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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日망명 조작으로 본 KBS의 전술: 99% 거짓과 1% 사실 배합

鶴山 徐 仁 2015. 7. 11. 11:55

조갑제닷컴

 

 

이승만 日망명조작으로 본 KBS의 전술: 99%거짓과 1%사실 배합

 

깨어있는 자들만이 거짓의 실체를 밝히는 파수꾼이 될 수 있다.

 

김필재  

 

한반도의 核겨울

 

기사본문 이미지
KBS 기사 캡쳐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사람들은 한 번 말한 거짓말은 부정하지만, 두 번 말하면 의심하게 되고, 세 번 말하면 이내 그것을 믿게 된다/100%의 거짓말보다는 99%의 거짓말과 1%의 진실의 배합이 더 나은 효과를 보여준다.”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년 10월 29일~1945년 5월 1일>

2차 대전 당시의 히틀러와 나치즘(Nazism)의 狂氣 뒤에는 괴벨스의 대중(大衆)선동 정치가 있었다. 괴벨스는 히틀러의 심복으로 1922년 나치당에 입당한 뒤 1929년에 黨중앙선전부장, 1933년에는 히틀러 내각의 계몽선전장관이 되어 언론 통제를 실시했다.

나치의 선전선동 조직은 독일 군대와 함께 2차 대전에서 독일을 떠받쳤던 양대 기둥이다. 괴벨스는 라디오를 독일의 모든 가정에 보급하기 위해 국가보조금을 지불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 때문에 당시 독일인들은 라디오를 ‘괴벨스의 입’이라고 불렀다.

괴벨스는 기존 언론과 새로 등장한 언론인 라디오 방송과 영화를 통해 히틀러를 훌륭한 지도자로 부각시켰고, 유대인을 지구상의 멸종 대상으로 지목했으며,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미화해 독일 국민을 전쟁기계로 만들었다.

괴벨스는 패색(敗色)이 완연했던 1945년에도 선전선동의 힘으로 독일국민을 단결시켜 전쟁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 엄청난 경비를 들여 ‘콜베르크’라는 사기 진작용 영화를 제작 했다.

괴벨스의 大衆조작을 통한 나치식 정치선전은 2차 대전의 패전과 더불어 역사의 심판대에 올랐다. 결국 히틀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음 날, 괴벨스는 자신의 아내 그리고 6명의 자녀들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했다. 괴벨스식 중우정치(衆愚政治)는 언론을 통한 대중조작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한 역사의 경고로 남게 됐다.

선전-선동은 인간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거짓을 신뢰하게 만드는 마력(魔力)이 있다. 또한 사람들이 거짓을 신뢰하게 되면 그 힘은 더욱 굳세어 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은 진실이 되어 버린다. 깨어있는 자들만이 거짓의 실체를 밝히는 파수꾼이 될 수 있다. 아울러 거짓을 신뢰하고 이를 진실로 믿는 자들도 공범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갑제닷컴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우리는 일밖에 한 일이 없다” - 광복 70주년 기념 現代史 체험手記 현상모집
[ 2015-07-10, 10:50 ]

 

 

 

 

KBS 조작 사태 중간 결론

 

한국은 국영방송이 建國 대통령을 모함하는 조작 보도를 하고 그 사실이 드러나도 교정이 불가능한 나라가 되었다.

이런 나라는 절대로 체제와 자유를 지킬 수 없다.

 

조갑제닷컴   

 

 

 

 

KBS 조작 사태를 통해본 선동의 구조

1. KBS의 이승만 일본 망명 조작 보도를 시작으로
2. YTN이 받아서 상상력을 추가, 거의 소설 수준의 오보
3. 국내외의 좌파 선동 매체 일제히 '이승만 매도 기사'로 전파
4. 영남일보 등 非좌파 매체도 망명 요청을 기정사실화하여 社說 등으로 비방
5. 일부 기자, 임진왜란 때의 선조에 이승만을 비교, 뭇매질 글쓰기
6. 조작 사실이 드러나자 KBS가 정정, 기사 삭제
7. 좌파 언론 단체들, KBS가 굴복하였다고 공격
8. 다른 언론들, 이 사건을 다루지 않음으로써 KBS를 엄호
9. 이인호 KBS 이사장이 이사회 소집하자 좌파 언론 단체들 이사장 공격
10. 이사회에서 야당 측 이사들 조작 보도 논의 방해

*중간 결론: 한심하다 못해 코미디 수준이다. 기자가 날조하는 것은, 형사가 도둑질을 하고, 검사가 공갈을 치고, 군인이 利敵질을 하고, 정치인이 大逆하고, 학자가 사기꾼이 되는 것과 같은 직업적 반역이다. 한국은 國營방송이 建國 대통령을 모함하는 조작 보도를 하고 그 사실이 드러나도 교정이 불가능한 나라가 되었다. 이런 나라는 절대로 체제와 자유를 지킬 수 없다.

