은 이륙 때가 더 어렵다고 했다. 착륙 때는 충분한 고도와 속도를 갖고 있으므로 비상사태가 발생해도 대응할 여유가 있다. 이륙 땐 속도가 충분히 붙지 않을 때이고 고도도 낮아 조종사의 대응조처는 크게 제한된다는 것이다. 대한항공 조종사들의 부드러운 착륙 기술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날개에 달린 공기 저항판의 각도와 착륙 속도를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기술 덕분이다. 김의경(金義經)기장도 연인 품에 안기듯, 시속 2백km 속도로 점보를 살푸시 착지시켰다. 오전 11?4분이었다. 그러니 9시간58분의 비행이었다. 약1만km를 날아오면서 1백10여t의 기름을 써버린 덕분에 SUD의 무게는 3백55t에서 약 2백40t으로 가벼워져 있었다. SUD는 2백65t 이상의 무게로서는 착륙할 수가 없다. 고장 등으로 이륙공항에 재 착륙 할 때는 기름을 쏟아 무게를 한계중량 아래로 줄인다. 조종사들은 점보를 승강구 쪽으로 몰면서 최종적인 계기점검을 실시했다. INS의 오차도 체크했다. 입력된 항로상의 비행거리와 실제 비행거리의 차이는 불과 1천8백56m에 불과했다. 교대한 뒤 1등 석에서 잠을 잤던 孟기장은 『이제부터는 호텔에 가서 정신없이 또 자야겠다』면서 총총히 공항을 빠져나갔다. SUD는 그날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3시간을 쉬었다. 그 사이 대한항공의 현지 정비팀은 기체점검을 했다. 그날 오후 3시 SUD는 로스앤젤레스 공항을 이륙, 서울로 향했다. 이번엔 맞바람을 받아 12시간 이상의 비행 끝에 24일 오후 7시께 김포에 도착했다. SUD는 26시간만에 태평양을 왕복한 것이다. 지구 반 바퀴의 거리를. 팬텀의 총본산 MD사(社)를 찾아 다음날인 10월24일 나는 대한항공의 주선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인 롱비치로 갔다. 맥도넬 더글러스 공장을 찾아간 것이다. 세계항공산업계에선 두 회사의 이름이 우뚝하다. 시애틀에 본사를 둔 보잉과 롱비치에 본사를 둔 맥도넬 더글러스. B-29, B-52, 조기경보기(AWACS), 보잉707, 737, 747, 757, 767이 보잉사의 작품이다. DC-10, MD(Mcdonnell Douglas의 약자)-82, F-4, F-15들이 MD사의 작품들이다. 폭격기, 점보 등 대형기를 많이 만든 보잉사의 제품은 튼튼하고, 고속전투기 등을 많이 만든 맥도넬 더글러스사의 비행기는 정교한 것이 특징이라고 기장들은 말하고 있다. 매출액 면에서 보잉은 85년에 약 1백35억 달러(추정)로서 약 1백10억 달러(추정)인 MD를 약간 누르고 있다. 84년의 세계 민간여객기 판매시장 점유율(계약기준)을 보면 보잉이 43%, MD가 34%, 프랑스의 에어버스가 17%, 기타 6%였다. 보잉사에서 만든 약4천2백대의 여객기는 전세계에서 매일 약 1백20만 명을 나르고 있다. 이는 소련을 제외한 전세계 항공여객수의 약40%나 된다. 지금의 MD는 지난 63년 멕도넬과 더글러스가 합병하여 이뤄진 회사다. 더글러스사는 1950년대까지는 타의 추종을 허용치 않는 세계최대의 항공기 메이커였다. 1935년에 만든 DC-3은 여객기로서, 2차 대전중엔 군용기로서 널리 사용됐다. 세계민간 항공의 여명기에 견인차 역할을 했던 이 비행기는 모두 1만6백55대가 팔려 항공산업의 혁신을 가져왔다. 아직도 수백 대가 날아다니고 있다. DC-3 덕분에 더글러스는 1944년엔 매출액 면에서 미국의 4번째 기업이 되기도 했다. MD사의 베스트셀러는 팬텀(F-4)이다. 전투기와 폭격기 기능을 겸한 이 비행기는 근 20년간 미국공군과 해군의 주력기 구실을 했다. 지금까지 5천3백대가 만들어졌다. 개량이 계속되면 21세기에도 팬텀은 계속 가동할 것이다. 중무장한 팬텀은 기체중량(12.7t)보다 2.5배나 무거운 27.4t이다. 폭탄과 유도탄을 주렁주렁 단 팬텀이 음속 2배의 속도로 돌진하는 모습은 하늘의 최대장관이다. 최첨단의 전자무기 통제시스템을 갖춘 팬텀은 종래의 공중전 개념도 바꿔놓았다. 서로 꼬리를 물고 싸우는 공중전은, 팬텀 시대에 와선 10…20km 사이를 두고 한번 스치면 미사일로 결정이 나버리는 전자전으로 바뀌어 갔다. 나는 팬텀 우리나라에 도입된 60년대 말 공군에서 팬텀의 요격관제에 관계한 적이 있다. 자체 레이다가 없는 F-86세이버 전투기는 가상 적기로부터 4…6km 떨어진 위치까지 지상 레이다로 유도해 주어야 조종사가 공격을 시작할 수가 있다. 팬텀은 30…40km까지만 접근시켜도 자체 레이다로 적기를 포착, 독자적으로 공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젖먹이와 프로권투선수 만큼의 차이였다. 