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국경 밖은 못 보는 좌파
파리=손진석 특파원
입력 2020.12.17 03:00
2013년 펴낸 '21세기 자본'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
‘21세기 자본’이란 책으로 스타 학자가 된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를 지난여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기본소득으로는 어림없다고 강조했다. 모든 젊은이에게 25세가 되면 나라가 억대의 기본자산을 지급하자는 해법을 제시했다. 재원은 부유세를 무겁게 물리면 끌어올 수 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피케티는 어떤 공격이 들어오는지 잘 아는 듯했다. 부유세가 과도하면 부자와 기업이 해외로 도피하고, 그로 인한 투자·고용의 부진으로 저소득층에 피해가 돌아가게 마련이다. 실제 프랑스는 직전 사회당 정부가 우격다짐으로 부유세를 강행하다 경기 침체를 불렀다. 정권을 잃은 이유 중 하나였다.
피케티가 방어용으로 내세운 비책은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국적이탈세(Exit tax)’의 도입이다. 그는 도망가려는 부자를 모든 나라가 함께 세금으로 저지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나름 고민했겠지만 헛웃음만 나왔다. 수많은 나라가 ‘세금 담합’을 해야 한다는 얘긴데,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전 지구적으로 치열한 세금 인하 경쟁이 벌어지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불과 2~3개 기업의 가격 담합도 어느 한 곳의 배신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물며 많은 나라의 세제(稅制) 통일이 가능할까.
좌파는 세상이 단순하길 바란다. 강자와 약자, 선과 악으로 명료하게 나뉘어야 한다. 그래야 ‘착취’하는 이를 응징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구호가 먹혀들어가기 편리하다. 이런 흑백 프리즘으로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의 갖가지 이슈를 단순하게 재단하는 버릇이 있으니 헛발질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집은 살아가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거래하는 상품이지만 좌파는 거주 공간으로만 인식하려 든다. 그런 외눈으로 집을 둘러싼 정책을 주무르다가 시장의 역공을 받아 허우적대는 것 아닌가. 좌파에게 기업은 근로자의 고혈을 빠는 악한 존재로만 머물러야 편리하다. 일자리를 제공하는 고용주, 수출에 앞장서는 국가대표, 해외 투기 자본의 경영권 공격을 받는 피해자 같은 다른 면모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그래도 피케티를 비롯한 유럽의 좌파는 한국의 좌파보다는 생각의 범위가 넓다. ‘국경’이라는 변수를 놓고 고민이라도 하니까 그렇다. 한국의 운동권 정치 세력은 나라 안에서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단순 구도에 함몰돼 있다. 국경을 넘나드는 복잡한 이해관계는 모르거나 알아도 못 본 척한다.
한국의 집권당이 이번에 통과시킨 갖가지 기업 규제법은 ‘한국 자본의 해외 이탈’과 ‘해외 자본의 한국 기피’라는 자해를 유발하는 양날의 흉기를 장착하고 있다. 결국 모든 국민이 직간접적인 피해자가 된다. 한국의 운동권 정치인들은 오랫동안 ‘정의의 사도’를 자처했다. 하지만 우물 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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