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06.23 03:13
강천석 칼럼
안보·외교 정책, '意圖하지 않은 결과'가 나라 운명 바꿔
대통령이 먼저 걱정하고 앞서 고민해야 국민이 平安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됐다. 6월 12일엔 트럼프 대통령과 3월 25일·5월 7일·6월 19일엔 시진핑 국가주석과 회담했다. 푸틴 대통령과 회담이 잡혀 있고 아베 총리도 공개적으로 회담을 제의했다. 김정은이 '내가 역사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할 만하다. 문재인 대통령·트럼프·시진핑 역시 저마다 '내가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모든 정책은 '의도(意圖)했던 결과'와 함께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만들어낸다. '의도하지 않았던 정책의 결과'는 수비진 몸에 맞고 방향을 틀어 골문으로 날아오는 축구공처럼 막아내기 어렵다. 외교정책의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는 때로 나라의 운명과 세계의 모습을 바꾼다. 닉슨-키신저 팀의 목표는 소련과 중국 사이 틈을 벌려 냉전(冷戰) 상대국 소련을 약화시키고 베트남전(戰) 수렁에서 발을 빼는 것이었다. 목표는 100% 달성됐다. 닉슨을 그토록 싫어했던 진보파조차도 이 순간만은 닉슨을 응원했다.
닉슨은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자신의 연설문을 작성하다 뉴욕타임스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옛 부하에게 불안감을 털어놨다. '우리가 (소련 대신에) 더 큰 괴물(怪物)을 만든 건지도 모르겠네….' 닉슨은 살아서 자신의 불길한 예감(豫感)이 적중하는 걸 봤다. 냉전 시기(1945~1990) 소련 경제력은 미국의 50% 수준이었다. 미국이 중국이 갇혀 있던 우리의 자물쇠를 따주고 10여 년이 흐른 1985년 중국 GDP는 미국의 7% 수준이었다. 그것이 2015년에는 61%가 됐다. 향후 중국이 6% 미국이 2% 성장을 계속한다면 2030년 전후 미·중 경제 역전(逆轉)이 이뤄진다.
국가 최고 지도자는 국가 안보 정책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대한 최종 수비수(守備手)가 돼야 한다. 골키퍼가 관중석의 환호에 함께 들떠선 곤란하다. 여론은 관중이다. 미국 국민을 상대로 '국가 예산 중 가장 비중(比重)이 높은 부문'을 물었다. 41%가 대외(對外) 원조를 꼽았다. 대외원조는 실제론 미국 예산의 1.2% 수준이다. 이런 미국인들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한국이라고 크게 다를까.
김정은은 며칠 전 시진핑 앞에서 '조·중(朝中) 관계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특별 관계로 발전했다'고 했다. 지금 한·미 동맹은 어떤 상태인가. 싱가포르에서 트럼프는 미국 국익(國益), 김정은은 북한 국익을 대변했다. 자리에 없는 한국 국익을 대변해 줄 만큼 트럼프와 김정은은 후(厚)하지 않다.
김정은은 싱가포르 회담 전(前) 시진핑과 회담 대책을 논의하고 회담 후엔 회담 과정과 결과를 공유(共有)했다. 한국과 미국은 어떤가. 1971년 키신저 비밀 방문 때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1958년 중국군은 북한에서 철수했는데 미국군은 왜 아직 한국에 머물고 있느냐'고 따졌다. 키신저의 대답이 이랬다. '남한에 군대를 주둔하는 것이 미국의 항구적(恒久的) 정책은 아니다'(2001년 4월 미국 국립문서 보관소 비밀 해제 문서). 한 가지 더 있다. 중국은 당시 이 대화 내용을 북한에 전달했고 미국은 한국에 알리지 않았다. 싱가포르 회담 이후 '문재인의 한국'과 '트럼프의 미국' 사이는 그때와 달라졌는가.
국가 간 중력(重力) 법칙은 국력에 비례하고 거리에 반비례한다. 분단됐건 통일됐건 한반도의 자주와 독립을 흔들 미래의 최대 불안 요인은 중국 소용돌이다. 한국과 중국이 마주 보고 앉은 시소의 불균형을 잡아줄 나라는 미국뿐이다. 일본은 한 반도의 향배(向背)를 놓고 지난 100년 동안 두 차례나 전쟁을 결정한 나라다. 일본의 불안을 가볍게 다뤄서는 안 된다. 한반도 해빙(解氷)이 언 바다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얼음판이 세 조각 네 조각 나는 사태일 수도 있다. 대통령은 민심(民心)을 방패 삼아 안보 불안을 덮으려 해선 안 된다. 대통령이 먼저 걱정하고 앞서 고민해야 국민이 평안(平安)해진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