항공기 무기체제의 독점과 종속 MD사는 지난 74년엔 F-15를 개발함으로써 팬텀의 후계기종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공군은 팬텀을 F-15로 교체해가고 있다. F-15는 추진력이 팬텀의 거의 두 배나 되고 완전 무장하면 30t이나 된다. 공대공 유도탄 8기와 기관포 외에도 6t의 폭탄을 더 실을 수 있다. 이륙 1분만에 고도 12km, 2분만에 약 21km까지 거의 수직으로 상승한다. 최대속도는 음속 2.5이지만 공대지(空對地) 작전에선 시속 1백80km의 저속도도 가능하다. 여러 가지 점에서 세계 최강의 전투기로 꼽히는 F-15는 84년 말까지 8백77대가 만들어졌다. 84년에 MD는 F-15 등 전투기 판매에서 약 53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 군수산업의 비중이 55%나 되고 있다. 보잉이나 MD에선 외국에도 최신형 군용기를 팔지만, 문제가 발생했을 땐 부품공급을 중단한다. 그러면 고철이 돼버린다. 이란이 그런 꼴이다. 팔레비 시절에 갖고 있던 팬텀, F-14등 최신 예기는 호메이니의 집권 후, 미국회사에서 부품을 대주지 않아 이라크와의 전쟁 때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수백만 개의 정교한 부품으로 이뤄진 전투기는 나사나 스위치 몇 개만 바꿔주지 않아도 뜰 수가 없다. 미국 전투기를 산다는 것은 미국 회사의 무기체제에 상당기간 종속되는 것을 뜻한다. 항공기 제작공장은 첨단산업의 정수들만 모인 곳이다. 그래서 거창하고 깔끔할 것이라고 상상하게 된다. 내가 찾아간 롱비치의 MD사 공장은 깔끔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았다.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꼭 큰 철공소 같은 인상이었다. 뚱땅뚱땅거리며, 비행기 동체를 조립해가는 작업도 다분히 수공업적이란 인상을 받았다. MD사만 그런 게 아니고 시애틀의 보잉공장 등 다른 항공기 메이커도 비슷하다고 동행한 대한항공의 金백순 과장이 설명해 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항공기 공장은, 수많은 하청공장 등에서 만들어 온 부품들을 끼워 맞추는 것이 주된 일이기 때문이다. MD사에선 자체적으로 부품을 만들 필요가 없어, 조립라인 중심의 시설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2천9백억 달러의 시장 나를 소개해 준 대한항공이 최근MD사의 신개발 기종인 MD-82를 6대나 사주어서 그런지 MD사에선 나를 아주 극진히 안내해 주었다. 1시간 동안 공장 구석구석을 보여준 뒤에는 브리핑 룸에 데리고 갔다. 그리곤 2시간 동안 네 명의 부장이 교대로 나와서 단 한 명의 청중을 향해 신형기 개발과 판매에 대해 성실하게 브리핑을 해 갔다. 더글러스 항공사의 창립자 손자인 제임스 더글러스씨(장기계획부장)는 민간 항공 시장의 전망을 설명했다. 84년 말 현재 세계엔 5천4백31대의 여객기가 있다. 2천년에 가면 9천5백11대로 늘어날 것이다. 그로 해서 약 2천9백20억 달러 어치 신규 구매가 있을 것이란 전망이었다. MD는 전체 매출액의 약21%만 민간기 부문에서 올리고 있는데, 최근 개발한 중거리용 MD-80이 1천4백16대나 팔리는 등 대히트를 친 데 용기를 얻어 보잉에 본격적으로 도전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점보보다는 약간 작고 DC-10보다 약간 큰 3백21인승 MD-11을 개발, 오래된 점보를 교체토록 한다는 것이 MD가 주력하고 있는 전략이다. 새 기종의 개발엔 수십 억 달러가 들기도 한다. 3백77t짜리 SUD가 20만t 유조선 다섯 대와 맞먹는 값으로 팔리는 것도 개발비 때문이다. 미국이 일본보다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는 분야가 항공산업이다. 미국항공산업은 군산(軍産) 복합체란 별명을 들을 정도로 소비자로서의 군과 밀착된 관계다. 그런 배경이 없는 일본으로선 도전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신기종의 개발에서 핵심 되는 문제는 연료비 절감이다. 연료비를 줄이려면 기체의 무게도 줄여야 한다. 그러면 안전성이 희생될 수도 있다. MD사는 DC-10을 개발할 때 16kg의 무게를 줄이려고 안전성이 약한 화물칸 도어 시스팀을 채택했었다. 이 문짝이 비행 중 열리면서 일어난 것이 3백46명이 몰사한 파리의 DC-10 추락사고였다. 