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조폭정치에 짓밟힌 민주주의
[중앙선데이] 입력 2020.12.19 00:30 | 716호 31면 지면보기
‘대의민주주의의 종언’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었다. 광우병 파동으로 촛불시위가 뜨겁던 2008년이었다. 그해 여름 이 땅에 대의민주주의는 없었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이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웠다. 역시 공포에 질린 대통령은 컨테이너 산성을 쌓고 청와대 뒷산으로 피신했다. 그 사이에서 국민을 대표해야 할 국회의원들은 자기 의무를 내팽개쳤다. 그때 이렇게 썼었다.
행동대장이 나서 칼 휘두르고
졸개들이 개떼처럼 달려들어
숨었던 보스가 정의실현 외쳐
민주주의는 빈사 상태 빠졌다
“대표들도 유권자들의 마음을 읽으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인수위 때부터 거듭된 경고음에 대통령은 귀를 막았다. 집권당은 그런 대통령의 눈치만 살폈고 청와대 입장만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야당은 아예 거리로 나섰다. 국민의 분노를 실지(失地) 회복의 기회로만 여겼다. 슬그머니 촛불 대열에 끼어들었지만 따가운 눈총 말고 다른 건 얻지 못했다.”
국민의 분노가 광우병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알면서도, 여당 의원들은 촛불 시민의 마음을 대통령에게 전하지 않았다. 미국산 소고기가 인간광우병을 유발한다는 게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야당 의원들은 국민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여든 야든 국민대표들의 안중엔 국민 아닌 ‘나와 내 편’만 있었다.
그때 여당 의원들이 국민대표임을 자각했다면 국민 손에 또다시 촛불이 들리는 일은 없었을 테고, 야당 의원들이 국민대표로 행동했다면 정권을 손에 쥐기 위해 4년을 더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터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국민은 결국 다시 거리로 나서야 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졌고, 야당이 언감생심 권력을 줍다시피 했다.
대한민국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국민에게 그런 큰 상처를 입히고도 선량들은 여전히 국민을 대표할 뜻이 없었다. 여야 자리만 바뀌었을 뿐 어느 쪽도 달라진 건 없었다. 아니, 더 악화되고 노골화됐다. 대의민주주의는 이제 연명 치료도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선데이칼럼 12/19
야당 의원들은 현 정부의 거듭되는 실정(失政)에도 유권자들이 자신들을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를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석 자로 늘어진 제 코 챙기기에만 급급했다. 세상을 이렇게 만든 두 전직 대통령의 과오를 사과하는 것조차 생각을 합치지 못했다. 그렇게 국민 마음에서 멀어져 갔다.
180석 철옹성을 쌓아 올린 여권 의원들은 제가 잘나서 몰표를 얻은 양 기고만장했다. 비례 초선들조차 큰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우쭐댔다. 국민 속을 뒤집어놓는 망언·망발을 일삼았다. 국민의 대표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 듯했다. 스스로 정권의 홍위병 제복을 찾아 입었다. 정권이 가리키는 쪽을 향해 맹견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이제 정권은 거칠 게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루어졌다. 수많은 악법이 마구잡이로 개정, 통과됐다.
국제사회조차 우려의 목소리를 낼 정도로 인권을 무시하고 징벌이 과한 ‘대북전단금지법’이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제 북한을 향해 김정은을 욕하는 글이 쓰인 종이로 비행기만 접어 날려도 징역 3년형을 받을 수도 있다.
‘5·18 왜곡처벌법’은 한술 더 뜬다. 5·18민주화운동을 부인·비방·왜곡·날조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출판과 전시, 공연은 물론 토론회와 가두연설도 적용 대상이다. 정부가 규정한 5·18의 성격에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말하면 감방에 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압권은 개정된 공수처법이다. 공수처를 만드는 건 좋은데, 요리조리 바꿔서 권력형 괴물을 만들어버렸다. 공수처장과 공수처 검사, 수사관을 모조리 대통령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채울 수 있게 했다. “공수처=비리은폐처” “문재인 대통령 퇴임 후 보장 보험 가입 완료”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검찰은 물론 대법원과 경찰까지 우려를 표하는데도 막무가내다. 정권의 홍위병들이 공수처 검사 임기를 7년으로 늘리려던 시도가 실패한 것만으로 위안으로 삼아야 할 지경이다. 혹시나 정권이 바뀔 때를 대비한 사악한 시도 말이다.
국민의 대표가 되기를 거부한 국회의원들이 이제 대의민주주의의 종언을 넘어 민주주의 자체를 훼손하고 파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게 독재 아니면 뭐가 독재인가. 유신 때도 5공화국 때도 독재는 늘 입법에서 출발한 합법의 얼굴을 했었다. (심지어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독재도 그랬다.)
먼저 칼럼에서는 실업 위기에 몰린 정치권을 걱정했었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의 예견대로 “미래사회에서 정치인이란 직업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이대로 가면 정치인은 실업자 아닌 범죄자가 될 것 같아 보인다. 그것도 자기 패거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조직폭력집단이다.
이미 검찰총장의 징계 강행을 통해 정치의 조직폭력화를 우리는 목격했다. 보스는 뒤에 숨고 배신자 처단을 명령받은 행동대장이 망나니처럼 칼을 휘두르면 졸개들이 개떼처럼 몰려와 공격하는 걸 말이다. 그러고 나서 보스가 나타나 “정의가 실현됐다”고 말하는 장면, 조폭영화에서 많이 보지 않았나.
무솔리니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는 말했다. “폭력은 도덕적이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48년 걸려서도 안 되던 일을 겨우 이틀 만에 해치웠기 때문이다.” 그의 발밑에는 민주주의의 송장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빈사 상태의 민주주의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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