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자료 중국어 원문은 http://www.chinaborderland.com/cn/company/Tmxxb101/card101.asp?tmid=130&lmid=53&siteid=1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기자(箕子)와 기자조선(箕子朝鮮) 연구(No. 6)
과제 이름 : 기자와 기자조선 연구
과제 담당자 : 장비보(張碧波)
담당 기관 : 헤이룽장성 사회과학원
과제의 설계와 논증(개요)
1. 이 과제에 대한 국내 연구 상황
최근 국내(중국) 학술계에서 기자조선(箕子朝鮮)에 대한 관심은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며, 이에 관한 논쟁도 등장하고 있다. 기자의 출신, 기자가 조선으로 간 경로, 기자조선의 지위, 랴오닝성 서부에서 출토된 ‘은주기기후(殷周己其侯)’ 청동기의 해석 문제, 고진국(古辰國), 기자조선과 연(燕)나라·진(秦)나라의 관계, 기자조선을 멸망시킨 세력 문제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더 나아가 조선(朝鮮)이란 단어의 유래, 조선이란 단어에 담긴 문화적 내용, 주(周)나라 초기 삼감지란(三監之亂) 중의 기자, 기자가 건립한 동방 군자국(君子國), 기자조선과 중원 각국의 경제 문화 교류 등 문제에 대한 연구까지 등장하고 있다.
2. 외국의 연구 상황
일본 학술계와 조선반도(한반도)의 학술계는 기자조선에 대해 허무적·부정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이들은 기자조선이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그의 역사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정치적인 의도에서 출발해 기자와 기자조선이 한(漢)나라 사람들이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역사가 존재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들은 조선사(한국사)를 서술하면서 기자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기자조선에 관한 내용 대신 고조선(古朝鮮)을 써 넣었다. 또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한 단락의 고조선 신화전설에 근거해 이를 역사화하여 단군조선(檀君朝鮮)이란 걸 날조해냈으며, 이로 인해 고조선사 연구에 혼란을 빚었다.
3. 본 과제 연구의 주요문제(연구의 중점)
이는 기자와 기자조선사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이며, 연구에 중점을 둘 부분은 아래와 같다.
(1) 조선반도(한반도)의 고대 문명 : 중화(中華)의 십일신화(十日神話)가 한반도에서 산생했다는 명제를 제기하고, 탕곡부상(湯谷扶桑)의 십일신화, 전욱(顓頊)의 고양(高陽)문화와 은상(殷商)문화가 모두 반도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탕곡(湯谷), 명이(明夷), 조선(朝鮮)은 반도 이름의 세 가지 발전 단계인데, 모두 십일신화에서 유래했다.
(2) 고진국(古辰國) : 삼한(三韓)이 고진국(古辰國)임을 지적한다. 고진국은 은상(殷商)의 해외 속지이다. 이는 기자가 “조선으로 간” 원인이다. (3) 기자(箕子)의 사적(事跡)을 탐색 : 은상(殷商)의 갑골과 진(秦)나라 이전의 고전 서적에서 기자의 사적에 관련된 내용을 조사하고 연구한다. 기자는 역사적인 존재이다.
(4) 은상이 멸망하기 전후의 기자 : 상(商)나라 주(紂)왕의 폭정과 상나라의 멸망, 기자가 석방된 뒤 “명이(明夷)로 간”, “조선으로 간” 역사적 배경과 그 당시 기자의 심경에 대해 연구한다. <주역(周易)> 명이(明夷)괘는 기자가 조선에 간 고통스러운 과정을 해석했다. 기자가 주(週)나라 무왕(武王)에게 조회한 일과 <홍범(洪範)>의 문화적인 내용을 해설한 일, 주나라 초기 은상 여얼(余孽)의 반란, 기자조선이 동방의 저명한 군자국으로 세워진 것 등이 이 대목의 주요 내용이다.
(5) 기자조선 말기의 역사적 사실 : 기자조선과 연(燕)나라의 관계, 연나라의 장성(長城)이 반도에까지 뻗은 사실, 조선 강토의 쇠약, 기자조선과 진(秦)나라의 관계,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이 대동강 남쪽 연안의 갈석산(碣石山)까지 미친 것, 위만(衛滿) 집단이 음모하여 정변을 일으켜 기자조선이 멸망한 일 등.
(6) 위씨조선에 관한 문제 : 위씨정권의 성격과 귀속 문제, 위씨조선의 건국 과정과 한(漢)나라의 ‘외신(外臣)’으로부터 한나라를 반역하고 멸망된 일, 한4군의 건립 등 문제와 관련한 사실.
