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선죽교의 핏자국을 생각해보자. 거기서 정몽주는 고려 공양왕(恭讓王, 1345~94) 4년 어느 날,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점차 위세를 떨치게 되면서 이 군인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아채고, 고려 왕조를 다시 일으킬 뜻을 품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1392년, 명(明)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맞으러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황해도 황주에 드러눕게 되자, 정몽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치우려 했지만, 영리한 이방원(李方遠, 1367~1442)이 눈치를 챘기 때문에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몽주는 정세판단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이성계를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에 선죽교에서 그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날 그 시간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것은 단 한번에 끝나버린 사건으로 다시는 되풀이되지 못할 것이 확실한, 이를테면 과거지사(過去之事)다. 그러나 1979년에 그날 그 시간의 그 사건을 이야기하게 된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부른다. 역사적 사실은 오늘의 과제며 관심사지, 결코 현재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흘러가버린 과거는 아닌 것이다.
1392년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1979년에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두 개의 개념 사이에 관련은 있을망정, 이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몽주 살해사건이 오늘의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사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거듭 다짐하거니와 그 사건은 영원히 가버렸고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으며, 어느 살아있는 개인도 그 광경을 목격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역사가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역사가는 6백 년 전에 그 비극을 목격한 사람들의 기록이나 그 당시의 문헌을 통해서 그 사건을 더듬어 재현시켜보는 수밖에 없다. 재현시킨 그것이 어느 역사가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뿐이지 그 역사적 사실은 아무데서도 찾을 길이 없다. 분명히 지적하거니와, 아무리 그 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고 문헌이 있다 하여도, 그 사건을 문제 삼는 역사가가 없다고 하면, 정몽주의 죽음은 물 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물거품과 다를 바가 없다.
왜 역사가는 그 사건을 문제 삼아 오늘 다시금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거론(擧論)하는가? 선죽교의 피는 한국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상징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에 있어서 상징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역사지식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정몽주의 아버지가 단명(短命)했던가 장수했던가를 문제 삼을 역사가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상징으로 들어 이야기할 만한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죽교의 비극이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건 이후 줄곧 우리는 그 사건을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사건을 기억하는 우리들의 마음의 자세나 태도에는 세월을 따라 언제나 상당한 변화가 있어왔지만, 그의 죽음을 우리는 한번도 망각하지는 않았다. 만일에 우리들의 기억력이 동물만도 못하다고 한다면, 정몽주의 죽음이 아무리 중대한 사건이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역사적 사실로 남지 못하고, 다만 한번의 사건으로 영원히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상징의 구실을 할만한 모든 역사적 사실은 현재 속에 살아서 현재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라는 개념처럼 걷잡을 수 없고 모호한 개념은 없다. 현재는 우리가 이 문제를 논의하는 이 시각에 이미 과거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허술한 울타리 속의 개념이다.
그러나, 삶은 가버린 어제도 아니고 바라보는 내일도 아니며, 바로 살아있는 오늘이다. 역사지식의 효용이 있으려면 오늘 있어야지 내일로 미룰 수는 없는 일이다.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아있는 역사지식만이 우리들의 것이고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선죽교의 피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고,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의 허구한 내일에도 우리나라 우리 백성에게 있어서는 매우 값있는 역사적 사실로 남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왜 그런가?
역사에는 목적이 있다는 사람도 있고, 역사에는 목적이 없다는 사람도 있다. 역사에는 의미가 있고 교훈이 있다는 사람도 있고, 역사에는 의미도 없고 교훈도 없다는 사람도 있다. 언뜻 듣기에는 엄청난 견해의 차이 같지만, 따지고 보면 그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되지 않는다.
역사를 토막지어 그 하나를 들고 유심히 들여다보는 데 그친다면 역사의 방향이나 목적이나 의미를 파악하기는 어려워진다. 가령, 백년도 더 된 느티나무 한 그루를 몇 토막으로 잘라 그 가운데 토막 하나만을 어떤 사람에게 보이면서, 이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는 결코 우거진 느티나무의 모습을 묘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나 로마제국 쇠망사 만 가지고 역사의 전체를 짐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스의 역사나 로마의 역사는 세계의 역사의 일부로서만 가치가 있다. 역사가 항상 세계사(universal history)이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의 신세가 되어서는 안 될 노릇이기 때문이다.
역사지식을, 새로 내는 큰 길 때문에 철거되는 집터들에 흩어진 벽돌장처럼 여기저기 되는대로 버려두지 말고, 깨끗하게 거두어 그것으로 무슨 모양의 집을 지어보려는 노력은 성 어거스틴의 신국 이래로 어쩔 수 없이 서양사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고, 헤겔, 토인비는 물론, 심지어 반기독교적임을 자부하던 계몽주의자들조차도 그 영향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모든 상징적 역사지식의 종합인 넓은 의미의 역사에 일관된 의미가 있다는 주장은, 인류의 전체적 체험에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 나름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지녀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를 따라 신앙이 앞서기도 하고 이성이 앞서기도 하며, 앎이 앞서기도 하고 믿음이 앞서기도 하는 고르지 못한 험한 길을 인류의 역사는 한없이 더듬어왔지만, 역사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성보다는 신앙이, 앎보다는 믿음이 인간 생활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시인해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모든 역사학도가 다루기를 꺼리는 역사지식의 한 토막을 들어 몇 마디 함으로써 피차의 흩어진 생각을 가다듬고자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설(復活說)이다. 이 사실은 신약성서라는 극히 비과학적인 역사기록 밖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사건이고, 지나간 2천년 동안 이 사건을 역사의 밖으로 몰아내려는 노력이 끈질기게 계속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사를 집필하는 역사가가 그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든 말든 이 사건처럼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실은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에 목적이 없다고 단정한다면, 이것도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현상 가운데 하나다.
'인간 생존의 영원한 수수께끼'를 역사 지식만으로 풀 수는 없다. 크로체의 말대로 역사를 '인간 정신의 자력발전(自力發展 the self-development of the human spirit)'이라고 본다면, 역사지식의 구실이 무엇이어야 할지는 스스로 명백해질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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