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 왜곡은 방어적 성격과 공격적 성격을 함께 갖는다. 남북통일 이후 중국 동북지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국경 분쟁 등 영토 문제를 미리 차단하려는 것은 방어적 성격이다. 통일 한국의 북쪽과 중국내 조선족의 거주지를 합치면 고구려의 영토와 자연스럽게 일치하는 탓에, 한민족과 고구려의 관계를 뿌리에서부터 끊어버리려는 것이다. 다민족국가인 중국의 우려는 이해할 만하지만 영토 문제는 근거 없는 기우에 불과하다. 통일 한국이 중국을 적대시할 이유도 없다. 그 수단이 역사 왜곡이라는 것도 용납될 수 없다.
공격적인 성격은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사회주의 이념을 대체할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해나가고 있는 것과 연관된다. 이 과정에서 공격적인 민족주의가 국가 통합의 새 이념으로 부각되고 있다. 중화주의의 부활이다. 고구려사 왜곡은 그 연장선에 있다.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강력하고 단호하고 대응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단계적인 외교적 대응은 물론이고 정부와 민간이 함께 참여하는 대책기구 구성, 남북 공동 대처 모색, 국제사회에 대한 홍보 강화, 학술연구 지원 등이 동시에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미흡하다.
일본과 중국이 번갈아가며 도발하고 있는 지금의 ‘역사전쟁’은 동북아의 유례없는 국운상승기에 이뤄지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군사 대국을 꾀한다. 중국은 수십년 안에 미국에 맞먹는 강국이 될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온다. 통일 한국 또한 세계 10위권에 드는 국력을 갖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국운 상승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알력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일본은 떠오르는 중국을 달갑지 않게 바라본다. 뿌리 깊은 중국위협론이다. 미국의 힘을 빌어 중국과 맞서야 한다는 주장이 우익들을 중심으로 무성하다. 중국은 미-일 동맹이 자신의 앞길을 막을까봐 노심초사한다. 두 나라가 대만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불안하다. 이런 구도에서 자신을 한가운데에 두는 역사를 앞세우는 것은 유력한 무기가 된다. 남북한은 양쪽에서 치이는 이중의 피해자다. 역사 왜곡은 이렇게 동북아의 전근대적인 국제질서와 얽혀 있다. 새 질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몰려 있는 유럽에서는 근대 이후 수백년간 전쟁이 끊이지 없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시작된 곳도 유럽이다. 그런데 이차대전 이후 전쟁이 사라졌다. 국가간의 심각한 갈등조차 거의 없었다. 큰 몫을 한 것은 유럽통합이라는 전략적 선택이다.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창설을 시작으로 하는 유럽통합의 목적은 평화와 번영이다. 서로를 어느 정도 묶어둠으로써 갈등의 소지를 줄이고 공동의 이익을 키워나가자는 것이다. 동북아는 여기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자. 우선 동북아 전체의 역사를 공유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을 함께 모색할 필요가 있다. 민간 중심으로 시작해 확대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시민단체 사이의 교류도 활성화해야 한다.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의 채택을 막은 것은 정부가 아니라 시민단체였다. 동북아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공동 프로젝트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다. 상징성이 있고 서로에게 크게 이익이 된다면 안성맞춤이다. 정부간 접촉도 상설화해야 한다. 정상들이 만난다면 더 좋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아펙) 정상회의도 있고 동아시아정상회의도 있는데 동북아정상회의가 없다는 건 이상하다. 이런 노력을 통해 최소한 공동체 수준의 지역기구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기반을 닦아야 한다.
역사전쟁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그냥 이기는 것만으로는 앞날을 장담하지 못한다. 국운상승을 이어가려면 시야를 넓힌 새 전략이 요구된다.
(한겨례신문 200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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