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고 벌써 나흘이 흘렀다.
세월(시간)은 흐르는 것이고 역류하지 않는다. 한번 흘러 버리면 절대로 역류하는 법이 없다.
시간 속에 얹혀 계속 떠내려가는 인간은 시간의 종착역인 죽음을 향한 행진을 계속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해가 바뀌고 집에서 나흘을 지내면서 이 뻔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강하게 느껴져 정말 허탈하게 지냈다.
TV를 켜면 화면에 나오는 인물들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고 무슨 인간희극을 보는 것만 같다. 정치인들이 나와서 새해인사하는 것이 무슨 쇼를 보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거리를 걷거나 식당에서 밥을 시켜 먹어도 웬지 허공에 떠 있는 것같고 헛 짓을 하는 것만 같다.
화면을 꺼비리면 금방 없어지는 tv의 화면처럼 우리 인간사의 모든 것이 실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새삼스럽게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하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부모님에게서 와서 땅 속으로 간다.-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물학적인 이야기는 형이상학적인 이 질문 자체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이 질문 자체에 대한 대답을 얻으려면 우리는 종교적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지만, 그 전에 인간은 종교적인 동물이다.
고대인들은 모여 살았지만 언제나 신을 경배하면서 살았다.
죽음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종교는 역시 불교가 아닌가 한다.
불교는 죽음의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는 공(空)사상을 도입하여 죽음을 뛰어넘으려 한다.
태어남과 일생은 아무것도 아니며, 죽음도 아무것도 아니니, 태어나서 일생 사는 것도 죽음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허물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을(色)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우주 자체도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덤을 쓰거나 제사같은 것을 지내지 않는다. 법정스님이 타계했을 때 다비식이라 하여 시체를 불태우고 그가 일생동안 쓴 모든 책을 불태운 것도 이런 불교사상의 실천이다.
다시 말해 내 눈 앞에 전개되는 모든 것이나, tv 속의 모든 인간 군상이 전부 공이다.
노정이 우리 곁은 떠난지가 벌써 5년이 넘은 것같다. 노정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부인께서는 노정은 하나님 나라로 가서 아내인 자기가 오기를 기다린다고 말씀 하신다. 죽음의 기독교적인 해석이다.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어도 살아남는다는 이 종교의 이야기에서 자유스러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있는지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난처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신앙심은 무조건이다.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오늘 아침 이런 케케묵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저보면 답은 뻔하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공에서 와서 공으로 갈 뿐이다.
그러나 숨이 붙어 있는 한 나의 존재가 공이라 하여 하늘만 쳐다보고 멍청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는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줄 알지만, 언제 닥칠 그 경계의 시간에 이를 때까지 뭐든지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계의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놈의 소설 쓰기 뿐이다.
배운 것이 도적질이라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나는 소설이며 소설에서 와서 소설로 가고 있다-
억지로 이런 말을 꾸며보고 자신을 쓰디쓰게 웃어보는 새해 원단이다.
이런 말을 지어낸댜고 해서 이 허무하기 짝이없는 공 그자체인 나의 존재가 무슨 실체성을 부여받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해보는 소리일 뿐이다.
이런 공허한 소리만 할 것이 아니라, 떨치고 일어나 눈덮힌 설악산으로나 떠나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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