 

 

[ 2015-07-10, 10:51 ]

 

 

 

 

"1950년 6월27일, 李承晩대통령은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조갑제닷컴>, 'KBS 이승만 일본 망명 조작 사건 보고회' 개최 (현장스케치)

 

김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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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보도를 접한 후 잠을 잘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하나의 넘어야 할 山이자, 반드시 극복해야 할 국민의 사명이다. 조금 더 힘을 내서 이 난국을 극복해야 한다. 국민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적어도 자신들이 사는 국가가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역사의 진실을 따라야 한다. 역사의 진실을 안다는 것은 그동안 망각됐던 이승만 대통령의 바른 모습을 아는 것이다. 어둠이 지나면 광명이 오는 것처럼 희망을 가지고 자유통일이 가까운 장래에 이뤄질 것임을 믿고, 지혜와 용기, 희망과 진실을 무기로 힘을 합쳐 전진해 나가자.' (李仁秀 박사)

최근 KBS의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본 망명 타진’ 보도를 반박하는 對국민 보고회(제목:KBS 이승만 일본 망명 조작 사건 보고회)가 10일 <조갑제닷컴> 주최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20층에서 열렸다.

이날 참석자들은 KBS가 일본 기록(《야마구치 縣史》)을 인용, 6·25전쟁 발발 이틀 뒤인 6월27일 일본 외무성을 통해 ‘(이승만 정부가) 망명정권을 야마구치 縣에 세우고 싶어 한다’면서 李 대통령의 망명설을 보도한 데 대해 당시 李 대통령이 트루먼에게 보낸 親書(트루먼 대통령 회고록) 등을 제시하며 “1950년 6월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결사항전을 다짐했다”고 밝혔다.

조갑제 대표는 인사말에서 “KBS는 일본 외무성 전보의 실재와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한국 및 미국 정부 자료는 무시하고, 신빙성이 약한 일본 자료에 6월27이란 날짜를 삽입(화면),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으로 도망가는 계획을 추진했다고 단정적 보도를 내보냈다”고 지적했다.

조 대표는 이어 지난 3일 KBS가 自社 뉴스를 통해 오보를 시인한 데 대해 “핵심 사안이 날조임을 인정했으므로 반론 게재 정도로 넘어갈 수 없게 됐다“며 책임자의 문책·KBS 사장의 사과·진정성 있는 정정보도 등을 요구했다.

조성호 <조갑제닷컴> 기자는 PPT자료를 통해 KBS의 6·25발발 직후 ‘이승만 정부의 일본망명 타진’ 관련 오보 내용과 문제의 보도가 타(他)언론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조 기자에 따르면 “KBS는 지난 6월24일~28일 간 총 여섯 차례에 걸쳐 제목만 바꿔 이승만 정부의 6.25전쟁 직후 일본 망명 요청설을 보도했다”고 한다. 조 기자는 그러나 “KBS 뉴스가 인용한 《야마구치 縣史》에는 날짜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 정부가 (이승만) 대통령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일본에 망명정부 수립을 요청한 공식 자료가 美 국무부나 일본 외무성 문서에서 발견되지 않은 이상, KBS 보도는 명백한 오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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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기자는 기사를 보도한 KBS 기자에게 최근 메일을 보내 ‘6월27일’이란 날짜를 단정한 이유를 물었으나, 현재까지 “아무 연락이 없는 상태”이며, 7월2일에는 KBS 보도본부장에게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로 <조갑제닷컴> 기사를 발송해 이에 대한 반론을 요청한 상태라고 말했다.  


6·25전쟁 전문가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남정옥 책임연구원은 이날 <이승만 대통령의 72시간>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6.25전쟁 발발 이후 3일간의 행적을 아래와 같이 밝혔다.

<6월25일 10:00시, 남침상황을 보고받은 직후, 이승만은 곧바로 하와이에 머물던 구축함 3척에 대한 신속한 귀국지시(11:00시경)를 시작으로 무초대사와의 회동(11:35), 주미대사관 전화(미국지원 요청, 13:00), 긴급국무회의(14:00), 미국에게 무기와 탄약지원 요청(오후), 美 극동군사령부에 전투기지원 요청(오후), 무초대사와의 회동(22:00 이후), 신성모에게 군사경력자회의 지시(22:00시 이후) 등이다. 전쟁 다음날인 6월 26일에는 새벽부터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03:00), 무초대사에게 전화(04:30), 내무부 치안국 방문(아침), 대통령 지시로 군사경력자회의 개최(10:00), 국회본회의 참석(1100-13:00),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 방문(14:00), 서울 시경국장 피란건의(21:00), 주미대사관 전화(27일, 01:00 이후), 맥아더에게 전화(주미대사관 전화 이후), 신성모와 조병옥 등 피란건의(02:00), 경찰의 청량리 敵 전차 진입보고에 따른 경무대 출발(03:00), 서울역 출발(04:00) 등이다.>

남정옥 연구원은 “(북한의) 남침 직후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국가원수로서, 그리고 국군통수권자로서 반드시 해야 될 일을 정확히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며 “그런 점에서 李 대통령의 3일간의 행적에 대한 공(功)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 연구가인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은 “금번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KBS 오보와 관련해 제3자인 애국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에 KBS 관련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총장은 또 “KBS 시청자 게시판에 지속적인 정정보도 요구 및 청와대 신문고 등에 KBS의 행태와 관련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보고회에는 500여명의 애국시민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영식인 이인수 박사를 비롯, 이상훈 前 국방장관, 박희도 前 육군참모총장, 민병돈 前 육사교장, 박정수 예비역 해병대 준장, 서정갑 국민행동본부장, 김길자(경인여대 명예총장) 대한민국사랑회 회장 등이 참석했다.

정리/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현장 스케치> 촬영: 조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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