이 사례를 염두에 두고 MD사 측에 안전성과 경제성의 상충된 관계를 물었더니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안전성을 타협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모범답안이 나왔다. 미국에선 요즈음 새로운 교통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값싼 자가용 비행기의 보급이 그것이다. 대한항공 미주지역본부장 김태조(金泰助)이사는 『어떤 미국인은 「거기에 가면 비행기 파킹할 장소가 있느냐」고 확인한 뒤 헬리콥터를 몰고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다. 자체 활주로를 설치하고 있는 집들도 많아지고 있다. 플라스틱 재료로서 기백만 원에도 만들 수 있는 소형 비행기가 하늘을 어지럽힐 날이 다가오고 있다. 항공사고 예방에도 골치가 아파질 것 같다. 10월25일 오전 11시30분 나는 팬암 항공사의 점보에 몸을 싣고 로스앤젤레스를 이륙했다. 벽면엔 때가 끼고 잔금이 간 곳이 많은 낡은 점보였다. 팬암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ALA국에선 공식적인 「내셔널 캐리어」, 즉 국가대표 항공사를 두지 않고 있지만 팬암이 사실상 그런 대접을 받고 있다. 지난 50년간 세계 민간항공업계의 선두주자로 끊임없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온 것이 이 회사였다. 전설적 인물인 주안 트리프 회장의 개척정신으로 팬암은 최초의 지구일주 항로를 개설했고, 보잉 707을 맨 처음 도입하여 제트여객기 시대를 개막했다. 보잉 747도 팬암이 가장 먼저 운항시킴으로써 항공여행의 대중화 혁명을 몰고 왔던 것이다. 10km 상공에서의 관광 항공사의 크기를 나타내는 「승객 km」 기준에서 팬암은 주로 미국 국내선을 날아다니는 유나이티드 항공, 아메리칸 항공에 이어 세계3위를 차지해 왔다. 요즈음은 적자에 허덕여 국제노선의 항로권을 계속 팔고 있다(세계 10대 항공사로는 위의 세 미국회사 이외에 미국의 이스턴, TWA, 영국항공, 에어 프랑스, 서독의 루프트한자, 캐나다 항공을 꼽는다). 나는 이코노미 클라스의 왼쪽 편 창 쪽에 자리잡았다. 상공 1만m로부터 미국을 관광할 참이었다. 내 손엔 천상관광의 가이드가 될 8절지 가량의 미국 지도가 놓여 있었다. 팬암기는 서북서쪽으로 날았다. 날씨는 쾌청. 곧 네바다 사막지대가 나타났다. 황토 빛 천지였다. 영화에서 눈이 익은, 선인장 모양의 기괴한 돌산이 엄청난 질량감으로 치솟아 있었다. 라스베가스를 지나 그랜드 캐년 상공에 다다랐다. 협곡을 이루며 흐르는 콜로라도 강, 호수. 지구의 속살을 벌겋게 찢어 발겨서 드러내 놓은 것 같은 그랜드 캐년은 압권이었다. 그랜드 캐년은 콜로라도 강을 따라 약 3백km에 걸쳐 뻗어 있는, 지구상 가장 큰 흠이다. 깊이가 1천5백m, 흠의 너비는 6…20km. 콜로라도강 주변은 조물주의 거대한 손가락이 지표면을 할퀴고 주물러 놓은 듯했다. 할퀴어 흠이 파진 곳에는 강, 협곡, 호수, 주물러 놓은 곳에선 산맥들이 솟아 있었다. 후버댐을 지나 한동안 날으니 적황색 대지는 흑백으로 바뀌면서 산악지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눈덮인 산맥, 거대한 성벽과 같은 단층지대. 대지는 입체감을 더해 갔다. 미국대륙은 과연 젊은 땅이었다. 지금도 새로운 강, 산, 평야가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대서양상의 야간비행 이륙한 지 1시간30분이 지나자 11시 방향에서 눈을 뒤집어 쓴 고원지대가 아스라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도와 대조하니 덴버 부근의 콜로라도주 산악지대임이 틀림없겠다 싶었다. 나이가 40세는 되어 보이는 스튜어디스에게 물었더니, 조종실로 전화를 걸어 문의한 다음 나의 짐작을 확인해 주었다. 이 스튜어디스는 내가 한국인이란 것을 안 뒤 몇 번 말을 걸더니 사진 한 장을 가져와 보인다. 한국인이 분명한 여자아기였다. 스튜어디스는 윤중하라는 이 고아를 양딸로 입양 받아 키우고 있다고 했다. 팬암기가 내뿜는 비행운은 미국대륙 위에 직선의 그림자를 깔면서 계속 서진했다. 2시간을 날 동안 지나온 땅은 거의가 불모, 산악지대였다. 인간 모듬살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못 쓸 땅, 버려 둔 땅이 이렇게나 넓은데도 풍성할 수 있는 미국이다. 흑백의 산악지대가 끝나니 회청색의 대평원 지대가 나타났다. 바둑판 같은 농토 위에는 도장 같은 게 수천, 수만 개나 찍혀 있었다. 