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과분한 은혜 (창 28:10-19)

鶴山 徐 仁 2018. 6. 5.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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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월 05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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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과분한 은혜 (창 28:10-19)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본문 해석

사람들은 지난 어떤 때를 기억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행복해 질까요? 학교에 첫 입학 했을 때 선생님이 불러주시던 이름, 공부를 잘해서 상을 

받을 때 불리던 이름,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합격자 명단에 자기 이름이 적혀있는 것을 보았을 때, 평소 존경하던 분이 자기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일 

것입니다. 하물며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등 고위 공직자에게 상을 받는 사람은 자기 이름이 불러질 때 자기 이름이 그렇게 귀하고 존귀하게 느껴지고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불러주십니다(사43:1).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부르심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서 그냥 구원해 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어루만지고 다독이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승리를 보장해 주시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얼마나 과분한 은혜입니까?    인생의 그 많은 만남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은혜적 만남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해서 선택을 받고, 쓰임을 받고, 구원을 받는 만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야곱은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은 지금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고독합니다. 팔레스타인의 밤은 기온이 아주 많이 떨어져 무척 춥습니다. 

형을 피해서 빨리 도망하느라 긴장하고 또 많이 걸어서 몸도 지쳐 있습니다. 도망자의 신세로 지금 광야의 길을 가다가 지쳐 자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밤에 신비한 경험을 합니다. 지쳐 쓰러져 자고 있는 야곱에게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말씀하셨습니다(12).

 

야곱에게 과분한 은혜란, 바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야곱을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어떤 행동을 하고,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보여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고 있는 야곱을 그냥 찾아오셨고, 하나님이 조건 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야곱의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았다, 속이는 자, 이기주의자’라는 뜻입니다. 이름 그대로 야곱은 배고픈 형에게서 팥 죽 

한 그릇으로 장자 권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에서가 아버지로부터 받을 축복을 가로채는 교활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야곱은 수단방법을 다 동원함으로 자기만 잘되고 잘 먹고 잘살기 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을 버리시지 않고 찾아오셨습니다. 

 

또한 일방적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생각지도 못했던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오셔서“난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주셨던 복의 언약을 야곱을 통해 이루어갈 것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13-15). 

지금 하나님께서 야곱을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네 가지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첫째,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둘째,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리라. 셋째,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넷째,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하리라 하셨습니다. 

어찌 과분한 은혜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놀라운 은혜와 약속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이 약속의 말씀을 받아 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결단과 적용

-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과분한 은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나의 삶은 야곱처럼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이지 않았는지 점검해 봅시다. 

-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이 있으시다면 지금 문장으로 적어보시고 감사하세요. 

오늘의 기도

감사하신 하나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부르시고 과분한 은혜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욕심을 버리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야곱처럼 서원하게 하시고, 그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인문학 큐티더 보기
지성과 영성
인문학 나눔

“나무를 분석하고,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는 사람을 ‘과학자’라고 합니다.  

나무를 보고 시를 쓰고 노래하는 사람을 ‘시인’이라고 합니다.  

나무를 보고 나무를 존재케 한 이, 나무를 만든 자를 찬양하는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시인들은 우리가 인간임을 느끼게 해 줍니다. 

신앙인은 존재의 근원을 제시해 줍니다.”

 

한재욱 저(著) 「인문학을 하나님께」(규장, 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만,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꽃과 달과 별은 눈에 보이지만,

꽃을 피게 하고 달과 별을 떠 있도록 만드는 건 볼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기독 메시지

보이지 않는 이 본질을 보는 눈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지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인문학은 본질에 대한 끝없는 의문을 제시하며 지성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영성을 낳았습니다.

인간은 서로 아무리 다가서도 빈틈이 생깁니다.  

전위적인 화가 마르셀 뒤샹은 그것을 ‘앵프라맹스’(inframince) 라고 불렀습니다.  

아무리 악수를 하고 뜨거운 포옹을 해도 어쩔 수 없이 너와 나를 가로막고 있는 

틈 새를 발견하고 안타까워합니다.  비단 인간관계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물을 끌어안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틈이 있습니다.  

이 간격은 하나님만이 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월의 힘이요 영성의 힘입니다. 

 

“인문학은 땅의 신음”입니다.  본질과 근원을 애타게 찾으려 하지만 

찾지 못하는 신음, 존재의 뿌리를 발견하지 못한 채 그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신음.  

이 아름다운(?) 신음이 인문학이고, 

인문학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틈을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그림 큐티더 보기
사도행전 4장32절
고린도전서 15:10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All the believers were one in heart and mind. No one claimed that any of his possessions was his own, but they shared everything they had

도서 큐티더 보기
교회의 표적

교회는 표적을 나타내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놀라운 기사와 이적이 나타난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은 시간이 지나면

이 땅위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신유와 방언과 예언의 은사가 일어났더라도 

하나님이 그 은사와 표적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표적은 표적일 뿐입니다. 

표적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끝까지 

그 교회와 우리의 믿음을 붙잡아주십니다.

-김병삼의 [치열한 순종] 중에서-

 

교회의 존재 이유는 표적에 있지 않습니다. 

날마다 기적을 구하는 우리의 신앙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땀 흘려서 정직하게 얻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게 합니다. 

내 삶의 최선은 없고, 날마다 표적을 구하며 

살아간다면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말씀보다 더 쉬운 표적을 구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무너뜨립니다. 

힘들어도 주님의 방법으로 걸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