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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광개토대왕과 호태왕비석

鶴山 徐 仁 2005. 7. 31. 11:47

광개토왕 (廣開土王 374∼412)

 

  고구려 제19대왕(391∼412). 재위기간 동안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영락대왕이라고 불렸다. 본명은 담덕(談德). 고국양왕의 아들로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고 391년 즉위했다.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확장시켰는데, 예성강(禮成江)을 경계로 백제에 대해서는 즉위 초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392년(광개토왕 2) 석현성(石峴城;開豊郡 北面 靑石洞)을 비롯한 10개 성을 빼앗고 관미성(關彌城;江華 喬桐島)을 함락시켰다.

 

  394년(광개토왕 4)에는 수곡성(水谷城;지금의 新溪), 395년에는 패수(浿水;지금의 예성강)에서 침공해 온 백제군을 격파하고 백제와의 접경지대에 7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396년(광개토왕 6)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공략하였다. 399년(광개토왕 9) 고구려와 우호관계에 있는 신라를 백제가 왜(倭)를 앞세워 공격하자 모두 궤멸시켰고, 407년(광개토왕 17)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6성을 치고 백제를 응징하였다.

 

  이러한 남방으로의 세력확장과 함께 서방으로의 진출도 꾀하였는데, 당시 고구려 서쪽에 있던 모용씨(慕容氏)의 후연국(後燕國)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나, 400년(광개토왕 10)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을 침공해 오자 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감행하였다. 이 때 요동성(遼東城;지금의 遼陽)을 비롯한 요하(遼河) 동쪽 지역을 차지하였다.

 

  이 밖에도 392년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여 남녀 500명을 사로잡고 거란에게 잡혔던 고구려인 1만 명을 데리고 들아왔으며, 410년(광개토왕 20)에는 동부여(東夫餘)를 굴복시킴으로써 북쪽과 동쪽으로 세력권을 확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토를 크게 팽창시켜, 서로는 요하(遼河), 북으로는 개원(開原)∼영안(寧安), 동으로는 훈춘[琿春],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

 

   또 내정의 정비에도 힘써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 중앙관직을 신설했으며, 역대 왕릉 보호를 위해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재정비하였고, 393년(광개토왕 3)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412년 39세로 세상을 떠난 뒤 414년(장수왕 2) 아들 장수왕이 생전의 훈적을 기록하기 위해 세운 능비(陵碑)가 현재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에 남아 있다.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광개토대왕, 호태왕비

 

  사진설명: 중국 길림성 지안현에 위치한 광개토대왕비, 원명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가져온 곳: [북경이야기(北京故事)]  글쓴이: 지우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