농장의 경계선인 듯 했다. 그 원의 한 구석에는 농장주인이 사는 듯한 집이 자리잡고 있었다. 기내에선 영화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나는 지상의 광막한 스크린에 정신이 뺏겨 있었다. 실지와 지도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것이 신기하기도, 재미있기도 했다. 광활한 대지는 총천연색 화폭이었다. 그 자연의 추상화를 구경하면서 나는 다섯 시간 동안 뉴욕까지 날아갔다. 바다와 같은 오대호를 지나자 어둠이 밀려왔다. 뉴욕 상공에 도달했을 땐 불야성이었다. 맨해턴의 빌딩 숲을 지나 팬암기는 바다로 쑥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케네디 공항에 착륙했다. 이 공항에서 한 시간쯤 기다렸다가 같은 비행기로 이륙한 것이 현지 시간으로 밤 11시였다. 그 뒤 7시간 동안의 비행은 무미건조했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야간 비행이었다. 할 일이라곤 잠자는 것밖에 없었다. 좁은 이코노미 석에선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1927년 찰스 린드버그는 이 항로보다는 훨씬 북쪽에서 34시간만에 대서양을 횡단, 파리에 착륙했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린드버그 역으로 주연한 「저것이 파리의 등불이다」란 영화는 60년대 초에 상영된 적이 있다. 단독 비행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조종실 안에 들어 와 있던 파리를 상대로 독백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다. 안개 속의 취리히 공항 착륙 린드버그의 횡단은 미국의 야심만만한 민간항공업자들을 자극했다. 팬암이 설립된 것은 그 다음해였다. 이 항공사는 플로리다에서 쿠바까지 우편물을 배달하는 최초의 국제노선 운항을 시도했던 것이다. 린드버그는 팬암의 상담역이 됐었다. 내가 탄 팬암의 점보가 7시간만에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 상공에 당도했을 땐 현지시간으로 10월26일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알프스 산맥은 두꺼운 운해(雲海)로 덮여 꼭대기만 섬처럼 나와 있었다. 기장은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잠시 홀딩하겠다고 방송했다. 점보기는 알프스 산맥 위를 세 바퀴 선회했다. 천하(天下)의 경치는 두루 볼 수 있었으나 괜히 불안해졌다. 뛰어 내려도 죽지 않을 것 같은 푹신푹신하게 보이는 저 구름 층을 뚫고 산맥을 향해 활주로를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한편으론 공항이 폐쇄되어 오스트리아의 빈이나 서독의 프랑크푸르트로 옮겨 내려 예상밖의 공짜구경을 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10여분간 대기선회를 한 다음 점보는 내려가기 시작했다. 구름 속으로 돌입했다. 날개 끝도 안 보이는 구름 속의 비행은 진땀 나는 경험이다. 언제 구름 층이 끝나고 취리히 시가지가 내려다보일까 하고 초조해져 있는데, 갑자기 땅이 눈앞에 다가왔다. 시가지가 아니라 바로 활주로였다. 활주로에 씌어진 숫자가 보이는가 하더니 금방 접지했다. 시정이 1백m도 안 될 짙은 안개 속에서 착륙한 것이다. 기장은 기내 방송에서 『굉장히 짙은 안개였습니다. 다른 항공사였다면 어려웠을 겁니다』는 말을 강조, 자신의 착륙술을 은근히 자랑했다. 김포에선 안개가 시정 8백m 이하로 깔리면 착륙이 금지된다. 취리히 공항은 「캐터고리3」으로 분류되는 세계 최고의 최신설비 공항이다. 이 공항에선 아무리 시정이 나빠도 활주로를 폐쇄하지 않고 항공사 형편에 따라 알아서 하도록 한다. 공항의 착륙 유도시설은 완벽하지만 항공기에 이 유도장치와 대응하는 계기가 설치돼야 하고 조종사도 그런 훈련을 받아야 한다. 팬암의 기내 서비스는 시원치 않았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는 세계 민항의 선도자로 군림해온 팬암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됐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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