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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 보면 기교와 기본, 피상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을 구별 할 수 있는 눈을 갖게된다. 정교한 말솜씨 뒤에 있는 그 인간의 본질은 사기꾼인 반면 어눌한 말투 뒤에 있는 것은 속이 깊은 청결한 인격이란 사실을 발견하고 인간에 대한 성급한 판단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수가 많다. 운동선수들에게 기본기를 철저하게 가르치는 것은 든든할 때 기교가 저절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기교에서 기본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기본에서 기교가 생기는 것이다. 수영장에 가 보면 기본을 익힌 사람고 기술을 익힌 사람이 한눈에 구별된다. 나는 어린시절, 동네에서 하는 헤엄 기술만 익힌 경우인데 평형을 할 때 머리를 늘 수면위로 내어놓으니까 빨리 멀리 나갈 리가 없다. 호흡법을 제대로 익힌 소녁가 아주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정말 물고기처럼 입으로 뻥긋뻥긋 숨을 쉬어가면서 날렵하게 하는 것을 보고는 ‘돈 든 헤엄이 다르긴 다르다’하는 감상에 젖기도 했다. 초대면자에는 일단 겉으로 드러난 기교가 먹히는 법이다. 비행기 탑승객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착륙하는 지, 안 하는 지도 모르게 살며시 기체를 활주로 위에 내리는 기장이나 항공사가 인기있을 수밖에 없다. 덜컹 내려앉아 엉덩이가 한번 튀어올라야 착륙 기분이 날 법도 한데, 편안한 것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어머니 품에 안기는 듯한 착륙을 많은 승객들이 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 또한 진리이다. 비행기가 살며시 내려앉게 하려면 희생되야 할 것이 있다. 저地 각도가 작아야 한다. 공기 저항을 줄이려고 날개의 플랩(flap)도 작게 꺾어야 한다. 그래서 기체가 활주로에 닿은 뒤 정지할 때까지의 활주 거리가 길어진다. 활주로가 젖어 있을때는 부드럽게 내리려다가 무리를 하여 활주로를 넘어버리는 수도 있다. 골프공이 저고도로 날아가 작은 각도로 땅에 닿으면, 높게 날악 기의 수직으로 떨어질 때보다도 훨씬 멀리 굴러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공이 땅에 닿은 면적이 넓을수록 짧은 거리를 구르다가 정지한다. 비행기도 툭 떨어지듯 확실하게 활주로에 닿으면 빨리 정지하여 활주로를 넘어가 버리는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기본을 중요시하는 미국의 조종사들은 확실한 착륙법이 가장 안전한 착륙법이란 소신 아래에서 승객에게 영합하지 않고 원칙대로 한다고 한다. 과묵하고 우직한 사람이 믿음직하듯 둔탁하게 착륙시키는 조종사가 안전한 조종사라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착륙의 쾌적성 여부에 승객들이 신경을 쓰는 것은 착륙이란 행위가 ‘떨어지는 것’이며, 날개가 없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추락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종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륙보다는 착륙이 훨씬 수월하다. 착륙 때는 고도와 속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고도와 속도를 유지할 수 있을 때 긴급상황에 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다. 속도를 가지면 고도도 유지할 수 있고, 고도가 있으면 속도의 문제, 예컨대 엔진 고장 같은 사태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네 개의 엔진 가운데 세 개가 고장나도 착륙이 되지만 그런 상태에서 이륙은 어렵다. 이륙이란 것은 비행기의 무게 對 엔진 및 날개가 만들어내는 추진력과 양력의 싸움이다. 추진력과 양력이 기체의 무게보다 세기 때문에 뜨는 것이다. 이륙 후 몇 분간 비행기는 이 두 가지 힘의 경계선을 뚫고 상승하는 데 높이 올라갈수록 안전해진다. 이륙을 위해 활주할 때 엔진이 고장 나면 골치거리다. 