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200여 년 동안에 서구사회에서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 개념이 '진보'라는 개념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서구의 이념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지나간 1백 년 동안은 동양에 있어서도 진보의 개념이 크게 위세를 떨친 것이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을 일컬어 '마지막 계몽주의자(the last Philosopher)' 라고 하였는데, 계몽주의라는 것이 본디 진보라는 확신 위에 세워진 이념이었으니 사실은 마르크스주의를 지배하는 이념도 인류 사회의 발전이나 진보를 '불가피한 것(inevitability)'으로 간주하는 것이니 결코 역사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고대의 역사가들은 인류의 체험을 '악순환(vicious circle)'으로 보았다. 물론 예외적인 견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 시대의 지성인들은 대부분 인류의 역사가 몇 개 단계를 거치면서 순환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발전은 감히 상상도 못했다.
중세는 신앙의 시대였으니만큼, 인간의 타고난 죄 때문에 고생을 면할 길이 없다고 믿고, 세상은 조만간 끝이 나게 되어있으니 죽어서 천당엘 오르느냐 지옥으로 떨어지느냐 하는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근심할 따름이었다. 그러니 사상과 행동의 자유가 그런 사회적 여건이나 분위기 속에서 용납되었을 리가 없다.
중세를 벗어나면서 인간의 삶의 현장에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교제의 범위가 넓어졌고, 생소하고 새로운 생각과 접함으로 자극을 받아 중세에는 꿈도 못 꾸던 발명이 이루어졌으며, 차차 자연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은 그 '악순환'의 굴레도 벗어나고, 기독교적 인생관의 모순도 청산하면서 인류의 몇 가지 희망에 가슴이 부풀게 되었다.
반드시 내세에다 소망을 두지 않아도 인류의 미래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종래에는 무섭고 두렵기만 하던 자연계가 우리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인간에게 유리하게 개척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저 세상에까지 가기 전 이 세상에서도 삶의 질이 얼마든지 향상될 수 있다는 확신 등이 지성사회에 활기를 불어넣어 점차로 진보의 개념이 고개를 들어 마침내 이념으로의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이념을 역사적으로 더듬어 정리하여 체계화한 학자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뷰리(John B. Bury, 1861~1927. 역사학과 교수)였다. 그는 동로마제국 연구의 권위자였고 일찍이 기번(Edward Gibbon)의 로마제국 멸망사 를 친히 편집하기도 하였다.
뷰리처럼 사상이나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한 역사가는 드물다. 그는 역사를 이끌어나가는 힘이 '생각'에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았든 그 생각이 한 시대의 역사의 방향을 결정지었다고 그는 풀이하였다. 한마디로 하자면 그를 통하여 역사는 보다 넓고 큰 세계를 다루게 되었고, 역사 연구의 범위는 전에 없이 확장·확대된 셈이다.
어떤 분야의 역사 연구건 그것 단독만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보고, 모든 분야의 연구가 서로 연관되고 종합되어야만 역사의 방향이나 의미가 분명해진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뷰리가 많은 세월을 소비해가며 역사적 문헌들을 뒤지고 연구하여, 인류의 생각의 흐름에서 찾아낸 뚜렷한 사실이 두 가지다. 그 하나는 희랍의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Sophocles, BC496~406)의 작품 안티고네(Antigone) 에서 얻은 영감에 의해 깨달은 사실인데, 그것은 인간 자신이 '세계의 불가사의(the wonder of the world)' 라는 것이다.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것같이 들리지만 그 뜻은 매우 깊은 것이다.
이리하여 기원전 5세기에 인간은 이미 자아를 의식하게 되었다. 그 자신이 이 세상에서 스스로 기적을 만들어내는 존재로 의식이 되었다는 말이다. 들의 짐승들, 공중의 새들, 바다의 바람, 그리고 말 없는 지구 모두가 인간의 지배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또 하나의 큰 발견은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 발전의 둘째 단계는 인간이 그 '악순환'에 대한 잠재적 공포심을 떨쳐버리고 또 현상(Status quo)에 만족만 하던 안일한 자세를 청산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발전' 내지 '진보'의 개념을 파악함으로 하여 뷰리는 역사 이해의 매우 유리한 고지 하나를 점령한 셈이다. 그는 1903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로 취임하면서 연설하는 가운데 이런 말을 했다.
