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칼날...세게 쥐고 휘두르다 스스로를 벤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44회>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1.02.13 08:50 | 수정 2021.02.13 08:50
<문혁 시기 중공중앙의 3대 영도자. 왼쪽부터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린뱌오/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44회>
“권력은 칼날이다. 가볍게 쥐어야 한다.” 작가 복거일(卜鉅一, 1946- )의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권력자가 서슬 퍼런 칼날을 세게 잡고 난폭하게 휘두르면, 그 칼끝이 어디로 향할까? 결국 무고한 사람들의 목을 치고, 가슴을 찌르고, 팔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다. 칼을 쥔 권력자는 그 칼을 온전히 제 것이라 여기지만, 인간의 손아귀는 결코 흉포한 검(劍)의 진동을 견딜 수 없다. 역사를 돌아보면, 제멋대로 권력의 칼날을 휘두르다 스스로를 베고 파멸한 인물들이 즐비하다. 권력은 부메랑이다. 가볍게 날려야 한다.
권력은 부메랑: 몰락하는 권력자들
문혁 초기 마오쩌둥의 발밑에서 살살거리며 권력의 충견으로서 맘껏 칼날을 휘둘렀던 인물들은 어김없이 정치적 파멸에 이르렀다. 중공 서열 제2위로 급등하여 전군(全軍)을 지휘하며 승승장구하던 린뱌오(林彪, 1907-1971)는 1971년 9월 3일 일가족과 도망 중 몽골의 오지에서 비행기 추락사했다. 마오쩌둥 사후 채 한 달도 못 된 1976년 10월 4일 4인방은 전격 체포되어 이후 사형, 종신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문혁 초기 시가 퍼레이드를 하는 마오쩌둥과 린뱌오의 모습. 문혁 시기 마오의 후계자로 인식됐던 권력 서열 제2위의 린뱌오는 1971년 반란음모의 혐의를 쓰고 소련으로 망명 중 비행기 추락사한다./ 공공부문>
린뱌오나 4인방처럼 극적으로 파멸하진 않았지만, 왕리(王力, 1922-1996), 관펑(關鋒, 1919-2005), 치번위(戚本禹, 1931-2016) 역시 정치적 단명을 면치 못했다. 문혁 초기 마오의 총애를 받고 홍극(紅極)의 일시(一時)를 풍미했던 극좌권력의 핵심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마오쩌둥 사상의 대변인들로서 날마다 펜과 입을 놀려댔다. 세간에선 이들 세 명을 “문혁 3대 필간자(筆杆子, 붓대)”라 불렀다. “5.16통보,” “문혁 16조” 등 문혁 초기 모든 강령성의 문건들이 이들의 손에 쥐어진 붓대로 작성됐기 때문이었다.
문혁 초기 마오쩌둥은 이 세 명을 정치선동의 첨병으로 내세워 성난 군중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미 <39회>에서 살펴봤듯 1967년 4월 1일 <<인민일보>>1면에 실린 치번위의 “애국이냐, 매국이냐?”는 홍위병이 류샤오치를 공격하는 이념의 흉기로 쓰였다. 놀랍게도 마오쩌둥은 느닷없이 이 세 명의 충성스런 마오주의 극좌 선동가들을 정계에서 축출하는 계획을 세웠다. 1967년 8월부터 이 세 명은 격리(隔離) 상태에서 잔혹한 심사(審査)를 받아야만 했다. 이듬해 1월부터 그들은 차례차례 정치범 수용으로 악명 높았던 베이징 창핑(昌平)의 친청(秦城) 감옥에 수감됐다.
중국의 역사학자 푸웨이화(卜偉華, 1950- )의 표현을 빌면, 이들은 “무산계급 사령부의 상방보검(尙方寶劍, 절대 권력의 상징)을 휘두르며 전국에 큰 호령했던” 당대의 권력자들이었다.
“호랑이의 위세를 훔친 여우처럼 (狐假虎威)
미친 듯이 망령스레 만행을 저지르고 (狂妄蠻橫)
턱짓으로 지시하고 기세로 [하인들을] 부리며 (頤指氣使)
그 시대 모두를 업신여겼지! (不可一世)”
권력의 칼자루를 쥐고 휘두를 땐, 그들은 전혀 몰랐던 듯하다. 서슬 퍼런 권력의 칼날이 자신들의 목덜미에 꽂히는 부메랑이었음을. 왕·관·치 3인의 몰락은 문혁의 전 과정에서 가장 기묘하고도 난해한 정국 전환의 신호탄이었다.
