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봇이 죽임을 당하다 왕상 21:11-16
01월 31일 (월)
나봇이 죽임을 당하다 왕상 21:11-16
11. 그의 성읍 사람 곧 그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이 이세벨의 지시 곧 그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
12.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13. 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 14.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15.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16.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 <그의 성읍 사람 곧 그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이 이세벨의 지시 곧 그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11절).
이스라엘의 장로와 귀족들이면 당연히 백성들의 권익과 율법 준수를 위해 가장 모범적으로 처신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세벨이 율법을 악용하여 범죄를 모의하는 일에 아무런 저항도 문제제기도 없이 동조합니다. 이는 곧 아합 시대 이스라엘 사회 지도자들의 타락상을 단적으로 입증해주는 사례라 할 것입니다. <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13-14절). 열왕기하 9:26에는 이 사건과 관련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따라서 나봇이 처형당할 때 그의 아들들도 함께 죽임을 당해 그 일가가 멸절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시 나봇만 죽었다면 그 아들들이 다시 조상의 유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을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나봇을 살해하기 위한 이세벨의 음모가 외형상으로는 여호와의 율법을 준수한다는 미명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거짓 고발하게 한 것이며 금식을 선포한 것이며(12절), 두 증인의 증언 및 무리가 돌로 쳐 죽이는 처형 방식 등 모든 과정과 집행이 다 그렇습니다. 믿는 자의 생활양식이란 언제나 내재된 신앙을 담는 그릇으로서만 진정한 영적 가치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따라서 내용이 말라버린 채로 외형만의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는 곧 무엇인가에 이용당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해치는 부정적 영향을 초래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양식이라고 할 외적 표현에 상응하는 내적 신앙을 관리하는 일이야 말로 부단히 추구해야 할 모든 믿는 자들의 소중한 과제라 할 것입니다.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16절). -조상의 유업에 관한 권리를 말씀하는 민수기 16:27, 여호수아 7:24-25을 확인하신 후 본문 1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살해 음모에 성공한 후 득의만만해 하는 이세벨의 표정을 상상하시며 본문 1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죄 없는 나봇을 처형한 아합 시대의 재판을 염두에 두시며 이 시대 사법 정의에 관한 당신의 견해를 적어보십시오. 주님, 결국 이세벨의 용이 주도한 계략과 음모대로 나봇과 그의 아들들이 다 희생되었습니다. 성읍의 장로들과 귀족들이 이세벨의 편지 내용대로 나봇의 살해 음모를 집행해 아무런 장애 없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악에 대한 분별력도 자정 능력도 완전히 상실한 모습입니다. 이세벨도, 아합 왕도, 백성의 장로들과 귀족들도 여호와를 두려워하거나 의식하는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희들 아합 시대의 타락상에 경악하며 다시 한 번 믿음의 자세를 바르게 고쳐잡는 계기로 삼게 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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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혹 ‘망비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망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의 준말이라고 합니다.” 강준만 저(著) 《수렁 속에서도 별은 보이다》 (인물과 사상사, 5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돼지는 머리 후두 부분이 젖히지 못하는 특수한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 습니다. 그래서 15도 이상 고개를 들 수가 없다고 합니다. 돼지가 잘 먹는 먹이를 가지고 고개를 들게끔 유도를 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는 실험 결과도 있습니다. 이런 돼지에게 하늘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넘 어져서 뒤집어졌을 때입니다. 넘어져 뒤집힌 돼지는 하늘을 봅니다. 돼 지는 비로소 땅 뿐만이 아니라 하늘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돼지 에게는 넘어지는 경험이 새로운 세계를 보는 축복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망비보’ 망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넘비보’ 넘어지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결정적으로 변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큰 고난을 만났을 때입니 다. 이때 존재에 진동이 옵니다. 고난은 참 싫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변하지 않던 내가 결정적으로 변하는 티핑 포인트는 고난의 때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고난마저도 선용(善用)하십니다. 고난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본질을 보게 하십니다. 그러하기에 깊은 고난의 때는, 깊은 발견의 때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깊은 고난 속에 영원한 것과 헛된 것을 구별하게 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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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1장 2절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Let him kiss me with the kisses of his mouth-- for your love is more delightful than wine. song of songs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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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리더는 자신이 이 영적 싸움에서 이겨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팔로워들도 이기도록 도와야 한다. 이 과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싸움에 들어가 있는 줄도 모른 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설사 안다고 해도 상대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아니 너무 강하다. 우리는 어떻게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이재기의 [사도행전에서 리더십을 배우다] 중에서- 지혜있는 자는 싸움의 현장이 벌어지기 전에 싸움의 이유를 압니다. 싸움의 대상이 누군인지 알 때 공격하거나 방어할 무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향방없이 살아가면 우리는 세상이라는 싸움에서 날마다 실패자의 오명을 뒤집어 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사용할 때, 세상은 패배자가 됩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리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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