'발전의 원리 때문에 벌어진 역사의 변화의 중요성을 아직은 현 세대가 충분히 생활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적인 혹은 영적인 발전의 결정적 단계란 매우 느리고 잘 눈에 띄지조차 않는 것이어서, 가까이 있어서는 그 사실을 깨달아 알기가 언제나 알기가 어렵습니다. 허나, 19세기가 기원전 5세기 못지않아 역사 연구 과정에서 매우 중요할뿐 아니라 인간의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의 성장에 있어서의 또 하나의 단계를 기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저 없이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풀이하자면, 역사는 끊임없이 발전해온 것이고, 소포클레스가에게 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깨달은 '자아의식'이 19세기의 어느 달 밝은 밤에 도버(Dover)의 해변에 서서 인생과 역사를 생각하던 아놀드(Mattew Arnold, 1822~88. 영국의 시인, 비평가)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생물계에 줄곧 진화가 있었듯이 인간사회, 인간 역사에도 끊임없이 진화가 있었다고 풀이할 때 '진보의 이념'은 당연한 결론이 아닐까? 뷰리가 1909년에 발표한 논문의 제목을 <다위니즘과 역사> 라고 붙인 것도 매우 타당하였다 하겠다.
인간 만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 파악이라고 믿는다. 예술이 그렇고 문학이 그렇고 경제가 그렇고 정치가 그렇다. 그림 한 폭을 그리는 화가에게 주제가 없다면 그의 그림이 그림 구실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무엇을 그리려고 그는 붓을 들었으며 그는 과연 그 무엇을 그리는 일에 성공하였는가? 그의 그림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으려면 그것이 옳게 파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음악은 더욱 그렇다. 교향곡에는 테마가 있다. 그냥 막연하게 듣기만 하면서 그 주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은 심포니를 감상할 자격이 없다. 그 반면에, 주제 파악이 바르고 정확한 사람은 그 음악 자체를 남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뿐 아니라 남보다 더 많은 환희와 감격을 그 연주를 통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시나 소설도 그렇고, 정치나 경제도 그렇다. 그러므로, 생각 없이, 이념 없이 정치를 한답시고 날뛰는 사람들처럼 한심한 사람들은 없다. 이렇다 할 원칙을 찾아내지도 못한 주제에 국민의 경제생활을 이끌어나간다는 사람들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다. 문제는 주제의 파악에 있다.
역사 연구를 평생 한다는 사람들도 역사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이 소리 저 소리 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은 주제 파악이 안돼서 그런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 있었던 사람들을 많이 아는 사람들이 반드시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닌 성싶다. 나는 젊어서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의 강연을 들어본 적이 있다. 나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그 엄청난 기억력에 놀랐다. 어쩌면 아는 것이 그리도 많을까?
그러나 많이 안다고 해서 반드시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역사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척척박사'가 반드시 훌륭한 역사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이 알면 뭘 하는가? 앞서 말한 대로, 구슬이 서 말이라도 알알이 굴러다니는 그 상태에서는 구슬이 구슬 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다. '끈'이 있어야 한다. 최남선은 왜 세계적인 사학자로 각광을 받지 못했고, 토인비는 어찌하여 세계의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죄다 기억하는 이름이 되었는가? 유명하고 유명하지 않고가 문제가 아니라, 최남선이 찾지 못했고 마련하지 못했던 그 '끈'을 토인비는 찾았고 마련했기 때문에 생긴 차이라고 믿어진다.
토인비는 '도전과 대응(Challenge and response)'이라는 말로 그의 역사 이해의 주제를 삼았다. 토인비의 선배인 뷰리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진보(Progress)라는 낱말 하나로 집약이 되었던 것뿐이다. 도전과 대응이라 하건 진보라 하건 그 끈의 질은 비슷한 것이다. 19세기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진보라는 말이 알아듣기 쉬웠고, 20세기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도전과 대응이라는 표현이 더욱 실감이 난다.
19세기의 생각의 역사에서 가장 큰 몫을 담당한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다윈(Charles Darwin, 1809~82. 영국의 생물학자, 진화론자)이 아닐까? 생물의 진화에서 그가 발견한 그 원리 원칙이 역사의 현상을 깊이 연구하는 뷰리에게 무슨 암시를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주제를 진보라고 요약해 우리들의 생각의 어두운 구석을 밝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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