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한국교회는 네가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외 1

鶴山 徐 仁 2021. 3. 20. 17:20

한국교회는 네가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03월 20일 (토)

 
   

한국교회는 네가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한국교회는 과거의 추억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때가 좋았어” 하면서 새롭게 추구할 미래가 없으면 

교회는 병들기 시작합니다.

  한국교회는 예수님보다 조직을 더 사랑하는 데서 깨어나야 합니다.

 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인 데 교파, 교단, 보수, 진보로 갈라서

 그것을 예수님보다 더 중요시합니다. 

한국교회는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을

 더 강조하는 데서 깨어나야 합니다. 

교회 일을 “얼마나 돈이 많이 드냐. 많이 들면 하지 마“.

 하는 식으로 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돈을 많이 써야만 한다는 생각도 잘못입니다. 

 한국교회는 세상과 타협하는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아무나 사랑하는 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를 사랑해야 하지만 

잠은 한 남자와 자야 하지 않습니까? 

-이윤재 목사의 ‘한국교회는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에서-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지만 

모든 종교를 다 믿어야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동성연애자를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모두가 동성연애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술 먹는 사람을 정죄하지 않아야 하지만 

우리가 술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주일 날 등산가고 낚시가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지만

 우리가 주일 날 낙시가고 등산가야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포용주의와 혼합주의는 다릅니다. 

교회는 부지런히 자기를 일깨워야 합니다.

 잘못하면 자기도 모르게 잘 수 있습니다. 

 늘 깨어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은 어떻게 하나

 

 

 

03월 19일 (금)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값싼 은혜’로 바꾸지 맙시다. (마태복음 18장 21-35절)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은혜’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들에게 거저 주시는 구원’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은혜가 ‘값없이’ 왔기 때문에 오해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가 오히려 특권이 되고 면죄부가 되어서 ‘나는 어떻게 살든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오해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인 ‘일만 달란트 빚지 자’의 비유는 베드로의 질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줘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 이후에 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은 은혜를 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은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감옥에 넣는 이야기입니다. 한 달란트가 육천 데나리온이며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이것을 7만원으로 잡는다면 한 달란트는 4억 2천만원이고, 일만 달란트는 4조 2천억입니다. 왜 예수님께 이렇게 황당한 액수를 말씀하셨을까? 절대로 값을 수 없는 빚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 이런 모습이 얼마나 많은지를 봐야 합니다. 도저히 값을 길이 없는 빚을 탕감 받은 우리가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향하여 정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말씀 35절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는 말씀은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이 하나님의 용서가 조건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을까? 나만 은혜 받으면 됐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일침을 가하신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본다면 우리 모두는 이 말씀 앞에 당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신 ‘값없는 은혜’에 합당하게 사는 삶의 중요한 원칙은 ‘회개’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회개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는 복음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나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먼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며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되기를 소원합니다.

 

 지금 나를 힘들에게 하는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이나 상황이 있다면,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그 사람과 상황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주님! 지금 나에게 잘못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던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분명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있는데도 알지 못했던 영적 무지함을 용서해 주시고, 오늘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로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3》기여적 정의

 

“암살 직전 행한 연설에서,마틴 루터 킹 목사는 청소 노동자들의 존

엄을 그들이 공동선에 기여하는 점에 결부시켜 이야기했다.

‘언젠가 우리 사회는 청소 노동자들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

회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죠. 따져보면 우리가 버린 쓰레기를 줍는

사람은 의사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질병이 창궐할 테니까요. 모든 노동은 존엄합니다.’”

 

마이클 샌델 저(著) 함규진 역(譯)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32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샌델교수는 능력주의가 만든 빈부격차와 불평등, 그리고 깨져버린 사

회적 연대 속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잃어버린 공동선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회복은 ‘기여적 정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샌델 교수는 로버트 케네디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애,공동체, 공동의 애국심 등 우리 문명의 이런 중대한 가치들은

(중략) 존경받는 직업 생활을 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런 직업은(중략)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직업입니다.

‘나는 이 나라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있어요. 나는 이 위대한 공적

모험의 참여자예요’라고.”

흔히들 불평등한 듯한 사회에서 경제적 정의(正義)를 논할 때 ‘분배의

정의’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샌델교수는 분배의 정의를 넘어 ‘기

여적 정의’를 말합니다. 돈을 많이 벌거나 적게 벌거나 차별 없이 모

두가 공동체의 선에 기여하고 있다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자부심이 가

득한 공동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이러한 자부심

으로 가득하였습니다. 허드렛 일처럼 보이는 일을 하면서도 주께 하듯

신실하게 사역하였으며, 이런 자부심 넘치는 작은 사역들이 쌓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갔습니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

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눅19:17)

   

야고보서 5장 13절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야고보서 5장 13절)

Is any one of you in trouble? He should pray. Is anyone happy? Let him sing songs of praise.

(James 5:13)

   

비둘기 신자, 까마귀 신자.

비둘기 신자가 있고, 까마귀 신자가 있다. 

비둘기 신자는 성령받은 신자의 모습으로 평화를 창조하고,

 순결하고, 하나님의 집에 드나들면서 은혜를 받는다.

까마귀 신자는 침침하다. 웃음이 없다.

 입을 열면 불평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은혜를 꺼버린다. 

이상한 말만 듣고 다니며 덕스럽지 못한 말로 

다른 사람의 심령을 초상집으로 만든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이중표 목사의 ‘너흰 썩지 않는 세상의 소금’에서-

 

그리스도인은 덕이 있어야 합니다. 온유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부드러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곳에 들어가든지

 맛을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의 맛은 서로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