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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동길 교수의 역사학 강의-역사란 무엇인가(2)/역사적 사실과 역사 지식

鶴山 徐 仁 2005. 7. 3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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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역사란 무엇인가 - 역사란 무엇인가(2)/역사적 사실과 역사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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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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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knowledge)은 믿음(belief)과 짝하여 비로소 제구실을 한다. 지식은 명확해야 하기 때문에 어중간한 인상이나 희미한 기억은 지식이 될 수 없다. 객관적 인식의 내용이 못되는 독단이나 공상 따위도 참된 지식, 즉 진리의 세계에서는 설 자리를 찾지 못한다. 막연한 인상, 모호한 기억, 근거 없는 독단, 맹랑한 공상 같은 것들은 이지러진 지식의 조각들로서 믿음을 동반하기가 어렵고, 따라서 지식으로서의 제구실을 하기도 힘들다. 역사란 있었던 일들에 대한 앎이며, 그 앎에 대한 믿음으로써만 존재하는 학문의 한 분야이다.

넓은 의미에서, 역사란 역사를 쓰는 사람의 신앙고백이다. 인류가 여태껏 체험한 사실들을 토대로 역사가는 자신이 알고 믿는 바를 털어놓는 것이다. 막연하게 알고만 있어서는 역사가의 소임을 다할 수 없다. 그는 어떤 사실을 믿을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그 아는 바를 고백할 정도로 순수하고 용감하여야 한다. ' 이었던 것 같다' ' 이었다고 생각된다' ' 것으로 추측된다' '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등의 애매한 사실들을 토대로 해서는 역사가의 고백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역사지식을 과거사실에 대한 앎이라고 한다면 역사가의 첫째 임무는 물론 그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데 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고 역사를 엮는 것처럼 무모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례가 인류의 역사에는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가혹하게 말한다면, 역사지식과 역사가의 신앙고백처럼 불확실하고 맹랑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왕왕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세를 통하여 흔들림 없이 믿어온 한 가지 사실은, 로마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us, 280?~337)이 로마 교구의 주교인 교황에게 그 지역에서의 광범위한 세속적 권한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 시부 행위를 문서로써 확증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의심한 사람은 없었다.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의 칙령(313, 신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기독교를 공인한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3백년 가까운 오랜 박해에 종지부를 찍었고, 또 일설에는 기독교로 말미암아 그 나병이 완치되었다고 하니, 그런 엄청난 은총을 입은 그가 기부 행위를 했다는 말을 의심할 까닭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서 1천1백여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문서가 가짜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발라(Lorenzo Valla, 1406~57. 이탈리아의 철학자)는 15세기 중엽에 마침내 그 문서가 콘스탄틴 대제의 생존시에는 도저히 쓰여질 수가 없었고, 4세기나 뒤인 기원 8세기에야 기록된 문헌임을 밝히는 일에 성공하였다.

발라가 이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첫째, 교황청의 영토와 그 세속적 권세는 하등의 법적 근거를 지니지 못했다는 점이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오늘날 교황이 거주하는 1백여 에이커의 땅과 1천여 명의 인구를 지닌 바티칸 시(市)조차도 교황청의 소유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 성당도 남의 땅에 세운 무허가 건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둘째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설사 발라가 콘스탄틴의 기부행위에 관한 증거서류가 위조라는 사실을 1440년에 이르러 밝혀냈다고 해도, 이를 계기로 당장에 놀라운 변화가 생긴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교황청은 여전히 그 땅을 차지하고 그 권한을 휘둘렀다. 교황의 영토가 줄어들고, 그의 세속적 권한이 깎이게 된 것은 그 문서가 거짓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황청이 안으로는 분열과 무질서를 막지 못했고, 밖으로는 가톨릭적 단합을 유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었을 뿐이고, 그 문서의 허위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지식의 효능에 대해서는 때로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역사에 관한 한, 믿음이 앎을 앞지르고, 믿음이 앎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일단 믿었던 일은 새 사실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좀처럼 뒤집히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사실상 역사의 사건은 단 한 번으로 끝나고 다시는 되풀이되지 못한다는 숙명적 약점을 지니고 있다. 역사가가 과거를 아무리 과학적으로, 또 객관성 있게 모조리 들추어내서 정리한다 할지라도, 역사의 어느 한 장면인들 완전무결하게 재연(再演)할 수야 있겠는가?

