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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 ‘동북공정’을 넘기 위하여

鶴山 徐 仁 2005. 7. 31. 11:54
‘동북공정’을 넘기 위하여


 서울에서 열렸던 ‘평양에서 온 고구려 무덤벽화와 유물전’과 관련하여 북한의 고구려 유적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며칠 머무는 동안 그곳 사람들이 고구려를 무척 아낄 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것을 거듭하여 볼 수 있었다. 선주후랭이라는 옥류관 랭면을 먹으면서 그네들이 묻길래 남녘 사람들 또한 그러하며 공부하는 이도 적지 않다고 힘주어 말하자 역시 같은 민족이라며 다들 좋아라 했다.
 

 서울에 돌아온 뒤 전시회와 관련한 학술위원회 구성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확인하게 된 것이지만 우리 사정은 생각 밖으로 형편이 좋치 않았다. 막상 사람을 찾다 보니, 고구려사 전공자는 50대 이상 3명, 40대는 유물과 고분을 전공한 고고학 2명을 포함하여 12명, 40대 이하는 박사가 전무한 실정이었다. 뜨끔함을 넘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듣기에 고구려사는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오랜 동안 기피 학문이었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이를 조장한 것은 정작 우리 정부와 분단사회였다. 단적으로 고구려사에 대해 방대한 실적을 가지고 있는 북한의 자료를 접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여기에 적극적 관심을 가지면 빨갱이로 몰리기까지 했던 터였다. 적어도 고구려사 연구에는 엄연히 휴전선이 가로놓여 있었던 셈이다.

 

 중국 정부가 나서서 고구려사와 우리 겨레붙이의 기원까지를 왜곡하고 있는 반문명적 역사늑탈공작인 ‘동북공정’을 접하면서 가장 먼저 든 우려는 연구와 연구자 부족이었다. 정부나 관련자들이 언론 등을 통해 중요한 대응방안의 기초로 내놓고 있는 게 학술연구활동인데 과연 장차 전개될 중국과의 ‘학술연구전투’를 온전히 수행할 수 있겠는가 하는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우리 내부의 충분한 역량과 준비 없이 소수민족사를 꾸준히 ‘중화화’해온 변강사지연구원을 비롯한 지나의 공세를 막아내는 일은 결코 감정적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반대로 ‘조용한 외교’로 수습해야 하는데 격앙된 분위기 탓에 민심수습용 단기적 땜질처방으로 넘어가고자 한다면 이는 역사를 멸문시키는 일이 되리란 걸 정부는 명심해야 한다. 평양에서 고구려 유물이 내려와 있었던 8개월 동안 관심을 보이고 찾아온 정치인이 몇이나 되었던가 하는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쑥스러움이 없지 않지만 이번 중국의 역사늑탈을 민족사를 가다듬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면 우리 사회는 상심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다. 당장 필요한 외교적 조처나 북한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연대와 이해는 물론, 국제학술대회 등을 통해 고구려 문명의 우수성을 한국학자의 연구로 발표케 하고, 세계적으로 저명한 출판사에서 한국사 관련 연구서가 다양하게 출판되도록 하는 일, 외국의 역사왜곡 등에 상시 대응할 수 있는 외교, 통일, 문화, 교육 부문을 아우르는 기구설립 등 할 일은 허다하다.

 

   내부적으로는 역사교육 강화를 비롯한 고구려 유물유적에 대한 연구와 관리도 빼놓을 수 없다. 남한에서 가장 중요한 고구려 유적인 아차산성의 경우, 일대를 관통하는 도로를 뚫겠다고 하고 있는 실정이지 않은가. 또 고대사에 대한 대중들의 묵은 갈증에서 비롯된 관심을 더는 비역사적 국수적 ‘재야사학’적 태도라고 내버려 두어서만은 곤란하다. 이는 식민지 지배와 지나의 견강부회하는 간섭에 따른 저자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욕구에서 말미암고 있는 터이다. 인문학 전반이 궤멸적 상황에 놓인 지금, 이 일련의 작업은 역사연구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 없이는 애초부터 가능치 않은 일이다.

 

   우리와 생활과 영토를 이웃하고 있다보니 중국과 공동으로 논의할 수 있는 역사작업이 고구려만은 아닐 터이다. 공동연구나 학술대회의 폭을 중국 정부가 정통성으로 내세우고 있는 항일투쟁사로 넓히는 일도 그 방안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겠다. 이는 분단으로 인해 소홀히 취급 받아온 점이 없지 않은 우리 근현대사를 온전히하는 일이기도 하다. 공통분모를 찾는 일이 동시에 차별성을 확인하는 과정임은 물론이다.

(한겨례신문 2002.8.17)


 
가져온 곳: [북경이야기(北京故事)]  글쓴이: 지우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