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식 전 주미대사
단둥(丹東)에서 압록강 건너 북한을 바라봤다. 끊어진 철교 아래 묵묵히 흐르는 강물과 손에 잡힐 듯 삭막한 신의주를 바라보며 65년 전 무산된 통일의 꿈이 다시금 가슴을 저며왔다. 중국 땅 초입에 서 있는 펑더화이(彭德懷) 중국 의용군 총사령관의 동상을 쳐다보면서 인천 월미도의 맥아더 동상을 문득 떠올린 것은 비단 필자만이 아니었으리라.
9월 15일은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한국전쟁의 대반전 드라마인 인천 상륙작전을 펼친 지 65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은 분명 우리가 기념해야 하고 또한 기억해야 할 날이다. 한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해야 하고 ‘신의 한 수’와 같은 상륙작전 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 통일이 물거품이 된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은 5000대 1의 성공확률을 가진 도박이었다. 적의 허를 찌른 과감한 기습 작전으로서 미국 전쟁사에서도 가장 빛나는 쾌거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맥아더 자신이 직접 기획·감독한 군사전략적 천재성의 극치다. 상륙작전에 이어 서울수복(9월 28일), 38선 통과(10월 초), 평양 탈환(10월 24일)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통일이 손에 잡힐 듯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운산접전(10월 27일) 이후 사라져 버린 중국군을 가볍게 여긴 맥아더는 11월 마지막 주 압록강을 향한 동서 양 전선의 총공격을 명령하면서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30만 명에 달하는 중국군을 압록강 근접 지역 산속에 매복해 놓고 유인작전을 벌인 펑더화이의 덫에 빠져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다는 비명을 남기면서 퇴각했다. 1951년 1월 4일엔 서울을 다시 적군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워싱턴은 적군이 금강까지 남하할 경우 일본으로 총퇴각하는 시나리오까지 검토하고 있었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된 압록강단교, 폭격으로 끊어진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상황이 이렇듯 급전직하로 악화된 것은 중국의 참전 가능성을 무시하고 충분한 대비태세 없이 무리한 총공세(11월 하순)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천시·지리·인화를 중시하면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손자병법의 교훈을 맥아더가 무시한 것이다.(10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이 태평양 웨이크 섬까지 직접 날아와 중국군의 참전 가능성에 대한 의견을 묻자 맥아더는 가능성을 낮게 보면서 기껏 수만 명 정도의 중국군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총공세를 펼칠 당시 중국군이 이미 주간 휴식, 야간 이동의 기만작전을 쓰면서 대규모 군대를 압록강 남쪽에 포진해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맥아더가 이처럼 중국의 참전 가능성을 낮게 본 이유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전쟁 논리로 보면 중국군이 개입할 적기는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밀리고 있는 때였고, 이미 시기를 놓친 뒤 유엔군의 총공세에 맞서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실패의 또 다른 원인은 인천 상륙작전 이후 맥아더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맥아더 불패’ 신화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이 맥아더를 자만과 독선에 빠져들게 했고 워싱턴의 군 수뇌부조차 제동을 걸 수 없었다. 그 결과 군사전략상 많은 문제점을 내포했던 원산상륙작전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해 퇴각하는 적군을 소탕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잃게 됐다.
마음이 급해진 맥아더는 마침내 만주 폭격, 중국 해안 봉쇄, 장제스(蔣介石)를 동원한 중국 본토 공격, 장제스 군대의 한국전 참전 같은 주장을 하며 워싱턴의 승인을 요구한다. 제3차 세계대전을 초래할 우려로 이 같은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맥아더는 워싱턴을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트루먼 대통령은 51년 4월 12일 그를 전격 해임하고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트루먼·맥아더 논쟁의 핵심은 미국의 주적은 소련인 만큼 제한된 군사력을 유럽전선에 투입해야 한다는 마셜 국방장관과 브레들리 합참의장의 주장과 아시아에서 공산 세력과 정면승부를 벌여야 한다는 맥아더 노선의 대립이다. 이는 “전쟁의 궁극적 목표는 승리”라는 맥아더의 총력전쟁 방식과 외교·군사적 사정을 감안해 ‘제한적인 승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 간의 대립이기도 하다. 후자의 승리로 미국의 새로운 냉전전략이 태동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한국전쟁 초기 2개 전투사단의 파병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인천의 기적을 만들어낸 영웅 맥아더 장군은 결국 한국전쟁에서 추락하고 그의 오디세이도 끝났다. 상원 청문회에서도 기대한 만큼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채 “노병은 죽지 않는다”는 말만 남기고 떠나게 된다. 그의 시대는 이제 먼 과거로 사라졌다. 이제 ‘전쟁은 곧 정치의 연장’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생각이 각광받는 새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이태식 전 주미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