활주 속도가 빠를 때는 일단 떴다가 내려야 한다. 조종사들을 훈련시킬 때는 엔진 고장시의 이륙법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조종사들은 착륙 때는 거의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승객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고 어느 조종사는 말했다. 이륙 뒤 보잉 737-400과 같은 여객기는 18도쯤의 각도를 유지하며 분당 1천1백에서 1천2백미터의 비율로 상승한다. 조종사는 조종간을 당겨 기체를 띄운 직후, 보통 2-3초 안에 착륙 바퀴를 접어 넣는다. 기체가 고도 3백 미터쯤에 도달하면 날개의 양력을 높이기 위해서 뽑아놓았던 풀랩을 다시 밀어 넣는다. 이륙 장면을 구경하면 비스듬히 상승하던 기체가 일시적으로 주춤하다가 다시 상승하는데, 이것은 플랩을 집어넣음으로서 양력이 순간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김포에서 제주로 가는 아시아나항공의 보잉 737-400은 이륙 후 6분쯤 되면 고도2만7천피트에 도달한다. 이때가 오산 상공이다. 여객기는 오산의 곤제소로부터 지시를 받아 안양-오산-군산-광주-제주로 이어지는 항로로 진입한다. 즉 오산에서 군산으로 향하는 것이다. 737은 오산에서 광주 상공에 이르기까지 약15분간 최고 고도인 2만7천피트를 유지했다가 광주 상공에서 벌써 하강을 시작한다. 비행기가 어디서부터 하강을 시작하느냐 하는 것을 승객들의 궁금사 가운데 하나다. 비행기의 최고 순항 고도(피트)를 3백으로 나눠 얻은 값에다가 항공마일(nautical mile : 1nm은 1,859미터)을 갖다 붙이면, 착륙 공항에 이 거리만큼 접근했을 때부터 강하를 시작하는 게 상식이다. 737의 최고 고도가 2만7천 피트이므로 3백으로 나누면 90항공 마일, 약 1백6십7킬로미터가 된다. 제주에서 광주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이렇게 일찍부터 하강 자세를 위하는 것은 서서히 공항에 접근하는 것이 급강하보다 연료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737이 본격적으로 착륙 자세에 들어가는 것은 제주 앞20항공 마일부터이다. 이때부터 단계적으로 플랩을 빼내어 꺾고 엔진추진력을 줄임으로서 속도를 낮추어 간다. 속도는 1백9십 노트에서 1백7십, 1백5십,1백4십 노트까지 내려간다. 1백4십 노트에 도달하는 것은 활주로 앞 6-8항공 마일 상공에서이다. 활주로에 닿을 때의 속도도 대개 1백4십 노트다. 54톤짜리 보잉 737-400이 1백37노트의 속도로 활주로에 닿으면 1천5백 미터쯤 달리다가 정지한다. 플랩의 공기저항, 엔진의 역추진, 바퀴와 활주로의 마찰이 스톱을 거는 것이다. 보잉737 최신 자동항법장치(FMS)는 이륙직후부터 착지 동작까지 도맡아 할 수 있다. 조종사는 이 만능의 상자에 지시만 넣으면 된다. 착지할 때는 조종간이 저절로 쑥 밀려 올라오면서 기수가 들리고 뒤 착륙 바퀴가 땅에 닿는 것이다. 어느 조종사는 ‘조종간을 조종사가 당겨야 착륙 맛이 나는데 기계가 다해 주니까 기분이 나쁠 때도 있다’고 했다. 날씨가 나쁠 때는FMS에 착륙까지 맡겨놓는 게 더 안전하다고 한다. 조종사들은 착륙 때만은 수동으로 전환시키는 수가 많다. 기계가 못 미더워서라기보다는 그래야 비행기를 몰고 창공을 가르는 사람의 기분을 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를 좁혀준 점보의 등장 점보의 등장은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인류는 ‘더욱 크게, 더욱 빠르게, 더욱 만이’라는 목표를 집요하게 추구하여 왔다. 그것의 절정에 이른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고도·고속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고도성장을 이룩하게 한 동력은 석유였고 바다에서는 수퍼 탱커가, 하늘에서는 초대형 여객기인 점보가 나타나게 됐다. 시사주간지‘타임’의 1989년 5월22일자 한 광고에는 이런 제목이 걸려 있었다. ‘1989년 5월29일부터 지구는 쪼그러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글귀 옆에는 지금의 큰 지구와 5월59일 이후의 작은 지구 사진을 대비시켜 놓았다 ‘지금 지구 사진’밑에는 ‘싱가포르에서 런던으로 날아가는 데는 중간 기착을 하여 최소한 15시간이 걸린다’라는 설명이 있었다. ‘5월29일 이후의 지구사진’밑에는 ‘상업항공 역사상 처음으로 싱가포르에서 런던까지 중간 기착 없이 13시간만에 날 수 있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빠른 장거리 비행기인 싱가포르에어라인(SIA)의 메가톱(Megatop)747기’라는 설명이 있었다. 