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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존자암은 국내불교 최초의 전래지일까

鶴山 徐 仁 2005. 7. 31. 13:28


 

복원된 대웅전

 

존자암은 제주도 불교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한라산 해발 1200m 지점의 속칭 ‘볼래오름’(영실 서쪽) 중턱에 자리잡은 존자암지는 제주도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내 불교계에서는 이곳을 국내 최초의 불교 전래지로 믿고 있다. 그리고 존자란 성자(聖者) 혹은 현자(賢者)란 뜻으로 석가세존의 직접 제자에게만 부쳐지는 칭호라는 데서 존자암은 그같은 존자가 머물렀던 암자라는 뜻이다.

 

 


 

 

존자암의 역사적 기록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고려대장경 법주기(法住記)에 의하면 석가세존의 제자 16존자가 불멸 후 각각 나누어 나가 살았는데 그 중「여섯 번째 존자 발타라(跋?羅)가 그 권속 아라한(阿羅漢)과 더불어 탐몰라주(?沒羅州)에 많이 나누어 살았다」고 하였다. 탐몰라주가 과연 어디인가.  이에 대하여 이능화(李能和: 1865∼1945)의 《조선불교통사》에는 「발타라(跋?羅)는 범어(梵語)이고 중국말로는 호현(好賢)이란 뜻인데 이 존자가 9백 아라한과 더불어 탐몰라주에 많이 나누어 살았다고 하였다. 서로 전하기를 탐몰라주는 즉 탐라를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제주도 라고 말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제주 존자암은 한라산 서령(西嶺)에 있는데 그 동(洞)에 있는 암석이 승(僧)이 수행하는 모양과 같아서 속전에 수행동(修行洞)이라 하였다. 존자암이란 곧 발타라존자의 이름인 까닭이라 함은 그럴듯하다. 이른바 5백장군석은 또한 5백라한석이 와전된 이름이라 함도 그렇듯 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정(金淨)의 충암록(沖庵錄)에 의하면 "「존자암이 된 것은 삼성(三姓)이 처음 일어났을 때 만들어져서 삼읍이 정립(鼎立)된 후까지 오래 전해졌다. 암자의 면세(面勢)는 상지서(相地書: 풍수지리서)에 들어맞는 것이 많다.」고 하였다. 또 존자암은 영실 불래악(佛來岳) 중턱에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오랜 옛날에 세워진 암자임을 알수 있다. 또 제주에 예로부터 절 5백이라는 구전(口傳)도 이에 연유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하고 있다.

 

1937년 조선일보사의 전국 산악순례사업으로 한라산을 등반한 이은상(李殷相:1903∼1982, 문인(文人)은 "존자암이란 이름은 법주기(法住記)에서 그 유래를 가져온 것일 듯하다. 불가에서 이르는바 16라한은 각각 그 사는 곳이 따로 있었는데 그 중 여섯번째 발타라존자는  5백나한을 데리고 탐몰라주에 상주(常住)한다는 법주기의 기록에 의한 것인데 그 탐몰라주라는 것은 제주의 이칭(異稱) 탐라와 합치되는 점에서 이 동부(洞府)의 기암을 석라한이라 부르고 여기 절을 세워 존자암이라 하였던 모양이다" 하였다.

 

1601년 홍문관(弘文館)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남사(南사錄)에 충암(沖庵) 김정(金淨;1521년 제주도에서 사약으로 타계함)의 존자암기(尊者庵記)를 인용하여 소개한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존자암은 삼성(三姓)이 처음 일어난 때 만들어져서 삼읍(三邑)이 정립된 후까지 전해져 내려왔다고 하고, 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남주작(南朱雀)·북현무(北玄武)의 지세(地勢)를 갖춘 곳에 있다. 또한 첫 여름 달에 삼읍 수령중에 한사람을 보내 이 암자에서 제사를 지내니 이를 국성제(國聖祭)라 하였다. 암자의 집은 9간인데 지붕과 벽이 모두 판자로 기와와 흙을 대신하였다.」

 

  1651년 어사(御使) 이경억(李鏡憶)의 기록에는 " 존자암에 와보니 폐허가 되고 천년 묵은 외로운 탑만이 서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한창 공사중인 요사체

 

존자암의 지어진 연대를 추정하게 하는 기록은 어디에 나올까?


중국 당나라 현장(玄藏)이 쓴 대장경(大藏經) 법주기(法住記)에 석가의 제자중에 발타라존자(跋陀羅尊者)가 있어 수백의 권속(卷屬)을 이끌고 탐몰라주(耽沒羅州)로 갔다는 내용이 있다. 탐몰라주가 지금의 제주라고 믿고, 그 존자가 온 것이 존자암이라 하여 존자암의 창건연대를 기원전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석가세존이 열반한 연대가 BC486년(일본은 BC386년)이니 발타라존자의 생존 연대는 그 후에 살았을 것이므로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2370여년 내지 2470년 전 일이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기록은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년) 전진(前秦)에서, 백제는 침류왕 1년(384년)에 진(晋)에서 들어왔다고 국사에 적혀있다. 이런 것으로 추정한다면 탐라국은 이보다도 850여년 앞서 이미 불교국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한국불교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이 보일 수도 있다.

 

또 조선 선조 34년인 1601년 제주에 안무어사로 파견됐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에는 ‘존자암이 삼성(고.양.부)이 처음 일어날 때 만들어졌다’고 기록돼 있어 이 사찰의 연원이 탐라시대가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게 한다.

 

 


 

존자암을 둘러보고 있는 학생들

 

 

존자암의 복원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350여 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존자암(尊者庵)을 본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기쁨과 경건함을 갖게 했다. 존자암 만큼 깊은 역사적 의미를 가진 사찰이 전국에 몇 개나 될까?


조선 선조 34년인 1601년 제주에 안무어사로 파견됐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에는 존자암은 거의 폐사돼 초가 형태로 명맥만 유지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은 존자암은 적어도 조선 15∼6세기 전반에는 제대로 된 가람이 었다가 17세기에 와서는 폐허가 되었음을 알게 한다.

 

서귀포시는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옛 문헌에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존자암지(址)에 대한 정비사업을  1992년부터 총 사업비 22억여 원(국비 7억7000여만원 포함)을 들여 추진했다. 이에 따라  존자암지 대웅전과 국성재각(國成齋閣) 등 주요 건물에 대한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등 연면적 95.04㎡에 팔작지붕 형태로 건립됐고, 국가의 안녕을 빌었던 국성재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등 연면적 25.83㎡의 맞배지붕 형태로 복원됐다.


 


 

유일하게 남아 존자암의 존재를 알린 탑

 



존자암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피어 있는 산수국

> Memories
 
가져온 곳: [디카로 보는 세상]  글쓴이: 그대그리고나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