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염주도 되고 목걸이도 된다는 말은 과연 값있는 교훈이다. 구슬이 아무리 많은들 꿰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알알이 굴러다니다 마침내는 다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인류의 10만 년 체험을 서 말 구슬에 비교할 수 있다. 방대한 체험이고, 게다가 잡다한 사실들이 뒤섞여 있어서 언뜻 들여다만 보고는 뭐가 뭔지 알 도리가 없다. 말 속에 손을 넣고 한줌 구슬을 꺼내어 책상 위에 벌려놓은 뒤 이리저리 굴려보아도 알알이 굴러다니는 한개한개의 구슬만 가지고는 도저히 서 말 구슬의 의미를 찾아낼 길이 없다.
이념이란, 서 말 구슬을 꿰는 끈이며 줄이다. 이 끈과 줄을 마련하지 못하면 인류의 체험을 정리할 수도 없는 일이고, 역사의 의미를 따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는 끈을 들고 구슬을 골라 끼우면 가는 목걸이가 될 것이고, 굵은 끈을 가지고 구슬을 고르면 굵은 염주가 될 것이다. 끈이 길면 목걸이가 길어지고, 끈이 짧으면 염주가 짧아진다. 따라서 구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서 말 구슬에 손을 넣고 휘젓는 그 사람이 가진 끈이 어떤 것이냐에 달렸다고 할 수도 있겠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자원도 아니고 기후도 아니고 지세도 아니고 인종도 아니고 지도자도 아니고 다만 이념일 뿐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념이 무엇인가? 그 바탕은 생각이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62. 프랑스의 사상가)이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란 갈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자연계에서는 가장 약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L'homen n'est 벼'un roseau, le plus faible de la nature, mais c'est un roseau pensant.)' '생각하는 갈대' 그것이 곧 인간이라고 파스칼이 갈파하였다면, 그 생각을 바탕으로 문화가 형성되고 이념이 탄생하였다고 풀이된다.
생각처럼 무서운 건 없다. 모두들 나타난 현상만 보고 놀라지만 사실은 현상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생각이 더 무섭다. '혁명'이라고 하면 죄다 놀라 자빠지지만, 그 혁명도 처음에는 어느 한 사람의 가슴 속의 생각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념 중에는 그릇된 이념도 없지는 않다. 어떤 특정한 인종의 우수성을 내세우면서 그 인종이 문화 창조에 선도적 역할을 했으며 앞으로 그들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등의 인종설(racial theory)은 히틀러 같은 악의 천재에게 있어서는 '백인의 부담(white man's burden)'이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따위를 지나, 아리안족 중에서도 게르만 민족만이 전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엉뚱한 과대망상 증세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런 그릇된 이념도 한때 많은 사람들을 열광케 할 수도 있고, 극소수의 사람들을 계속 감동시킬 수가 있는 것 같다. 오늘도 히틀러의 나치즘에 감격하여 그 운동을 계속하려는 시대착오(anachronism)의 답답이들이 없지 않다.
이념적 발언이나 제스처가 좋은 의미의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가령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기초하면서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62. 미국 제3대 대통령)은 '모든 사람은 다 동등하게 지음을 받았다(All men are created equal)' 라는 유명한 말을 처음 써보았다.
제퍼슨 자신도 아마 흑인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는 이 말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건 무엇을 근거로 한 말이냐? 사람이란 동등하게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결코 동등할 수가 없다!' 이런 비판의 소리도 빗발치듯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 한 마디가, 그 생각 하나가 인간의 정신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 그 이념의 영향을 받은 것은 비단 개인만이 아니다. 많은 단체, 기구, 제도, 집단, 사회가 그 이념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고, 적어도 여자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이, 흑인을 포함하여 모든 인종이, '법' 앞에서만이라도 동등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비어드(Charles A. Beard, 1874~1948. 미국의 역사학자)는 여러 해 동안 콜롬비아 대학에서 역사를 강의했는데, 그는 하나의 이념에 에너지가 잠재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프랑스의 철학자 퓌예(Alfred Fouille, 1838~1912)의 유명한 말을 인용했다. 이념이란 '우리들의 감정과 충동이 취하는 의식의 형태가 : 모든 이념은 지적 행동을 포괄하는 것뿐 아니라, 감성과 의지의 일정한 방향을 설정한다. 따라서 한 개인에게 있어서나 마찬가지로 한 사회에 있어서도 모든 이념은 더욱더 그 개개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하나의 힘이 되는 것이다.'
