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 불태워지는 것 보고도 ‘평화 쇼’ 위해 눈감은 사람들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그들은 왜 ‘라이언 일병’ 구하려
목숨 걸고 전장에 뛰어들었나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입력 2022.06.25 03:00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적막에 휩싸여 있던 오마하 해변이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상륙하는 미군에게 맞서는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공습 실패로 독일군 벙커가 그대로 남아 있는 가운데 전차들도 가라앉아 버렸다. 쏟아지는 기관총 세례에 맞서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몸에 구멍이 뚫리면서도, 미군은 한 발씩 전진하여 가까스로 상륙에 성공했다.
그 숨막히는 전투에서 살아남고 혁혁한 공을 세운 밀러(톰 행크스) 대위. 생지옥을 헤쳐 나온 그는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새로운 명령을 받는다. 낙하산을 메고 적진 깊숙이 들어갔지만 흩어져 종적을 찾을 수 없는 101공수사단 소속 제임스 라이언(맷 데이먼) 일병을 구출하여 생환시켜야 한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일곱 부하를 데리고 밀러 대위는 아직 독일군이 득시글거리는 프랑스의 깊은 곳으로 향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내용이다.
제임스에게는 세 형이 있었지만 모두 최근 목숨을 잃었다. 한 집안의 형제가 같은 전쟁에서 모두 죽는 비극을 막기 위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작전이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라이언 일병을 구해야 하는가? 네 형제가 모두 전사하는 일은 비극적이겠지만, 라이언 일병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이가 죽음을 무릅쓰는 것은 더욱 부조리한 일 아닐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국민국가(national state)’라는 개념을 살펴보아야 한다. 가령 우리는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한반도에 모여 선거로 대표를 선출하여 국가를 이루고 정부를 꾸려 집단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바로 이것이 국민국가 체제다. 국민, 영토, 주권으로 이루어진 국가의 존재를 당연시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일러스트=유현호
국가가 늘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 온 것은 아니다. 국민국가의 기원은 종교개혁 이후 30년 전쟁이 벌어지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은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본격화하기 시작한 때는 18세기. 1776년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하고 곧이어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국민국가 전후 상황을 비교해 보자. 이전의 국가란 왕의 소유물이었다. 나라가 망하건 말건 그건 왕족과 귀족들의 땅따먹기 놀음일 뿐 백성들과는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이가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역사상 최초로 성문헌법을 제정하여 왕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었다. 프랑스의 혁명가들 역시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나라의 주권이 왕이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있다고 외쳤다.
국민국가의 탄생은 당혹스러운 현상이었다. 어차피 내는 세금, 영국 왕실이 걷어가건 미국의 자치주가 가져가건 그게 농민들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평범한 미국인들은 자발적으로 민병대를 꾸려 영국군과 싸우고 있었고, 영국은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프랑스 공화국의 침략을 받던 유럽의 왕국들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왕국의 신민들은 억지로 전쟁에 끌고 나와도 도망치기 일쑤였다. 반면 프랑스에선 국민의회가 국가 총동원령을 발령하고 무려 120만 병력을 끌어냈다. 용병에 의존하던 유럽의 왕국들은 그 엄청난 힘을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결국 역사의 흐름을 뒤집지는 못했다.
이 현상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국민이 주권을 지니고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점에서 국민국가는 인류 역사의 커다란 진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권리는 병역의 의무와 불가분 관계를 지니는 것이기도 했다. 과거의 전쟁은 왕족과 귀족이 소수 용병을 거느리고 벌이는 ‘그들만의 싸움’이었지만, 국민국가의 전쟁은 온 국민이 휘말려들 수밖에 없는 총력전이 되고 만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정치학자, 역사가인 찰스 틸리(Charles Tilly)는 이 당혹스러운 현상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전쟁은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는 전쟁을 만들었다.”
오늘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2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한국전쟁’이라는 공식 명칭을 좋아한다. 국민국가 대한민국을 만든 전쟁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지 5년, 미군정 시대를 끝낸 지 고작 2년 된 가난한 신생 국가 대한민국은, 바로 그 전쟁을 통해 세계사적 위치를 부여받았다. 한국전쟁을 통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태어났고, 한국인들은 불과 70여 년 만에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 수출 대국을 이룩하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올바른 궤도를 걷고 있다. 전쟁의 비극을 통해 다시 태어난 국민국가 대한민국은 세계사의 기적이다.
이 도저한 흐름을 부정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경제성장의 과실은 실컷 따먹으면서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거부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북한의 침략을 어떻게든 ‘외세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 국가가 아닌 민족을 운운하며 적의 요구를 다 들어주면 모든 위험이 사라질 것처럼 여론을 호도한다. 심지어 종전 선언이라는 ‘평화 쇼’를 위해 우리 국민이 북한군에게 목숨을 잃고 시신마저 소각당할 때 일부러 눈감고 있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책임을 묻지 않는 한, 이 땅에는 국민도 국가도 있을 수 없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돌아와 보자. 라이언 일병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밀러 대위를 비롯 8명이 적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이유를 이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제임스 라이언이라는 사람은 미국 군인이면서 동시에 국민이기 때문이다. 군인으로서 전장에서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지만 그와 가족이 ‘형제 전원 몰살’이라는 엄청난 비극에 사로잡히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모든 국민이 곧 전우인 국민국가, 미국이 이행해야 할 의무인 것이다.
조지 C. 마셜 장군은 남북전쟁 당시 링컨 대통령이 다섯 아들을 모두 전쟁터에서 잃은 빅스비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낭독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국민국가는 전쟁하는 기계다. 그래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설령 더 큰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어도 국민의 목숨을 지킨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보여주는 국민국가의 역설, 그 위에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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