<아홉 명 중 맨 중간에 선 마오쩌둥 우측으로 치번위, 왕리, 관펑, 무친. 마오쩌둥 좌측으로 야오원위안, 저우언라이, 장칭, 장춘차오/ 공공부문>
문혁은 정부의 대민 테러였다
문화혁명은 흔히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혁명군중이 부패 관원(官員)을 바로잡는 “민정관(民整官)”의 드라마로 묘사되곤 한다. 중국의 비판언론인 양지성(楊繼繩, 1940- )의 관찰에 따르면, 이는 중공 관변학자들이 만들어낸 착시의 효과일 뿐이다. 문혁은 본질적으로 관원이 인민을 때려잡는 “관정민”(官整民)의 정치탄압이었다. 홍위병과 조반파 노동조직이 맘대로 날뛰며 “주자파 " 색출의 미명아래 정·관·학계의 권력자들을 단죄하던 기간은 기껏 1년 남짓이었다. 그 이후 문혁은 정부가 군중을 감금, 취조, 고문, 모욕, 타살하는 정치적 잔해(殘害)의 과정이었다.
문혁 전 과정에선 크게 세 차례의 거대한 정치탄압이 일어났다. 1) 1천만 명을 조사해 10만을 죽음으로 내몬 “5.16반혁명집단” 사건 (1967년 8월-1972년 말), 2) 3000만-3600만 명을 박해하고 그중 75만-150만 명을 학살한 “청리(淸理) 계급대오”(1968년 초-1970년 초), 3) 최대 20만 명을 희생한 “일타삼반(一打三反)” 사건 (1970년 1년간)을 꼽을 수 있다. 문혁의 미망과 정치투쟁의 야만을 들춰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 사건을 집중적으로 돌아볼 수밖에 없다.
문혁 시기 정치 숙청 중에서 “청사 5.16운동”은 최장시간 광범위하게 진행된 정치운동이었다. 1967년 8월 시작된 청사 5.16운동은 1970-1971년 고조기를 거쳐 1972년 실질적으로 끝이 나지만, 그 여파는 1976년까지 이어졌다. 1천만 명이상이 조사를 받아 10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광적인 정치몰이였다.
수십 년간 문화혁명을 탐구해 온 중공 중앙당교(中央黨校)의 진춘밍(金春明) 교수는 이 사건이야 말로 문혁 최대의 미스테리라 말한다. 마오쩌둥은 왜 갑자기 그토록 지지하고 성원했던 조반파 혁명군중을 극좌 맹동(盲動)주의 반혁명분자로 몰아 단죄하기 시작했을까? 1980년대부터 심층 연구를 위해서 진교수는 국가문서의 열람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다. 국가기밀이 풀리기 전까진 확실한 내막을 알 순 없지만, 이 사건은 바로 <43회>에서 다뤘던 베이징 영국대사관 방화사건의 뒤처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 시작은 왕·관·치 세 명의 숙청이었다.
<1966년 11월 23일, 공자(孔子)의 고향 산둥성 취푸(曲阜)에서 공묘(孔廟)의 문물을 파괴하는 홍위병과 조반파(造反派)의 모습. 불태우는 현판에는 공자를 기리는 문구 “만세사표(萬世師表)”가 적혀 있다/ 공공부문>
“저우언라이는 마오의 명령 수행하는 노예”
<39회>에서 보았듯 1967년 7월 14일 마오쩌둥은 새벽 3시 반 열차를 타고 우한으로 향했다. 마오는 두 달 지나 9월 23일에 귀경했다. 마오가 베이징을 비운 두 달 사이 저우언라이는 살얼음판을 걷는 긴장 속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무정부적 혼란을 수습해야 했다. 1966년 12월 말 마오쩌둥이 예감했듯 1967년은 천하대란(天下大亂)의 연속이었다.