이념은 단지 지적인 개념만이 아니라고 한다. 이념은 그 자체 내에 개인과 국가를 능히 움직이는 원동력을 지녔으며, 그들로 하여금 그 이념 속에 잠재한 목적이나 제도를 실현하도록 몰고 가는 큰 힘도 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위대한 이념이라는 것이 반드시 뛰어나게 유능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가장 우수한 두뇌는 생각을 하고, 2류의 머리를 가진 사람이 사업이니 정치니 하는 현실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고 하니까, 우리가 받아들여서 간직하고 활용하는 이념의 대부분은 최고의 머리를 가진 사람들의 생각에서 생긴 것이겠지만, 밑도 끝도 없이 '보통 사람들' 틈에서 싹튼 생각이, 힘이 없고 연약한 무리들만에 의해 한동안 소중히 여겨지다가 마침내 무관심과 탄압의 벽을 뚫고 한 시대의 문명세계 전체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되는 경우도 흔히 있다.
헌법에 바탕한 정치를 제대로 하거나 민주적인 정부를 잘 운영하려면, 이념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만 민주사회에서는 사회적 마찰이나 충돌을 적당하게 조절하여 파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만질 수가 있는 법이다. 한 정보가 구성원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무시하고 소수 집권층의 독단으로만 좌지우지되면 결국은 폭력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한 시대나 한 사회의 문명은 무엇을 기준하여 측정될 수 있을까? 그 사회에 얼마만큼의 생각의 자유가 있고 서로 의견을 교환할 어느 정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가를 가지고 측정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역사의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도 그 시대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두드러진 '생각' 내지는 '이념'이다. 예컨대, 신앙의 시대(Age of Faith), 전제주의의 시대(Despotism),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 민주주의의 시대(Age od Democracy) 등의 표현이 그것을 말한다.
잘라서 한마디로 묶는 일이, 한 시대와 같은 엄청난 것을 요약하기에는 지나친 모험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한 시대를 압도적으로 지배한 생각이나 의견이 있다는 사실만은 시인해야 할 것이고 그것이 그 시대의 특징이라는 사실도 의심할 수는 없다.
생각처럼 무서운 것은 없고, 이념처럼 강한 것은 없다. 히틀러(Adolf Hittler)나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 이탈리아의 정치가)의 국가주의, 스탈린(Stalin)이나 모택동(毛澤東)의 전체주의 따위는 그릇된 이념이라는 것을 역사는 증명했건만 그들의 추종자는 수백만 수천만을 헤아렸으며, 이러한 이념의 일시적 성공 때문에 얼마나 많은 죄 없는 민중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었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여 몸서리가 쳐진다.
특권계급을 타파하고 분배의 균등을 기하는 것뿐 아니라 더 나아가 각자가 '필요에 따라(according to the need)' 쓸 수 있다는 공산주의의 꿈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류 발전의 이 단계에서, 인간의 오늘의 실력을 가지고, 그것이 어디 될 뻔이나 한 꿈인가? 저마다 더 먹고, 더 많이 가지려고 아귀다툼을 하는 이 마당에, 일을 한 분량에 상관없이 자지가 필요한 만큼만 살고 나머지는 기꺼이 남에게 양보할 수 있어야 되는 이 고차원의 이념이 현실 세계에서는 안 될 것이 뻔하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전체주의로 변신하지 않고는 그 틀이나마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체주의를 하려면 독재가 불가피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독재자가 필요하고 그를 뒷받침하는 당이 필요하고, 그를 '민족의 태양'이니 '우주의 태양'이니 하고 치켜세우며 신격화시키는 선전요원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도 그 선전에 속지 않고, 독재자를 반대하고 나서는 '몰지각한 일부 인사들'이 있을 땐 그들을 가차 없이 처치해야 그 독재체제는 유지된다.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그래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불가피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애매한 사람도 수없이 잡혀가 매도 맞고 물고 먹고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고, 마침내 단두대나 교수대에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독재국가에서는 아무런 범죄사실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장차 반역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잡기 위해 시나리오를 쓰고 각본을 만드는 권력의 앞잡이들을 미리 양성한다. 모두 노련한 여우같은 놈들이다. 그 손에 걸리면 살아남기 어렵다.
그래서 전체주의 사회는 권력이 표방하는 이념 이외의 다른 이념에 관하여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못하게 된다. 덮어놓고 공산주의가 제일이라고 목청을 돋우어 떠드는 놈은 그것이 진심이건 아니건 우선 잘살게 된다. 그 시대의 권력의 정상에 앉은 자에게 '각하가 최고입니다', 또는 '수령님은 하늘이 내신 분입니다' 하면 그는 칭찬을 받을 뿐 아니라 신분의 보장도 얻고 운이 좋으면 한자리 할 수도 있다. 이런 '행운아'의 최대의 비극은 그 독재자가 사망하거나 밀려날 때, 행운만큼의 불운을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있다.
아직도 후진성을 면치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는 세계 어디서나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전체주의가 매우 매력적인 것 같다. 2백만을 해치우고 권력을 잡은 스탈린의 소련이나 3천만을 숙청하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모택동의 중공이 '계급 없는 사회'를 동경하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무슨 교훈이 될 것도 같은데 그렇지가 못하니 답답하다.
이념을 테스트하는 것은 권력 자체가 아니라 역사다. 권력이 아무리 자기의 이념을 두둔하더라도 역사만이 이를 심판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역사일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