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여정의 초반부터,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전체적 삶, 일생을 모두 다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는 가름하기가 참 어려운 터이지만, 저마다 누구나 긴 세월을 사노라면 저절로 각자 나름대로 삶의 참맛을 깨닫게 되고 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일괄적으로,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정도(正道), 즉, 올바르게 산다는 것에 대하여 표준형이라는 걸 만들어서,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원안은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인간 사회에서는 현재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각기 다른 지역마다 그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공감하는 범주의 정상적인 삶의 틀을 가령 50% 정도로 간주한다고 가정하는 경우,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긍정적으로 수렴하면서 그들이 속한 사회의 공민(公民)으로서, 모두가 준수하기를 바라는 도덕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 규범 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각 개인의 생각에 기초하여 스스로 만들어 가는 틀 가운데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일생이라는 삶의 철리(哲理)를 일찍부터 모두 다 알고 있지만, 오래전에 매스로우가 발표한 예를 보더라도 사람은 저마다의 욕구가 끝없이 너무 강하게 발동하기 때문에 한정된 삶의 여정 가운데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무한대의 욕구 충족을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다가 보면 어느덧 인생은 황혼기에 접어들게 되고 종말을 맞게 된다.
물론, 젊은이에게는 아직까지 살아보지 못한,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너무 멀다고만 느껴지는 불특정한 다가올 미래의 자신을 미리 생각해 보라고 하는 건 무리한 것일 수도 있고, 실상을 예단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수도 있을 테지만, 늙어서 젊은 세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의 녹화된 영상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서 자신도 저 시절에는 저런 모습으로 살았었지 하는 단면을 많이 회고하게 될 것이다.
한참을 살아보면, 모든 사람이 다들 저절로 깨닫게 되지만, 남들보다 더 부유하게,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자로, 좀 더 특별하게 살아가는 것을 추구하거나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평범하게, 보통의 사람, 범인으로 살아가는 삶이 진짜 행복한 세상살이라는 것을 인생 여정에서 상당히 오랜 세월을 보낸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을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스스로 확인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 사회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수호하고자 하는 보수 우파와 종북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자칭 진보세력이라고 하는 좌익 패거리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국민 간에도 어느 집단을 선호하는가에 따라서 서로 이념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는 가운데, 현 정권은 국민과 반대 이념을 추구하는 집단의 거센 반발을 짓밟으면서, 그들이 꾸준하게 조직적으로 추진해온 종북좌익 패거리들은 모든 전력을 정비하여 최종적으로 그들이 염원하는 새로운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고자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과연, 이들이 먼 훗날 황혼기에 들어서도 자신들의 행동이 정의롭고, 흠결이 없이 옳았다고 회고하면서 흡족하게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인지를 유추해 본다면, 아마, 허탈감만 느껴질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범부로 살면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평범하게 살아온 입장에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감언이설과 권모술수를 일상의 무기로 삼아 온갖 선전선동과 흑색선전을 동원하여, 서로 간 이념이 다른 집단을 헐뜯으며, 살아온 결과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이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회고해 보게 된다면, 자신들이 살아온 지난 세월을 어떻게 평가하고,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인가를 상상해 보게 된다.
성격파탄자처럼, 이중인격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인면수심(人面獸心)도 부정할 수 없는 삶으로, 재물을 축적하고, 권력과 명예를 거머쥐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살아가는 게 그래도 행복한 삶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길게 살다가 보니, 그냥, 보통의 수준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이 진짜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
물론, 평범한 삶의 행복을 깨닫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는, 반드시, 독선과 아집을 버리고, 수분(守分)을 알아야만 한다. 말처럼, 쉬운 문제는 아니라고들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빈번하게 전개되고 있는 각종 사건, 그 가운데서도 정치꾼들의 싸움판을 보게 되면, 간접적으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인간 일생의 삶 속에서, 가장 기저(基底)가 되어야 할 것은, 누가 뭐라고, 충동질을 하거나 강압적으로 유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 가장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고희를 지난지도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아주 어린 시절인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 들었던 얘기가 자신에게 각인되어 있는 가운데 한 가지가 있으니, '함께 무리를 지어서 걷다가 한 사람이 갑자기 어디론가 달려가게 되면, 미국인의 경우에는 저 사람이 왜 갑자기 뛰느냐고 묻는 것이 우선인데 반해서, 한국인은 우선 먼저 달리는 사람과 함께 달리다가 왜 뛰느냐고 뛰는 이유를 묻는다는 얘기다'. 조용한 시간에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날도 여전히 한국인은 이와 같은 속성을 보여주고 있기에 이웃 나라 일본인은 한국인을 냄비 건성으로 폄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과연, 자신은 보편적 도덕적 기준으로 냉정하게 평가해 볼 경우, 정녕,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를 자문자답해 볼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정신없이 세상살이를 오랫 동안 하다가 어느 때 한번 자신을 직시하게 될 경우, 젊음이 사라진 자신의 모습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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