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우리에게 영성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외 1/ CTS 큐티

鶴山 徐 仁 2015. 8. 1. 22:35



더 풍성한 삶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성품 가운데 자라는 법을 배운다고 해서 당신 자신의 삶을 잃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옛날에는 이것이, 당신의 삶을 당신에게 돌려주시는 하나님의 우선적인 방법으로 이해되었다. 말 그대로 영성이란 우리를 그 아들의 형상으로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의 조각칼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생명을 경험하는 것은 곧 예수께서 “내가 온 것은 너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약속하신 그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게리 토마스의 [일상 영성] 중에서-

우리에게 영성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분을 온전히 닮아, 그분을 온전히 담아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분을 먼저 경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은 풍성한 생명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며, 그의 계획 속에 내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자유입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히브리서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We have come to share in Christ if we hold firmly till the end the confidence we had at first.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 - 애 5:16-22
16.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17. 이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들이 어두우며
18. 시온 산이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노나이다
19.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2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22.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우리의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져 나가는>(16절)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범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광을 더럽히고 스스로 화를 불러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슬프고 통탄스러운 노릇입니까?
그렇습니다. 죄가 우리를 비참하게 하고, 실패하게 하고, 하루아침에 모든 기쁨과 영광을 다 잃어버리게 합니다. 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고 내 머리의 면류관 마저도 땅에 떨어져 먼지 속에 뒹굴게 합니다. 죄를 경계하시고, 멀리하십시오. 방학이고 휴가철입니다. 자기 관리와 단속에 더욱 힘쓰십시오.

마음이 피곤하고 눈이 어두워질 것이라
<이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들이 어두우며>(17절).
죄는 우리의 마음이 무거운 짐 아래에서 마냥 눌리게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하신 말씀도 무거운 <죄의 짐>을 진 자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초청의 음성입니다. 다윗도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며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시 38:8) 그랬고, <여호와여 속히 응답하소서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 하나이다>(시 143:7) 그랬습니다. 다 죄 때문에 마음이 피곤해진 경우입니다. 눈도 마찬가집니다. 죄로 인해 눈이 멀면 그야말로 눈 뜬 장님이 됩니다. 이제 모든 죄의 무거운 짐을 주님 발 앞에 내려 놓으십시오. 그래야 마음이 가벼워지고 눈이 밝아집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21절).
이것은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소서>(시 8:3, 7. 19)하며 반복되는 시편의 기도와도 일치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진실하게 회개하고 삶을 고침으로써 우상들로부터 온전히 주께로 돌이키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즉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시인하고 고백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의지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도 있지만 그러나 실제 그렇게 결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권능으로 역사하셔야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며 강제하셔야 비로소 돌이킬 수가 있고 본래의 자리, 옛적의 지위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내가 ... 처음과 같이, ...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성한 고을이라 불리리라>(사 1:26).
부디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 회복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공동체도 다 <의의 성읍>, <신실한 고을>이라 불리우며 융성하시고 복되십시오. 잃어버린 옛적의 지위와 축복을 다 되찾으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해주시길(시 103:5) 진심으로 빕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교회의 존재이유


디트리히 본회퍼는 “교회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사람들이란 교회 밖의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을 우리와는 가치관이나 우선순위가 전혀 다른 외계인이나 이방인으로 간주해 버린다면 그런 시각을 유지하기 어렵다. ‘우리’와 ‘그들’사이의 거리가 마치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넓어서 도저히 함께하기 힘들다고 생각할수록, 우리는 진실한 관계를 위해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점점 더 멀리하게 된다.
-조지 바나·데이비드 키네먼의 [처치리스] 중에서-

우리와 한 지붕 한 식구로 존재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 이들도 한때는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한 자들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심연에는 마음이 있습니다. 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보고 떠나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 안에 교회의 회복을 바라고, 교회가 진정한 세상의 소망 울림통이 되길 바라는 자산입니다. 교회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 끊임없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있는 그 마음의 진정성을 헤아려야 합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시편 36:8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They feast on the abundance of your house; you give them drink from your river of delights.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대적들의 만행 - 애 5:8-15
8. 종들이 우리를 지배함이여 그들의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9.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10. 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
11. 대적들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읍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12. 지도자들은 그들의 손에 매달리고 장로들의 얼굴도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13. 청년들이 맷돌을 지며 아이들이 나무를 지다가 엎드러지오며
14. 노인들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청년들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15.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갈대아인들은 하찮은 종들까지도 유다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며 학대하고 능욕했습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부리는 대로 짐승처럼 따를 수밖에...
<종들이 우리를 지배함이여 그들의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8절).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그 누구도, 어떤 나라도 대적의 손에서 유다를 구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선지자가 하나님께 <우리가 받는 이 치욕을 살펴보옵소서>(1절) 하며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녀들을 욕보이다
<대적들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읍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11절).
원수들의 가공할 만행은 아무런 제재나 통제도 없이 지속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남자들은 다 죽거나 포로로 잡혀 갔으니 유다에는 오직 늙은이들과 유부녀, 처녀들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전쟁에서 이겨 남의 나라를 접수한 점령군들에게는 현지의 유부녀와 처녀들을 욕 보이는 일이 당연한 전리품 쯤으로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원수들은 유다의 고관들을 살해한 후 그 시체들을 높이 매달기까지 하며 자신들의 용맹과 전승을 시위하고 유다를 욕되게 하였습니다.
<지도자들은 그들의 손에 매달리고 ...>(12절).
심지어는 그들은 어린아이들까지도 강제로 동원해 노역을 시켰기 때문에 무거운 나무짐 아래 아이들이 깔리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나무를 지다가 엎드러지오며>(13절).

춤이 변하여 슬픔이 되다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15절).
이제 유다에서의 모든 즐거움은 끝났습니다. 기쁨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원수들이 홍수처럼 밀려 온 후로는 아예 기쁨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렸습니다. 깊은 바다가 서로를 부르고 파도가 연이어 그들을 덮쳤으므로 완전히 큰 물속에 잠겨 전혀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절기 때마다 춤을 추며 기뻐하곤 했는데(삿 21:21), 이제는 그 춤이 슬픔이 되고 애곡이 되어 이전의 즐거웠던 시절을 생각할수록 그저 눈물만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모든 슬픔과 아픔을 우리가 자초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게 우리 탓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비록 다 하나님이 주신 슬픔이고 아픔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의로우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범죄함>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진노하시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당하는 화나 불행은 다 내 죄와 나의 어리석음 탓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주님께 불평할 수 없고 끝까지 자신을 살피며 회개해야 합니다. 선지자도 지금 바로 그 점을 고백하고 참회하므로 우리 모두에게 아름다운 통회의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