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넷향기] 이요셉 소장의 "작은것에 대한 행복감" 외1

鶴山 徐 仁 2015. 9. 28. 11:16

작은것에 대한 행복감
이요셉

저의 큰 장점은 잘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갑, 휴대전화도 잃어버립니다.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여의도에서 보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출발했습니다.
저는 큰 차를 타고 다닙니다. 아시지요? 지하철을 타러 갔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지갑을 사무실에 놓고 왔습니다. 다시 돌아가려고 했는데 주머니를 뒤졌더니 2,000원이 있었습니다. 갈 때 1,000원, 올 때 1,000원이면 친구도 만나고 집까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0원을 주머니에 넣고 가서 지하철 티켓을 샀습니다. 주머니에는 1,000원밖에 안 남았지요? 그런데 갑자기 1,000원이 정말 소중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의도에 내려서 걸어가는데,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 2,000원도 없는 사람도 얼마나 많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걸어가는데 한강에 있는 다리와 물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불빛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지, 처음으로 그것을 느끼면서 ‘정말 멋있다, 정말 아름답다, 정말 멋지다.’라는 마음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다 옆에 있는 여의도 공원을 보았습니다. 여의도 공원이 아주 환상적이었어요. ‘내 주머니에 2,000원이 없었다면 이런 느낌을 갖지 못했을 텐데.’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건널목에서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 열심히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순간 어렸을 때 재미있게 본 ‘600만 불의 사나이’가 생각났습니다. 내용은 주인공이 사고로 한 팔과 한 다리를 잃게 되었는데, 그것을 인조 팔과 인조 다리로 만들어서 초인적인 힘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그 비용이 600만 불 정도 들었다고 하여 제목이 ‘600만 불의 사나이’였습니다.
그렇게 뛰면서 ‘나는 수술을 하지도 않았지만 두 팔과 두 다리가 있구나.’ 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내가 돈을 들이지 않았지만 뛸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 내 마음속에서 잔잔한 감동으로 기쁨이 올라올 때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친구를 만나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눌 때,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놀랍다, 어떻게 그렇게 짧지만 그런 감동을 느낄 수 있냐.” 친구가 맞장구를 쳐 주니까 더 좋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못사는 사람들이 제일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왜 행복할까를 조사했습니다. 행복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작고 사소한 것에 감사를 느끼고, 작고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꼈던 것입니다.
아이의 작은 미소에서, 먹는 밥을 소화시켜 줄 수 있는 위장에서, 사랑하는 아이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있다는 것에서, 아무것도 아니지만 주머니의 1,000원, 2,000원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열쇠가 아닐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다면 가장 불행한 나라는 어디였을까요?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보다 더 잘사는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불평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20평 아파트에 사는데 저 사람은 왜 40평 아파트에 살까, 나는 30평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저 사람은 왜 50평 아파트에 살고 있을까?, 나는 100만 원을 버는데 저 사람은 왜 200만 원을 벌까?’
비교하면서 불평할 때는 나도 모르게 행복이 도망갑니다.
우리 삶 속에 진정한 웃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행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 주머니에, 내 삶 속에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나의 마음속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때 진정한 행복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생기기 시작하고, 진정 웃음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얼굴에 미소만 보일 수 있다면, 진정한 웃음을 낼 수 있다면, 그때 희망과 용기가 솟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머니의 1,000원, 2,000원에 감사를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때 진정 행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나도 모르게 이렇게 웃음이 나오지요. “하하하하하하하!” 올해도 힘내시고 많이 웃으십시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이철환

공장에서 오랫동안 일했습니다.
기름때 절은 작업복을 입은 내 모습이 싫었습니다.
화장실에 가도 나는 거울을 보지 않았습니다.

밤 늦은 시간까지 잔업을 하고 나면
소금 뿌린 배추마냥 온몸이 흐느적 거렸습니다.
차라리 부서지고 싶었습니다.
자정 넘어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동료들과 함께 공장 앞 허름한 분식집으로 몰려가기도 했습니다.
백열등 노란 전구 알 아래 앉아
친구는 따라지 인생이 분하고 서럽다며
기름때 절은 주먹을 물어 뜯기도 했습니다.
작업반장님은 며칠째 어린 딸 얼굴도 못 봤다고
훌쩍훌쩍 울기도 했습니다.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싶다고 모두들 말했습니다.
하지만 작업복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공장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나는 책상에 앉아 밤 늦도록 대학입시 공부를 했습니다.
쏟아지는 잠이 기름때 절은 작업복보다 더 싫었습니다.