메가톱 747은 점보(B-747)의 여러 변형 가운데 최신판이다. 비행 속도가 빨라지는 것만큼 지구는 좁아진다. 요즈음 점보로써 열 시간 만에 가로지르는 태평양을 탐험가 마젤란은 1520년에 1백 일간의 향해로 횡단할 수 있었다. 태평양 횡단 시간이 2백40분의 1로 縮時된 셈인데, 이는 현대의 과학 기술이 ‘2백40분의 1로 축지법’을 썼다는 얘기이다. 20세기 사람들은 16세기 사람들보다도 2백40분의 1로 줄어든 지구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지구촌은 상대적 거리 개념에 비추어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항공기가 발달하면 21세기의 해외여행은 16세기의 ‘저녁 먹은 뒤 이웃 마을 다녀오기’정도가 될 것이다. 외국으로 날아가는 시간보다도 공항까지 가는 택시 탑승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서울-부산의 비행거리보다는 내가 살고있는 길동-김포간의 이동시간이 더 길다. 제트여객기로 6시간이면 건널수 있는 대서양을 미국의 찰스 린드버그는 1927년에 ‘센트루스의 혼’이라는 프로펠러 비행기로써 34시간 만에 횡단했다. 이 모험은 린드버그를 세계적 명사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세계 항공업의 발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독일계 미국인인 린드버그는 구뒤 아들이 유괴돼 피살된 사건으로도 매스컴을 탔지만 2차대전 전에는 나치의 꾐에 넘어가 미국 안에서 나치 독일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다가 전쟁이 터지자 언론에 의하여 거의 매장되다시피 하였다. 린드버그의 모험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것은 팬암(Pan American Airways)의 주안 트리프(Juan Trippe)사장이었다. 그는 예일대학 출신으로 항공업의 초창기에 항공우편물 배달회사를 만들었다가, 나중에 미국을 대표하는 항공사가 되었지만 당시엔 작은 항공사였던 팬암을 인수하였다. 트리프는 린드버그를 기술 상담역으로 고용하고, 1928년에는 최초의 국제선을 개설하였다. 그것은 플로리다와 쿠바 사이를 오가는 정기 우편 배달편이었다. 트리프는 세계 항공업의 개척자로서 그 뒤에도 여러번 선구적인 사업을 열어갔다. 1947년 6월에는 단일 항공사의 노선으로서는 최초의 세계일주 항로를 열었다. 뉴욕-대서양-런던-이스탐불-캘커타-방콕-마닐라-상하이-도쿄-웨이크섬-태평양-미국을 거친 이 일주여행에는 14일이 걸렸다. 지금은 24시간 남짓이면 지구 일주가 가능하다. 2차세계대전 이전에는 여러 항공사의 비행기를 갈아타는 방법으로써 38일 만에 지구 일주를 할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제트여객기는 영국 항공사가 1950년대 초에 취항시킨 코메트(COMET)였다. 이 여객기는 너무 작고 사고가 잇따라 일어나 상업적으로는 실패였다. 사실상의 제트여객기 시대를 연 것을 트리프였다. 1958년에 그는 보인707기를 취항시켰다. 처녀비행은 뉴욕-브뤼셀 항로였다. 제트여객기에 의한 최초의 무기착 대서양 횡단이자 최초의 국제노선이었다. 이 팬암이 개척적인 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보잉사가 군용제트기 개발에서 쌓은 기술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기술에 확신을 가진 트리프는 보잉이 개발하고 있던 707기를 1백50명이 탈 수 있게 크게 만들도록 부추기면서 45대를 주문했던 것이다. 보잉707의등장은 국제여행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때까지 대서양 횡단 여행은 퀸 엘리자베스호나 퀸 메리호와 같은 호화여객선에 거의 의존하고 있었다. 빠르고 큰 제트 여객기들은 호화 여객선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었다. 1백톤 남짓한 보잉707 한 대의 시간당 운송 인원은 8만5천 톤짜리 퀸 엘리자베스호와 맞먹었다. 