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 즉 시대정신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모든 시대는 다 하느님께 대하여 직접적(immediate)이다' 라고 하는 전제는 한 시대의 상대성(相對性)을 암시하는 동시에 이 정신의 파악 없이는 절대(絶對:the absolute)에 접근할 수 없음을 시사해 준다. 쉽게 말하면 신(神)을 전제하지 않으면 인간은 극히 무가치한 존재인데, 그 무가치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절대자를 파악하는 일이 또한 불가능하다는 말과 비슷하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도, 절대를 알려면 상대를 알아야 하고, 그런 과정에 있어서 사람에게 꼭 있어야 할 것은 거짓이 없는 양심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풀어본다면 '시대정신'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즉 최고의 도덕이며 위대한 신앙이어야 한다고 판단이 된다. 그러므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인간만 가지고 생존의 수수께끼는 풀리지가 않고 한 시대의 양심이 위대한 신앙으로 삶의 한가운데로 뛰어들 때 비로소 그 신비를 해득하는 실마리라도 잡아볼 수 있는 것이다.
헤겔(G.F.W. Hegel, 1770~1831. 독일의 철학자)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세계정신(World spirit)이고 이 정신의 구현이 곧 인류의 역사인 것이다. 그 세계정신이 시대를 따라 다른 의상을 걸치고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메시지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시대의 메시지를 읽지 못하고는 삶의 핵심에 파고들지 못할 것도 또한 분명하다.
일찍이 우리의 조상은 역사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의견도 없이 단지 따분한 생존을 되풀이하였을 뿐이다. 고작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이 역사는 사이클(cycle)을 그리면서 개미 쳇바퀴 돌 듯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온다는 견해였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주장이나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생각이 비슷한 의견이라고 하겠다. 그런 생각보다 조금 앞선 것이 인류의 역사는 나선(螺旋)을 그어 비록 원(圓)을 그리기도 하나 첫 원과 둘째 원 사이에는 거리가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압도적으로 불교와 유교의 영향하에 있던 동양은, 인간과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이 굳어져있어서 새롭게 느낄만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으나, 주로 유태교 기독교의 정신적 후예인 유럽에서는 무한한 시간의 선상에서 천지창조를 하나의 기점으로 삼고 인류의 타락, 낙원의 상실, 메시아 대망(待望), 그리스도의 탄생, 세계의 종말, 최후의 심판, 낙원의 회복 등을 전망할 만한 고지(高地) 하나를 지키고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성(聖) 어거스틴(A. Augustinus, 354~430. 기독교 종교가)이고, 그 대표적인 작품이 신국(De Civitate Dei) 인 셈이다. '창조 타락 멸망 구원' 이제부터 역사에는 코스가 있고 목적이 있다. 부분적으로 견해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닐레프스키(N.Y. Danilevskii, 1822~85. 어시아의 저술가)나 슈펭글러(O. Spengler, 1880~1936. 독일의 역사가, 철학가)나 토인비(A.Toynbee, 1889~1975. 영국의 역사학자)나 다 어거스틴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모두가 신국 에 대한 재해석, 재평가 내지는 재탕을 시도한 것에 불과하고 역시 독창성은 어거스틴에게 있다고 생각된다.
심지어 서구 역사에 나타난 계몽주의나 마르크스주의 같은 사상, 이념도 사고의 방식이나 논리전개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신국 과 대동소이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베커(Carl L. Becker)의 The Heavenly City of the Eighteenth-Century Philosophers 라는 책을 읽으면 많은 암시를 받게 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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