(7) 기자조선 연구에서 벌어진 논쟁에 대하여
4. 본 과제 연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1) 처음으로 조선반도(한반도)의 고대 문명과 그 문화의 뿌리를 제시하였다. 조선반도(한반도)의 지명의 유래--탕곡(湯谷)-명이(明夷)-조선--와 그 문화적 내용에 대해 설명을 하였고 조선이라는 지명이 화하 한어문 문화라는 것을 지적한다.
(2) 고진국(古辰國)에 대한 연구는 주로 은(殷)나라가 멸망된 뒤 기자가 조선에 간 일에 대해 연구한다.
(3) 기자라는 사람에 대해 : 그가 은나라 말년 사상문화의 대표 인물이고 중화문화사상 최초의 철학 저작을 펴낸 철학가라는 것을 지적한다.
(4) 기자가 한 일에 대해 : 은나라가 멸망되기 전후의 행위--중국 고대 지식분자의 성격, 절개 및 조선에 가 동방군자국을 세워 자신의 정치 이상인 도(道)를 실현하는 것.
(5) 기자조선의 역사적 지위에 대한 논증--중국 동북사의 시작.
5. 본 과제 연구의 사고방식과 연구 방법
기자와 기자조선을 중화역사(상나라와 주나라 역사를 포함), 동북 역사의 큰 배경에 놓고 연구한다. 기자조선을 동북 역사의 시작 시기와 역사 범주 위에 놓고 문헌학(고문자학, 역사지리학, 고종교학 및 문화인류학 등)과 고고학을 결합하여 연구하고, 역사자료 분석학과 역사와 논리를 통일시키는 방법으로 사고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의견과의 논쟁 과정에서 자신의 연구 분석 능력을 제고한다.
6. 본 과제의 학술적 가치, 이론적 가치, 현실적 가치
처음으로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기자조선의 역사를 그렸다. 기자와 기자조선은 중국 상나라와 주나라 역사, 중국 동북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기자는 철학가, 정치가, 은상 사상문화의 대표 및 중국 고대 지식분자의 대표로 중국 역사와 중국 사상문화사에 나타난다. 그의 학문, 인품, 영향은 장기간 마땅한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이는 마땅히 발생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다.
기자는 중국의 첫 철학가로 상나라와 주나라의 정권이 교체하는 역사 시기에 자신의 도(道)가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에 갔다”. 그는 동방군자국을 건립했는데 그가 남긴 작풍과 면모(流風遺韻)는 지금까지 남아있다.
국내외 학술계는 기자라는 사람과 기자조선의 사실에 대해 많은 논쟁을 벌여왔다. 여기엔 자료의 결핍 문제도 있고, 관점과 방법론상의 이견도 있다. 이 가운데 후자의 문제가 더 두드러진다. 여기서 고조선 역사에 대한 연구가 학술계의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기자조선은 은나라의 후대가 조선반도에서 건립한 지방 정권으로 주(周)나라를 섬기다 나중엔 진(秦)나라를 섬겨 주나라와 진나라의 해외 속국이 되었다. 기자조선은 위씨조선에 의해 대체되었으며, 위씨조선은 한(漢)나라의 ‘외신(外臣)’이자 속국이다. 한무제는 조선을 토벌하여 이를 네 개의 군으로 찢어놓아 한나라의 변경 관할국으로 삼았다. 기자조선이 있어야 위씨조선이 있고 따라서 한나라의 4군이 있을 수 있으며 나아가 고구려사, 발해사가 있을 수 있다. 이는 동북 고대사, 동북 민족과 변경 역사의 일련의 고리를 구성한다. 기자조선은 중국 동북사의 시작이다. 이것이 바로 이 과제의 가치가 있는 점이다. 본 과제의 입항은 중대한 학술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가 있다. 물론 학술상의 공백을 메운다는 의미도 있다.
7. 본 과제의 구조 설계 (주요 장절)
머리말
(1) 조선반도의 고대 문명
(2) 고진국(古辰國)
(3) 한(韓)은 고진국이다. 부록: 단군조선에 대한 고찰과 분석
(4) 기자의 사적에 대한 조사
(5) 은나라가 멸망하기 전의 기자
(6) 기자조선 말기의 역사 사실
(7) 위씨조선에 대한 문화 고찰과 논증
(8) 기자조선의 연구에 대한 논쟁
결말
최종 이름: 기자와 기자조선 연구
형식: 전문적인 저작
글자수: 20만자
(인용처: 한겨례신문 2004.8.10)
'歷史. 文化參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경기도내 고구려 관련 유적 60곳 (0) | 2005.07.31 |
---|---|
[스크랩] 한·중·일 공동집필 역사교재 출간 임박 (0) | 2005.07.31 |
[스크랩] 국사가 '필수'가 될 수 없는 이유 (0) | 2005.07.31 |
[스크랩] 중국과의 (0) | 2005.07.31 |
[스크랩] 고구려 기초지식 - 장군총 (0) | 2005.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