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하늘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입니까?(마 18:1~6)

鶴山 徐 仁 2017. 9. 20. 12:23
9월 20일 (수)
하늘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입니까?(마 18:1~6)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우리는 경쟁과 비교의식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에게 가장 큰 질문은 “누가 큰가?”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비교의식이 얼마나 큰 영혼의 피폐함을 가져오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다가와서 묻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새번역) 여기에서는 중요한 몇 가지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너희가 돌이켜”라는 말씀입니다. 이 단어는 “돌아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돌아서는 일”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교만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단어는 바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이라는 인데 예수님은 오해하지 않도록 4절에 “어린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바로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잘난 척, 낮은 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를 “낮추는 척”하는 것은 “낮추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척”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는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내 자신의 삶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는 몸부림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이 다 헛수고입니다. 다음 단어는 “절대로”라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충격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이 말씀 이후에 예수님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이후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라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큰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이야기임에도 예수님은 연결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낮아지는 근본적인 이유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작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결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만하여 낮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큰 맷돌을 목에 메고 물이 빠지는 것보다 심각한 죄입니다.
우리 모두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낮아지는 하루를 삽시다. 아니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실 때 기쁨으로 순종하며 그 길을 걸어갑시다.

 
  
  
 

- 겸손한 “척”한 것을 “나는 나름대로 겸손하게 행동했다.”고 착각했던 일들이 있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 우리 주변에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다시 그 사람을 바라보고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기 원합니다.

 
  
  
 

주님이 때로 나를 고난을 통해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낮추시는 이유를 이제 깨달았습니다. 나에게 주신 고난 때문에 내가 낮은 사람을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걸어갈 때, 성령님 포기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능력으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걸음

대한민국의 교회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대형 교회와 대형 교회가 되고 싶어 하는 교회입니다.
모두 최고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작으면 스스로를 삼류로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성도의 숫자가 적고 건물이 작아서 3등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몰라도, 교회와 성도와 목회자들이 삼류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거지도 일류로 살아갈 수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녀들이 일류로 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삼류 갈릴리에서 일류로 사셨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최병락의 [부족함] 중에서-

 
   
 
  
 




마지막 시대의 문제는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세상적인 기준과 가치관으로 판단합니다.
그것에 올무가 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는 교회와 성도의 모습을 직시해야 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임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자녀 삼으심으로 인하여 최고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고백은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살아갈 때 인생의 참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편 20:4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May he give you the desire of your heart and make all your plans succeed.

 
    
 
  
 요나3일영성원 장덕봉 목사
 여유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