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이냐?'는 주제는 이해하기에 도움이 되도록 풀이한다는 노릇이 이해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주제 자체를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결과를 초래하지나 않았나 모르겠다. 역사에 관한 이런저런 해석을 다 들추어내다보면, '역사는 역사가의 업적일 따름이다' 라는 모순된 역설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역사가는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기울여 '과거'에 관련된 정보나 사실을 수집한다. 그리고 그 과거에 관한 자질구레한 정보 부스러기들의 의미나 의의, 중요성이나 타당성을 판단하게 된다. 만일 역사가가 판단을 내리지만 않는다면 말썽이 크게 일어날 건덕지는 없다. 판단을 하자니 자연 의견이 갈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어떤 원리의 작용으로 과거의 어떤 한 사건이 개인과 집단과 제도에 어떤 영향을 어떻게 미치게 되었는지를 판단하다 보니 역사가의 의견이 구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한 역사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의 가치관이나 판단의 기준이 되겠다.
그래서 역사가는 신문기자의 자리에 머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신문기자도 잡다한 사회적 현상이나 사건 중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추려서 보도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작용 안한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어떤 기사 하나가 그 기사를 쓴 기자의 주관을 너무 많이 반영했을 때 편집국장은 그를 불러 몇 마디의 '훈계'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역사가의 입장은 좀 다르다. 앨버트 베버리지는, '사실들이 옳게 나열만 되면 자체의 풀이가 되는 법'이라고 했지만, 우선 어느 것이 역사적 사실인가를 판정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닐 분더러 옳게 나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다. 또, 사실만을 나열하여 쓰여진 역사는 읽을 맛이 없다.
베버리지 자신이 1928년에 출판한 에이브러햄 링컨, 1809~58 이라는 두 권의 저술은 따분하기 짝이 없는 링컨전으로 칼 샌드버그(Carl A. Sandburg, 1878~1967. 미국의 시인)의 에이브러햄 링컨 여섯 권에 비하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사실에 충실하려고 애쓴 베버리지의 공적을 높이 평가는 하지만, 남이 읽어주지도 않는 책만을 쓴다는 것도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시인 샌드버그의 링컨전은 사실에 치중했다기 보다는 그 나름의 풀이에 치중했는데, 그 내용이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모른다. 많은 미국 사람들의 가슴 속에 링컨의 생동하는 모습을 심어준 것은 베버리지가 아니라 샌드버그라고 어느 역사가가 증언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부터 한 5,60년 전만 해도 역사가의 책임이 과거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서 현재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일뿐이라고 믿고 '사실을, 오로지 사실만을!' 하고 외친 역사가가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20세기를 사는 인간의 체험은 그러한 역사관의 거짓되고 허무함을 점차 우리도 의식하게 하였다. 역사가가 이미 일어난 사건이나 사실에 대한 의미나 중요성을 전혀 논하지 않는다면 그 역사는 정신이나 혼이 바진 허수아비 역사가 될 가능성이 많다. 뭐니뭐니해도 사람에게는 혼이 있고 정신이 있는데 그런 차원을 무시하고 인간 생존의 수수께끼가 검토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뿐인가? 아무리 사실만을 다룬다 하여도 그 사실을 다루는 인간이 완전히 편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아무리 공정을 기한다는 역사가라 하더라도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주견(先入主見) 없이 역사적 사실을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일합방(韓日合邦)이나 3·1운동 같은 역사적 사건을 일본의 역사가와 한국의 역사가가 꼭 같이 다루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현대의 심리학자나 철학자의 공통된 의견에 따른다면, 사람은 미리 일정한 가치관을 가지고 사건에 접근하게 마련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단 역사를 기록한다 할 때는 주체할 수 없이 많은 그 사실들 속에서 필요한 것만을 추려야 하니 저자의 주견이나 편견은 작업의 시초에서부터 크게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란 결국 역사가의 눈에 비친 '과거'일 뿐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시대를 따라 고쳐 쓰여질 수밖에 없다. 새 시대의 새 역사가가 나타나 새로운 관점에서 새롭게 역사를 쓴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라는 무덤 속에 묻혀있을 수가 없고 항상 새로운 각광을 받게 된다. 에드워드 카아(Edward Carr, 1892~. 영국의 국제 정치학자)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라고 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표현이다. 천수백 년 흙 속에 묻혀있던 백제 무령왕(武寧王, ?~523)의 금관이 흙 속에 파묻혔던 그 긴긴 세월 동안에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일단 먼지와 흙을 떨어버리고 공주 박물관에 전시된 이상 이제부터 현재와의 대화를 아니할 도리가 없다.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변하지 않을 '과거'가 없듯이, '과거'와의 대화로 말미암아 통하지 않을 '현재'도 없다. 그런 마술의 지팡이가 역사가의 손에 쥐여져 있다. 예를 든다면, 영국의 공화정부가 무너지고 1660년 왕정복고(王政復古)가 감행되었을 때 청교도 혁명군을 이끌고 공화정권을 수립했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영국의 정치가)의 망명은 그를 미워하던 많은 영국인에 의해 역적으로 몰렸던 것이 사실이지만,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 영국의 사상가, 역사가)은 크롬웰의 서간과 연설을 모아 면밀히 분석 검토한 끝에 그를 영국 역사 최대의 인물이라고 치켜세웠다. 왕정이 복고된 지 2백년 가까운 뒤의 일이지만, 크롬웰을 영국사의 영웅으로 삼는 이 전통은 칼라일 이후 백 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있다. 중국의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을 오늘날 위인으로 추앙하는 사람들이 자유진영에도 적지 않게 있지만 그 인물에 대한 백년 후의 평가는 매우 의심스럽다.
역사의 언덕에 매몰된 과거의 사실들을 캐내서 추려놓는 것도 역사가에게 있어서는 귀중한 재간이며 기술이지만 그것만으로 훌륭한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좋은 연장을 가졌다고 훌륭한 농부가 되지 않는 이치와 비슷하다. 연장이 좋다고 농사가 저절로 잘 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절을 분간할 줄 알아, 씨를 뿌릴 때와 곡식을 거둘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놓는 지혜도 갖추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다음해 봄에 파종할 종자도 알맞게 남겨 간직하고, 남는 것을 먹는 슬기가 있어야 비로소 훌륭한 농부다.
그렇다면, 역사의 전체적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는 역사의 어느 부분이나 한 단편을 옳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강의 물줄기가 어디서 어디로 흐르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공이 한강 물에 배를 띄우는 일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배만 훌륭하다고 훌륭한 사공이 될 수 있겠는가?
역사가의 사명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인류와 민족, 국가와 사회의 어제와 오늘을 판단하는 데 있다. 그래서, 올바르게 훈련받아 적당히 영감에 젖은 역사가는 한 시대의 예언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언의 기능을 포기하는 역사가는 역사가이기 이전에 하나의 비겁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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