1392년,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 1337~92)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한번 돌이켜보자. 그가 선죽교(善竹橋)에서 조영규(趙英珪, ?~1395) 등에게 살해되는 장면을 녹화한 기록영화가 없는 것은 물론, 아무리 유능한 배우들이 있어서 그 장면을 그대로 연출한다 하여도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약점뿐 아니라, 절대로 1392년의 사건은 아니라는 결정적인 결격사항(缺格事項)을 지니고 있다. 물리나 화학의 실험처럼 지구상의 어디서나 그 실험이 되풀이될 수 있고, 그 실험의 결과가 한결같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역사는 보편타당성을 내세우는 과학의 범주에 들지 못하고, 끝내는 과학적 진리의 울타리에서 밀려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자객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고 이성계 일파가 득세한 후로는 두문불출하고 칩거(蟄居)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하자. 그 사실이 문헌의 고증이나 풀이를 통해 밝혀졌다고 가정하자. 그럴 경우, 우리 국민이 6백여 년 동안이나 믿어온 사실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정몽주에 대한 한국인의 존경심이 한 치인들 줄어들겠는가? 이래저래 역사가가 다루는 사실에는 항상 문제가 많은 것이다.

랑케(Leopold Ranke, 1795~1886. 독일의 역사가)가 설사 역사학을 철학과 종교의 영역에서 끌어내어 독립된 학문으로 키우는 일에는 성공했다 하여도, 역사학이 과학의 새로운 분야가 되지는 못하였다. '실제로 일어난 그대로' 역사를 적는 일이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는 과학이고, 마땅히 과학적이어야 한다'고 외친 이는 쿨랑쥐(Fustel Coulanges, 1830~89. 프랑스의 역사가)였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역사는 심리학과 더불어 인간의 영혼(soul)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하였으니 역사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아닌 것은 번하다. 크로체(B. Croce, 1866~1952. 이탈리아의 철학자, 역사가)가 역사학에 있어서의 실증주의와 유물론을 배격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우리는 앞서, 역사지식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역사가는 '사실'을 다룰 때 가장 안전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사실은 눈으로 보나 손으로 만지나 단단한 물체라는 느낌도 든다. 그는 힘들여 캐낸 사실들을 쌓아놓고 누군가가 그것들을 사용해줄 것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스스로 그 사실들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역사가는 좌우간 그 사실들을 남들이 쓰기에 편하도록 잘 손질해둔다. 그러면 칼 베커의 말대로 사회학자나 경제학자가 가져다가 그들 나름대로의 설계에 재료로 사용할 수도 있다. 상식적으로는 역사지식이 그 이상의 고상한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역사적 사실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하여 정확하고 만족할만한 답을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때때로 역사를 공부한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한다. 대개의 학문은 한 30년의 세월과 정력을 바쳤다면 그런대로 일가견을 지니게 되는 법인데,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세계는 그렇지가 못하다.

솔직하게 말해서, 역사의 분야에는 대가(大家)가 없고 학생이 있을 뿐이다. 젊었거나 늙었거나, 배우는 몸이거나 가르치는 몸이거나 다 학생 아니면 생도다. 이름 석 자 앞에 물리학자니 정치학자니 하는 칭호가 붙는 것은 그냥 넘길 수 있겠지만, 누구의 이름에건 역사학자라고 붙은 것은 일단 놀란 눈으로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된다. 더욱이, 나의 이름 앞에 '사학자' 라고 붙었을 때는 먼저 송구스러운 생각이 들 정도로 당황하게 된다. 왜 그럴까?

물론, 역사지식은 방대한 인류의 수천 년의 경험을 포괄적으로 문제 삼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닌 것이다. 따지고 보면, 역사적 사실이란 상징(symbol)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상징이 지니는 의미는 무궁무진한 것이다.

출처 : 교육학 관련강의
글쓴이 : 관리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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