그간의 사태를 되짚어 보면, 1월 초 상하이 노동자들이 일어나 시정부를 무너뜨리는 상하이 코뮌을 수립했다. “상하이 1월 혁명”은 전국에 탈권(奪權, 권력탈취)의 광열을 확산시켰다. 노동자·농민 계급이 가세하면서 문화혁명은 무장집단의 충돌로 확전됐다. 비상사태의 수습을 위해 마오쩌둥은 즉각 “인민해방군”을 투입시켜 군부의 지휘 아래 혁명위원회를 건립하려 했지만, 군부의 개입은 오히려 혁명군중의 군사화를 촉진했다.
그해 여름 후베이의 우한에서는 기관총, 수류탄, 장갑차로 무장한 혁명군중이 조반파(造反派)와 보황파(保皇派, 보수파)로 양분되어 실제적인 내전에 돌입했다. 정치혼란은 당연히 경제대란으로 이어졌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신경제 개혁 아래서 활기를 되찾던 국민경제는 곧 후퇴하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경제질서가 무너져 내렸다. 교통, 운수(運輸)가 막혀버렸다. 특히 수도와 남방을 잇는 장거리 철도 운항은 마비상태였다.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는 중공중앙 공식서열 3위의 권력자였지만, “황제(皇帝)” 마오쩌둥 앞에선 심복(心腹) 형의 비서관일 뿐이었다. 마오쩌둥이 즉흥적으로 큰일을 저지르면, 뒷수습은 언제나 저우언라이의 몫이었다. 마오의 주치의 리즈수이에 의하면,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명령을 맹종하는 “노예”였다. “많은 사람들이 저우총리가 인민을 보호했던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가 취한 조치는 모두 마오의 명령일 뿐이었다.”
장칭 “저우언라이, 나 아니었으면 당신은 벌써 타도됐어!”
수도에선 단 하루도 바람 자는 순간이 없었다. 중공중앙의 핵심 기관이 밀집된 베이징의 중난하이(中南海)는 이미 류샤오치의 타도를 외치는 수많은 조반파 혁명군중에 겹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수도 베이징은 실제적인 무정부의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43회>에서 살펴봤듯 8월 22일 홍위병들은 영국 대사관으로 쳐들어가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된 홍위병의 영국대사관 방화사건은 중공중앙엔 커다란 압박이 아닐 수 없었다. 저우언라이는 영국대사관에 대한 홍위병의 최후통첩에 승인을 했던 장본이었다. 중국정부는 미증유의 외국공산 테러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유보하고 있었다. 책임자 처벌도 공식 사과도 없었지만, 저우언라이는 당시 중국을 찾은 외빈(外賓)에게 사적으로 큰 유감을 표하기도 했었다. 그로선 외교부까지 닥친 탈권의 광풍을 방치할 수 없었다.
<장칭과 저우언라이. 중앙문혁소조의 핵심 인물이었던 장칭은 내부 회의에서 저우언라이를 노골적으로 압박하며 모욕을 주곤 했다./ 공공부분>
중앙문혁의 팽두회(碰頭會, 수뇌회의)에 참가했던 공군(空軍)사령관 우파센(吳法憲, 1915-2004)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저우언라이는 늘 우울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은 저우언라이를 몰아세우며 험구를 마구 놀렸다. “당신 저우언라이, 절대로 잊지 마! 내가 감싸주지 않았으면 당신은 벌써 타도됐어!” 그런 모욕에 시달리면서도 저우언라이는 인욕(忍辱)의 시간을 보내며 자구책을 마련했다.
저우언라이는 조반파 혁명군중 앞에서 왕리가 행한 8월 7일 연설을 정국(政局) 전환의 시발점으로 삼았다. 왕리가 조반파 혁명군중을 교사해서 영국대사관 방화사건을 일으킨 배후의 검은 세력이라는 시나리오였다. 저우언라이가 작성한 시나리오의 초안은 상하이에 체류 중인 마오쩌둥과의 은밀한 교신을 통해 치밀하게 짜여졌다. 이로부터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를 내세워 조반파 혁명군중의 “좌파 맹동(盲動)주의”를 척결하는 대규모 정치숙청의 돌개바람이 일었다. <계속>
#송재윤의 슬픈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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