수백 대의 퀸 엘리자베스호가 대서양 상공을 날아다니기 시작한 것이었다. 707이 등장한 이후 대서양 횡단 항공여객 인원은 5년 만에 한번씩 2배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1962년에 선박여객 인원은 80만 명이었는데, 항공여객 인원은 2백만 명에 이르렀다. 707의 대성공으로 자신을 가진 팬암은 1965년부터 또다시 대 도박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 해에 팬암과 보잉사는 보잉 747기의 개발 계획에 합의하였다. 707의 두 배나 되는 엄청난 여객기를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1966년의 세계 항공 수송인원은 약 2억으로서 1960년의 두 배였다. 이렇게 팽창하는 여객들을 점보기가 떠맡앗을 때 체산성이 충분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당초 설계할 때는 점보의 수송인원을 3백50명으로 잡았다. 1970년 1월에 취항한 점보는 그뒤 여러번 개조돼 5백 명 이상까지 태울 수 있는 확대판이 나오고 있다. 호주항공사 퀀다스(QANTAS)의 한 점보기는 허리케인 지역의 주민들을 긴급 대피시키는 작전에서 6백74명을 태운 적도 있었다. 점보의 등장은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5천 년이 넘는 인간의 기술 문명은 ‘더욱 크게, 더욱 빠르게, 더욱 많이’라는 목표로 집요하게 추구하여왔다. 그것이 절정에 이른 것은 1960년대였다. 인류역사상 유례가없는 고도·고속 경제성장의 연대였다. 그것은 값싼 석유의 뒷받침으로써 가능했다. ‘20세기의 문명사는 석유라는 잉크로 쓰여졌다’고 하는 데 그 석유 문명의 상징인 초대형 유조선(Super Tanker)의 대형화 속도가 1960년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해방동이인 나는 부산의 고지대에 살면서 눈 아래로 펼쳐진 항구의 배 LRNRUD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큰 배가 들어오면 동네 아이들끼리 모여앉아 톤수를 알아맞히는 데 재미를 붙이기도 하였다. 2만 톤급 미군 수송선이 최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가 배운 국민학교 사회 교과서에는 세계의 10대 호화여객선이 소개돼 시험문제로 나오기도 하였다. 어린 마음에도 저런 여객선에 한번 타 보았으면 하는 욕망이 피어올랐고, 그런 배를 만들 수 있는 영국과 같은 해양국을 부러워하게 되었으며, 그때는 선장이 나의 꿈이었다. 1만 톤 남짓한 남해호가 한국 최대의 선박이던 1963년 어느 날 나는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십수만 톤급 유조선이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토막 기사였다. 8만5천 톤급 퀸 에리자베스호가 세계에서 가장 큰 선박으로 알고있었던 나는 혹시‘0’이 잘못 붙은 게 아니가 하는 의심을 가질 정도였다. 그뒤 유조선은 20만 톤, 30만 톤, 40만 톤으로 대형화되더니 1970년대 초에는 드디어 50만 톤을 넘게 되었다. 유조선의 대형화는 세계 해상 물동량의 반을 차지하는 원유 수송량의 급증을 뜻하였다. 고도성장을 거듭하는 세계 경제를 돌리는 동력은 기름이었던 것이다. 바다와 하늘에서 수퍼탱커와 여객기가 대형화로 치닫다가 그것이 절정에 이른 것이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걸친 시기였다. 일본에서는 이때 ‘오끼이 모노와 이이 모도네슈(큰 것은 좋은 것입니다)’라는 다소 외설적인 선전 문구가 등장하여 세태를 반영하였다. 이런 시대의 상징인 점보의 등장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갔다. 점보 문화(Jumbo Culture)라는 말이 있다. 점보의 등장은 항공여행객들을 폭증시켰고, 공항시설은 이에 맞추어 확대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자니 공항부지를 도심부에선 구할 수 없어 공항이 멀리 교외로 나가게 되었다. 국제 여행객들이 늘어나면서 호텔도 점점 대형화돼 갔다. 점보를 ‘날아다니는 호텔(Flying Hotel)’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점보는 항고여행의 풍속도도 바꾸어놓았다. 장거리 비행이 지루하지 않도록 영화상영, 잦은 음식대접, 기내 면세품 판매 등등의 프로그램이 도입되거나 확대되었다. 이런 기내 풍습과 항법의 자동화는 항공여행의 긴장감과 모험감도 많이 줄였다. 점보의 등장, 그것은 새로운 비행 문화의 개막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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