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가 포효할 때 암 3:1-8
01월 29일 (토)
사자가 포효할 때 암 3:1-8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3.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4.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5.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 6.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8절).
선지자 아모스의 분노는 개인적이고도 인간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 충동된 의분입니다. 선지자가 사회 정의를 외치는 것은 그만큼 신앙의 문제와 사회 문제가 서로 유리되어 있지 않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아모스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이 신앙과 정의의 관계입니다.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이 종교와 윤리를 갈라놓고 종교는 일상생활과 구별된 다른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종교는 자칫 인간과 그 세계를 부패하게 하고 추악하게 합니다. 따라서 아모스가 시종일관 규탄하는 것은 종교를 빙자하여 정의를 유린한 당시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공의가 기득권자들과 부자들에 의해 유린되는 현실에 분노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발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왕국 건설 후 1세기도 안돼 급속한 사회적 변천을 겪으며 유목생활에서 농경사회로 이행하는데, 거기서 상인들이 생겨나며 점차 경제적 계층과 함께 계급이 형성됨으로써 불평등이라는 큰 사회적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더구나 여로보암 2세 때는 문제투성이의 그 번영이 정점에 달했습니다. 바로 그때 등장한 선지자가 드고아의 목자에 불과했던 아모스 아니었습니까? 그는 오늘 본문처럼 그 부조리한 현실 한복판에 서서 맹렬히 북왕국 이스라엘의 권력자와 기득권자, 가진 자들을 공격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며 그야말로 사자처럼 포효했습니다. 오직 경제적 번영만을 구가한 당시 사회를 향해 너도나도 함부로 유린하고 있는 정의를 바로 세우고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분노를 귀담아 들으라며 사회적 부정의를 고발했습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느냐>(3-4절). 하나님과 끝까지 동행하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 공의를 실현하라고 하나님이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 엄히 말씀하실 때 바르게 듣고 응답해야 합니다.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가 고발했던 사회적 부정의와 오늘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아모스 선지자가 성토한 당시의 재판관과 권력가, 부자들과 지금 우리 사회의 기득권자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아모스 선지자처럼 이 시대의 사회악과 부조리를 고발할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주님, 사자가 포효하면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없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면 그걸 예언하지 않을 자가 없듯 저희도 그렇게 이 시대를 향해 주님의 경고와 분노를 외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아모스 선지자가 고발했던 당대 이스라엘의 부조리와 온갖 사회적 모순은 그대로 이 시대 저희 사회의 악이요 모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랜 역사가 흘렀음에도 사회악의 본질은 이렇듯 하나도 변한 게 없습니다. 여전히 <유전무죄고 무전유죄>이며 드물지 않게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기도 합니다. 부디 저희들 아모스 선지자처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하는 심정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며 부패와 모순을 고발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양심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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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분 감사
내가 게으름 부리며 허비한 20분이
또 다른 한 생명에게는 한 생애입니다. 내가 불평 불만하며 보낸 한나절이 하루살이에게는 일생입니다. 내가 맞이한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입니다. 지난 해를 감사하며 오늘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새로운 날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헛되게 보내지 않겠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8) “아침 출근길에 붐비는 지하철
막히는 도로에서 짜증날 때 20분만 먼저 나섰어도…… 날마다 후회하지만 하루에 20분 앞당기는 일이 어디 그리 쉽던가요. 가장 더운 여름날 저녁,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과 사람에 쫓기는 자동차들이 노랗게 달궈놓은 길 옆에 앉아 꽃 피는 모습 들여다보면 어스름 달빛에 찾아올 박각시나방 기다리며 봉오리 벙그는 데 17분 꽃잎 활짝 피는 데 3분 날마다 허비한 20분이 달맞이꽃에게는 한 생이었구나...” 시인 고두현의 시 「20분」의 전문(全文)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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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주님을 기뻐하라. 바울이 그랬듯이. 하나님이 이해하시는 안녕에 의거해 우리의 현재 및 영원한 안녕을 지켜 달라고 그분께 부탁하라. 그때 우리의 눈이 서서히 열리면서, 성령이 내주하시는 우리 마음이 무엇을 가장 열망하는지 깨달을 것이다. 바로 ‘이 세상이 존재하는 전부다’라고 여기는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길에 순종하려는 열망이다.
-래리 크랩의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 중에서- 주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자신을 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순종을 위해 자신을 던집니다. 우리는 순종하려는 열망이 날마다 있을 때, 구원을 향한 걸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눈앞의 이득에서 떠나 하나님의 나라를 보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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