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환경 위기의 원인(창3:17-21 )

鶴山 徐 仁 2020. 3. 24.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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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월 2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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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환경 위기의 원인(창3:17-21 )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본문 해석

남태평양의 섬나라 투발로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파괴를 한적이 없지만, 앞으로 30년 후면 해수면의 상승으로 나라가 잠기게 된답니다. 환경오염의 대가가 얼마나 엄청난가를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전 세계가 이 나라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환경문제로 오존층이 파괴되고, 북극의 만년설이 녹아내림으로 전 세계에 태풍과 가뭄, 해일과 폭우 등의 이상 기후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변화의 과정에서 정부의 개발지상주의와 행정 관료들의 무책임으로 경기도 시화호와 같은 환경재앙을 불어온 것입니다. 특히 서울의 환경지수는 심각한 정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대기오염도는 최악의 후진국의 오명을 쓴 멕시코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오늘날 인류가 겪고 있는 환경 위기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이 당위에 생존하는 생명체들의 생존을 위협하게 되었고, 동시에 스스로 멸망과 파국을 재촉하게 되었을까요? 한경 위기는 죄로 말미암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덴에서 인간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땅마저 저주를 받았던 것입니다(17-18). 

다시 말해 아름다운 하나님의 피조물인 하늘과 땅이 이제 인간에게 적대적인 관계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이제 욕심에 따라 마구 자연을 훼손하게 됩니다. 인간과 환경은 서로 원수가 되고 만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땅은 저주를 받아 인간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습니다. 인간의 욕심이 자연마저 훼손시킨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어 이제 거친 땅을 갈아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집니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는 자연의 대재앙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환경에 대해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이제 자연과도 원수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죄악이 온 지면을 덮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 된 인간뿐 아니라 지면과 동물까지도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죄로 땅이 저주받았듯이 인간의 죄악이 극에 달하므로 모든 피조물 역시 심판에 처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무서운 결과였습니다. 대홍수는 인간의 타락과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단이 바로 홍수, 곧 환경의 재앙이었습니다. 홍수는 그러므로 인간의 탐욕과 죄에 대한 자연의 복수인 셈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면 자연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환경문제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환경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기독교 창조 신앙을 정립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연을 무시하는 종교가 아니라 자연의 창조를 신앙의 중심에 놓는 종교입니다(창1:1). 기독교의 구원은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육체를 포함한 모든 자연을 대상으로 합니다(롬8:19-21). 기독교의 구원은 전 우주적인 구원이며, 창조와 새 창조의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전부입니다. 

결단과 적용

- 환경 회복을 위해 인간과 자연을 동반자로 생각하는 세계관을 정립하십시다. 

- 나는 창조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점검하고, 사도신경의 첫 부분을 고백해 보십시다.

- 나는 편리주의와 과도한 소비주의로 환경오염의 원인자가 아닌지 살펴보십시다. 

오늘의 기도

영광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만물을 파괴하고 오염시킨 무지함을 용서하옵소서. 욕심을 이기게 하시고 자연과 함께 동반자적인 자세로 환경 회복을 위해 청지기적 삶을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인문학 큐티더 보기
사람들이 이단(異端)에 속으면서도
인문학 나눔

“전 재산을 날리고도 주위 사람들에게 연민의 눈길까지 보낸 신도들이,

만약 교주가 틀렸다거나 사기를 쳤다고 난동을 부린다면 자신들의 

존재자체가 부정되고 만다.  그래서 자신들의 신앙심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것이 인지부조화다.”

 

이영직 저(著) 《행동 뒤에 숨은 심리학》 (스마트 비진스, 16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사람들은 한번 받아들인 믿음에 반하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면 

그 믿음을 고치기 보다는 그 증거를 부인함으로써 부조화를 없애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면 이는 자신의 존재마저 

들릴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것을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이론이라고 합니다.

 

“195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사례다.  한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중대

발표를 했다.

‘모월 모일에 큰 홍수가 나고,인류가 종말을 고할 것이다.  

그러나믿음이 깊은 성도들은 비행접시가 와서 구출할 것이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직장을 퇴직하여 퇴직금을 바치고, 

재산을 정리하여 헌금으로 바쳤다(중략).  마침 종말의 날이 다가왔다.  

비도 내리지 않았고 비행접시도 뜨지 않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릴 즈음에 교주가 나타났다.  그는 이렇게 소리쳤다.

‘여러분의 믿음이 너무 신실해서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는 대신 

류를 구원한 것입니다!’

전 재산을 바친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놀랍게도 축제를 열어

기뻐했으며, 믿음이 더욱 강해졌다.  논리적이라면 ‘교주가 틀렸다’고

해야지만, 이들은 논리적인 결론 대신에 자신들의 신앙심이 강해서 

나님이 심판을 미루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160-161쪽)

 

사이비교주의 사기성 발언에 속아 전 재산을 날린 신도들이, 만약 교

주가 틀렸다거나 사기를 쳤다고 난동을 부린다면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고 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거짓 신앙심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이러한 인지부조화는 불합리한 사고도 이성적인 사고로

믿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단(異端)에 가장 큰 이유는 악한

영(靈)에게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단은 사회심리적인 차원을 넘어선

영의 세계입니다.   악한 영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아무리 현명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악한 영의 모략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깨어 근신하며 예배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독 메시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5:8)

그림 큐티더 보기
잠언 18장 14절
고린도전서 15:10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A man's spirit sustains him in sickness,

but a crushed spirit who can bear?(NIV)

도서 큐티더 보기
가까이에 바짝 붙어서 따라가야

어려운 일이 주어지게 되면 

도망갈 길을 만들어 놓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온전히 주님을 따라 갈 수가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고 했다(눅9:62).

 사단도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단은 예수님을 따라가긴 따라가되

 멀찍이서 따라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움이 생기게 되면

 신앙생활을, 즉 주님 섬기는 것을 포기하라고 

우리를 유혹한다. 

사단이 노리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가되 

멀찍이서 따라가는 사람이란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호준 목사의 ‘실패에서 일어나라’에서-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굳건히 하면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때 

가까이에 바짝 붙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 

뒤로 돌아갈 여지를 남겨 둔 채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는 

멀리서가 아니라 가까이에서 

주님을 섬기는 성도님들이 되십시오.

늘 예수님 가까이 동행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님이 되시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