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사울이 죽은 후(삼하 1:1-10)

鶴山 徐 仁 2021. 1. 12. 08:39

사울이 죽은 후(삼하 1:1-10)

 

 

01월 12일 (화)

   

사울이 죽은 후(삼하 1:1-10)


1.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2. 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3. 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
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5. 다윗이 자기에게 알리는 청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6. 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7. 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8.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9. 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10.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1절).

사무엘상과 하를 이어주는 의미 있는 구절입니다. 

폭군이었던 사울 왕의 시대와 성군 다윗 왕의 시대가 명확히 구분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어두운 밤이 마침내 끝나고 새벽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저 유명한 전도서 3장의 말씀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으며 ...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맞습니다. 때를 제대로 분별할 줄 안다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당황스러워 하거나 실수하는 일도 그리 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깨달음이 성숙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 그 미래를 스스로 어둡게 만들고 맙니다. 우리 인간은 항상 어리석어 시간의 겉모습만을 볼 뿐 그 내면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읽어내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실수를 거듭하고 또 다시 잘못이라는 덫에 걸리곤 합니다. 

 

새해가 시작됐습니다. 서양의 단선적인 시간 개념과는 달리 우리 동양에서는 시간의 고유한 표정과 그 빛깔까지도 주목합니다. 여기에는 각 사람마다 자기의 고유한 시간이 담고 있는 개성을 그 생명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믿음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 때>고 이런 땐 <무엇을 해야 올바른가>하는 문제의식을 가지는 일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는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있고 각기 제 나름의 때가 있으며 또 그 때라는 것이 시의적절해야 아름답다는 깨달음에서 온 것입니다. 그것은  때를 분별할 줄 아는 혜안을 가지는 것이 지혜의 첩경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정초에 점치고 토정비결을 보는 것과 같은 미신적 관습으로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시간의 당당한 주인이 되기보다는 운명에 굴종하는 노예가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이제 한 시대의 주역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다윗 앞에 나타난 <아말렉 사람>(8절)의 정체는?

-옛 이스라엘의 지도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이 죽은 길보아산(6절)을 확인해 보십시오.

-당신은 동서양의 시간 이해에 있어서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 그렇습니다. 이제 사울의 시대가 가고 다윗의 시대가 왔습니다. 쫓기고 피신하며 때만 기다린 다윗 앞에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저희는 항상 때에 대한 판단과 이해가 부족해 일을 망치고 아픔을 겪는데 다윗은 진중하게 인내하며 때를 기다려 이제 자신의 시간에 이르렀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만사에 때가 있음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고, 그 시간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도 실패하지 않도록 성령으로 역사해 주시옵소서.

 
   

종자기는 될 수 있습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금을 부수고 줄을 끊고 죽을 때까지 다시 금을

타지 않았다. 세상에 족히 다시 금을 타서 들려줄 이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준연 저(著) 《세상을 움직이는 네 글자》 (궁리, 218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중국 춘추시대에 거문고의 대가 ‘백아’와 그의 친구 ‘종자기’가

있었습니다. 백아가 태산을 노니는 느낌을 담아 연주하면 종자기는

“훌륭한 연주입니다. 높디 높은 것이 태산과 같습니다. ”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백아가 흐르는 물을 생각하고 연주하면, “훌륭한 연주입니

다. 출렁거리는 것이 흐르는 물 같습니다.”며 극찬했습니다.  

백아는 종자기를 자기 소리를 알아주는 친구라는 뜻으로 ‘지음(知音)’

이라 했습니다. 그랬던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으며 다

시는 연주를 하지 않았습니다. 연주를 제대로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생

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백아절현(伯牙絶絃)입니다.

백아처럼 천재가 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는 칭찬해

주고 축복해주는 종자기가 될 수는 있습니다.

“명창(名唱)은 귀명창이 있어야 명창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귀명창이라 함은, 소리 중간에‘얼쑤’추임새를 넣어 기운을 북돋아

주고, 축복해 주는 사람입니다.

침례(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배경이 되어주고 들러리가 되어주는 기쁨

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요한을 가리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빛내는 배경이 되면서도 넘

치는 기쁨.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역설적인 하늘의 기쁨입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3:29)

   

로마서 12장 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Rejoice with those who rejoice; mourn with those who mourn. Romans 12:15  

   

우리를 ‘섬기는 자’로 부르신다

사실 기독교 신자들의 현실을 보면

우리는 자신이 원치 않는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는, 내 인생이 보다 쓸모 있어야 된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쓰시지 않으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세상적으로 보이는 영향력이나, 

지위를 갖도록 부르지 않으시고,

‘섬기는 자’로 부르셨다.

-박영선 목사의 ‘환란을 당하는 것이 섬기는 길이다’에서-

 

그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이고,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길입니다.

종이란 그렇습니다.

진짜 종은 자기에게 일관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관된 일을 원합니다. 

일관된 생각과 목적과 내용은 주인의 몫이고,

하인은 그때마다 불러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종은 무슨 자기 꿈을 실현하고,

 기개를 보일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그런 자책을 하며 당황하지 마십시오.

종은 그렇게 사는 것이고 

오늘의 성도의 삶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