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왕하 6:8-19

鶴山 徐 仁 2022. 3. 25. 10:00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왕하 6:8-19

 
 
03월 25일 (금)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왕하 6:8-19



8. 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9.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10.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11.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12. 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13.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으리라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보라 그가 도단에 있도다 하나이다
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18.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19.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읍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9-10절).
여호람 왕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왕이었음에도 엘리사는 오직 민족의 재난을 막고자 여호람 왕을 힘껏 도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여전히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으리라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보라 그가 도단에 있도다 하나이다>(13절).
당시 엘리사의 명성은 이미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방인 아람에서도 자자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나아만 장군의 나병 치유와 그 밖의 여러 가지 이적적인 사건들이 전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기 위해 엘리사가 머물고 있는 도단 성을 에워쌀 만큼의 많은 군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군대를 동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려는 것은 곧 무력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15-16절).
엘리사의 사환은 당시 군사들이 왜 성을 포위하고 있었는지를 몰랐고 더욱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심을 확신했기에 능히 그 난국을 주의 은혜로 타개해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당당함, 이는 곧 확신에 찬 신앙의 소산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이 닥칠 때 그 자체를 보기보다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17절).
불말과 불병거가 땅에 임재했다는 것은 이 지상의 그 어떤 군대도 천상의 군대를 물리칠 수는 없음을 가리킵니다. 
 
- 본문 13절의 <도단>은 요셉과도 관련이 있는 지명입니다. 창세기 37:17에서 확인해 보십시오.
- 적들의 말과 병거만을 본 사환의 눈과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를 보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엘리사의 눈을 비교해보십시오.
- 여호와께서 <눈을 어둡게 하셨다>는 본문 18절 말씀과 창세기 19:11 말씀을 비교해보십시오.
 
주님, 믿음의 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눈앞의 현상들만 볼 뿐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본문의 엘리사의 사환도 그랬습니다. 
아람의 군대만 볼 뿐 하늘 군대의 불말과 불병거는 보지 못하고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하며 불안해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부디 저희의 영의 눈을 여사 아람 군대보다 더 많고 더 강력한 하늘의 군대를 보며 늘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힘 빼는 기술
 
권투 고수들의 자세를 보면 힘을 빼고 유연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분의 색이나 선을 덜어낸 넉넉함, 한 색 빼기를 하여 그 간격이 만들어 내는 리듬이나 여백이 고요함을 느끼게 합니다.
협상의 자리에서도 힘으로 밀어붙이기만 하면 상대는 기에 눌려 말문을 닫아 버립니다. 물러서는 기술, 힘 빼는 기술로 적절하게 힘을 밀고 당
길 때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고수는 힘으로 상대를 누르려 하지 않습니다. 힘을 빼는 배려와 겸손함 속에서 상대를 세워줍니다.
힘을 주며 무한대 바람을 먹은 맹꽁이 배는 터지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힘주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힘을 빼고 하늘 보좌를 뒤로 한 채 이 땅에 오셨습니다. 힘을 빼신 채 낮고 헐한 영혼들을 만나고 안아 주셨습니다. 바울 사도도 힘을
빼고 유연해 질 때 더욱 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고전9:21,22)
 
“훌륭한 공예가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칼이 무엇일까? 바로 날이 무뎌져 ‘잘 들지 않는’ 칼이다. 너무 잘 드는 칼은 오히려 걸작을 만드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중략). 우키요에 화가들이 자주 사용하던 화법 중에 ‘한 색 빼기’ 라는 것이 있다. 마지막 한 가지 색만 더해주면 완성될 작품에 일부러 색을 더하지 않고 붓을 내려놓는 기법이다. 이 기법으로 그림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중략).
예로부터 밀어붙이기보다 물러서기를,더하기보다 빼는 아름다움을 미학이라고 생각해 왔다.”


우에하라 하루오 저(著) 이소영 역(譯) 「힘 빼는 기술(영림카디널, 29-3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인간을 예배하는 인간으로
인간은 예배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즉 말로 표현 할 수 없이 지극히 크신 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인간 본성의 맨 꼭대기에 있는 것은
 인간의 지성이 아니라 인간의 영(靈)이다.
인간의 영은 초자연적인 것과 관게를 맺을 수 있다. 
인간의 영은 성령의 감동에 따라 소생하여
 하늘과 의식적 교감을 나눌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으며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존재이신 
하나님을 보고 느끼고 그 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따라서 배우고 사고하는 인간을 육성하는 기관이
 인간을 예배하는 인간으로 가르쳐 준다면
 그런 기관에 더욱 감사해야 할 것이다
-A.W. 토저의 ‘예수 방향으로 가라’에서-


세상에서 많이 배우고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배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그는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는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일종의 반인(半人)입니다. 
그가 더욱 성장하려면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예배를 통해 생명을 불어 넣어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그는
 영적으로 태어나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