작업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 입어도
우리들의 평상복은 작업복과 별로 다를게 없었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들 추레했습니다.
언뜻언뜻, 띄엄띄엄
근사한 양복에 넥타이를 꿈꾼 적도 있었습니다.
작업복을 입어도, 평상복을 입어도
도무지 가난한 티를 벗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
나는 무엇이든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구두 닦는 일이었습니다.

작업장 동료들의 낡은 구두 위에
총총한 별빛을 매달아주고 싶었습니다.
서럽게 뿌리 내린 척박한 땅 위에 서있는
그들의 구두만이라도
별빛처럼 반짝반작 빛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번개불에 콩 볶 듯 점심을 먹었습니다.
구두를 닦을 시간은 점심식사 시간밖에 없었습니다.
오후 작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작업장 한쪽에 앉아 구두를 닦았습니다.
동료들이 우르르 다가와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말렸지만,
나는 환한 웃음으로 구두를 계속 닦았습니다.
처음에는 요령이 없어서 많은 구두를 닦지 못했습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60 켤레가 넘는 동료들의 구두를 모두다 닦을 수 있었습니다.
동료들의 구두를 닦으며
나는 나의 열등감을 조금씩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 사이, 시간은 물고기처럼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작업장에서 일하는 내가,
공장 직원들의 복지을 담당하는 부서로 인사 발령이 난 것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나를 보고,
작업장 동료들은 모르는 척 배시시 웃기만 했습니다.

자신들의 구두에 총총한 별빛을 매달아 주었다고
인사과장에게 말한 건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었습니다.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사기 증진와 복지를 위해
더 없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동료들이 나를 추천했던 것입니다.
인사과의 정식 발령이라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작업장에서 마지막 일을 마치던 날,
공장 근처에 있는 분식집에서 나를 위한 송별식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구두만큼은 사장님, 회장님 구두보다 비까번쩍했다고
동료들은 쓸쓸하게 웃었습니다.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을
내가 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작업반장님은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대학생 되면 쓰라고, 동료들은 내게 만년필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양복에 매고 다니라고, 진달래빛 넥타이도 선물해 주었습니다.
눈물이 나왔습니다.
자꾸만 눈물이 나왔습니다.

나는 다음 날부터 직원들의 복지를 담당하는 부서로 출근했습니다.
작업복을 입지 않은 내 모습이 오랫동안 어색했습니다.
괴물 같은 기계 아래 누워 있는 동료들이 생각났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무실에 편안히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미안했습니다.

새로 옮긴 부서의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업무를 보면서 짬짬이 대학입시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야간 잔업도 없어서 퇴근 후에는 공부할 시간이 많았습니다.
부족한 공부를 하기 위해 종로에 있는 학원에도 다녔습니다.

그 이듬해, 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계획했던 것보다 더 빨리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건,
작업장 동료들의 사랑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푸른 시절은, 낮고, 작고, 초라했습니다.
대학 입학 후 학비를 벌기 위해 여러가지 일을 했습니다.
아르바이트 자리가 거의 없던 시절이 이었습니다.
사과장사를 했습니다.
싸구려 양말도 했습니다.
그림장사도 했습니다.
사과장사를 할 때도, 양말장사를 할 때도 프란츠 카프카를 읽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사가지 않는 그림 옆에 서서 고개를 들 수 없을 때도,
알베르 까뮈를 읽고 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스타니스랍스키와 헤르만 헤세가 있어,
나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셨기에 나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풀무 야간학교에서 4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밤잠을 설쳐가며, 죽을 힘을 다해 책 원고를 준비했습니다.
책 한 권을 준비하는데 꼬박 7년이 걸렸습니다.
이제는 됐다 싶어, 원고를 들고 출판사로 갔습니다.
정확히 다섯 군데 출판사에서 거절당했습니다.
글은 괜찮은데, 무명 필자의 글이라는 게 부담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원고가 한 번씩 거절 당할 때 마다, 새로운 원고를 써넣었습니다.
원고는 점점 더 좋아졌습니다.
어긋남도 조화가 될 수 있다는 걸, 그 어름에 알게 되었습니다.

원고를 다섯 번 째 거절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출입문쪽에 서서, 나는 울었습니다.
2개월 동안 책 속에 넣을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픈 몸으로, 밤을 새워가며 그림 31컷을 완성했습니다.

원고를 들고, 여섯 번 째 출판사로 갔습니다.
출간이 결정 되었습니다. 나의 두 번째 책 <연탄길>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360만명이 넘는 독자들이 읽었습니다.

그 뒤에 쓴<행복한 고물상><곰보빵><보물찾기>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을 꿈꾸게 하는 건,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아픔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의 원래 모습은 아픔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