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왕하 6:20-23

鶴山 徐 仁 2022. 3. 26. 12:20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왕하 6:20-23

 
 
 
03월 26일 (토)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왕하 6:20-23



20.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여시매 그들이 보니 자기들이 사마리아 가운데에 있더라
21. 이스라엘 왕이 그들을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하니
22.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하는지라
23.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여시매 그들이 보니 자기들이 사마리아 가운데에 있더라>(20절).
아람 군대가 자신들이 사마리아 한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이미 전황이 완전히 역전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들이 도단 성을 완전히 에워쌌었지만 이제는 도리어 자신들이 이스라엘 군대의 포로가 되어 죽게 된 사정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이 엘리사에게 묻습니다.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21절). 
이것은 포로에게 행하던 관례대로 죽여도 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엘리사의 대답은 <치지 마소서>(22절)였습니다. 
당시 엘리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아람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사마리아까지 유인해 온 것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위함보다는 적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참 선지자가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5:8)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엘리사가 그들을 전쟁 포로로 간주해 그냥 이스라엘 왕에게 넘겨주었다면 그 전쟁은 한낱 이스라엘과 아람의 전쟁이지 아람 군대와 하늘 군대의 전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16절). 
아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아람 군대를 관대하게 대해주며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하는지라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 보내니 ...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22-23절).
원수를 굴복시키는 길은 칼과 무력이 아니라 마음을 사로잡는 자비와 사랑이었습니다(요일 3:16, 고후 5:14). 실제 엘리사가 나타낸 이적과 그가 보여준 사랑으로 인해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던 아람의 침입이 거기서 멈춰지고 평화가 회복됐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정죄나 보복은 생명의 기운을 꺾고 대립과 반목의 악순환을 부르며, 결국은 모두를 죽이는 일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오직 모든 대립을 뛰어넘어 남을 대접하고 축복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돕고 격려하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쏟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아쉽고 불행했을까 하고 평가 받는 인생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는 적들조차 인정한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 본문 22-23절 말씀을 읽고 당신의 느낌과 소감을 적어보십시오.
- 본문 22절과 잠언 25:21-22절 말씀을 비교해보십시오.
- 당신은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한>(23절)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 여호람 왕은 <내가 적들을 치리이까> 했지만 엘리사는 <치지 마소서 ...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렇게 했더니 <아람 군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주님, 무엇이 진정한 승리인지, 무엇이 참된 해법이고 궁극적인 처방인지를 저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며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결정적인 착각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착각 시리즈’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 태종대와 낙성대를 대학이라 착각하는 사람
- 몽고반점을 중국집이라 착각하는 사람
- 안중근의사를 내과의사라 착각하는 사람
- L.A 가 로스엔젤레스보다 멀다고 착각하는 사람...
이런 착각들은 애교스럽습니다. 그러나 착각 중에는 생사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착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못 생각하여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결정적인 착각이 있습니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착각!” “착한 사람이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 착각!”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100년 남짓한 안개 같은 삶보다도 더욱더 긴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천국 간다는 착각도 결정적인 착각입니다.
첫째, 착하다는 절대 기준점이 없습니다.
둘째, 착해 질 수 없는 악한 환경 속에서 자라온 사람은 억울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착함과 악함으로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하나님이 불의
하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이 보시기에 착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착한 사람도 의인도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그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롬3:20)
“이는 그(예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
 
“모두가 잘못하면 꼭 아무도 잘못하지 않은 착각이 들게 된다.”


신영준 저(著)「졸업선물(로크미디어, 30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내가 누리는 은혜를 다른 이도 누리도록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사랑은 더 자라게 된다.
 우리의 사랑이 더 커지면 우리는 이기적인 자아에서
 더욱 많이 벗어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더욱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누리는 은혜를 다른 사람도 누리길 바라는 
강렬한 소원을 낳는다.
이런 소원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더욱 가깝고 더욱 만족스런
 교제를 나누도록 돕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다.
 -A.W. 토저의 ‘예수 방향으로 가라’에서-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셨고(행 17;36)
사회의 각 구성원들이 서로를 위해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뜻입니다.
 인간의 창조목적을 성취하기에 
가장 좋은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은 
혼자 고립된 채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한 복판에 사는 사람입니다.            
나 혼자로서 체험한 것이
 가족과 사회에 유익을 주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체험은 
미심쩍은 체험으로 간주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