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충장공 김덕령
충무공 이순신은 서울의 대동맥 세종로에 나라를 지키는 무장의 원훈으로서의 동상을 남겼고, 서울의 3대로중 하나인 충무로라는 거리 이름을 남겼다.
충장공 김덕령은 전라남도의 웅도 광주의 가장 중요한 거리인 충장로라는 거리이름으로 남았고, 광주의 가장 중요한 사찰인 충장사라는 절 이름으로 남았다.
후세인들은 호국의 이 위대한 두 인물을 결코 잊지 않았다.
한 분은 해전의 영원한 명장이었고, 한 분은 그래도 임란당시 왜군의 말 발굽에서 호남을 지킨 육전의 명장이었다.
이 두 장수에게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두 분은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성리학을 이해한 드문 문장가였다는 사실이다.
이순신 장군이 저술한 “난중일기”는 세계 전쟁사 상 거의 그 유례가 없는 참전 장수 자신의 출전기다. 책 이름 그대로 그것은 전투를 지휘하는 장수로서의 매일 매일의 전쟁수행 일기이다. 우국충정으로 점철된 그의 애국심을 절절히 읊고 있다.
한 사람의 장수가 전투를 지휘하는 전장의 현장에서는 이런 일기를 쓰기 아주 어렵다. 당장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수하장수를 지휘하고, 병졸을 지휘하고, 적정을 탐지하는 전쟁 그 자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덕령 장군 역시 자신의 가형과 함께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선비 출신이었다. 그가 대단한 용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소문이 나서 호남으로 넘어오는 왜병을 쳐부수기 위해 거병하였으나, 사실 그는 원래가 문신이었다. 야사에서는 충장공의 두 겨드랑이에는 두 마리의 사나운 호랑이가 들어 있다는 말도 전한다.
두 번째 공통점은, 전쟁 수행 중 왜병들의 간첩들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삼군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한양으로 압송된 주된 이유는, 정유재란으로 15만 일병대군이 부산포로 밀고 들어왔을 때 주전 장수인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정유재란의 성공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순신을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간첩 요시라를 통해 역정보를 흘렸다. 즉 가또오 기요마사(가등청정)는 부산포로 들어올 것이라는 가정보였다. 이순신의 함정들을 엉뚱한 데로 유인하려는 역정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가또의 함대는 지난 겨울에 벌써 거제도에 들어와 있었고, 고니시의 함대는 서생포에 들어와 진을 치고 있었다.
유인책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이순신은 함대를 움직이지 않고 전투의 흐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런 전술상의 작전을 군을 전혀 모르는 선조가 “무군지죄”로 다스렸다. 임금을 무시하고 군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경명 김천일과 함께, 호남을 지켜낸 호남 출신 삼대 의병장들 속에는 김덕령 장군도 있었다. 이들은 영남우도의 의병 맹장들 정인홍 김면 곽재우에 못지 않는 병력을 확보하고 적극적으로 왜병에 맞서고 있었다. 충정도에 조헌, 경상상우도에 정인홍 김면 곽재우, 그리고 예안의 김해, 함경도의 정문부 등이 각기 자신 출신 지방의 왜병들을 구축하는데 앞장섰다.
김덕령은 광주 출생으로, 임란이 일어나자, 거병하여, 담댱부사 장성현감 등의 천거로 종군 명령을 받았으며, 당시 전주에 진을 치고 있던 세자 광해분조로부터 익호장군의 정식 군호를 받았으며, 도통사 권율 휘하에서, 곽재우 부대와 협력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병을 장살한 것이 빌미가 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나 왕명으로 방면되었다.
그러다가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권율의 명령으로 경상도에 혼재하던 항복한 일병들을 끌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변방 무장으로만 도는데 앙심을 품은 신경행의 무고, 즉 김덕령이 이몽학과 내통하여 일병패잔병들을 끌어들였다는 거짓 상고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여기다가 일 패잔병들의 농간이 덧붙여졌다.
이순신과 김덕령 둘 다 선조의 가혹한 친국을 받았다. 이순신은 27일간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에 전신이 파괴될 지경이었으나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김덕령은 선조의 6차례의 걸친 가혹한 고문 끝에 정강이가 완전히 부스러지는 압슬형을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두 장수 다 서애 류성룡과 당시 우의정 정탁의 목숨을 건 구명상소를 받았으나, 이순신의 경우는 유효했으나, 김덕령의 경우 효과가 없었다. 이순신의 경우, 전적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선조도 그의 생명을 빼앗는데는 두려움이 있었다.
셋째의 공통점은 국왕 선조의 미움을 심하게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혁혁한 전공을 올린 두 장수를 한양으로 압송한 것도 국왕 선조의 명령이었다.
왕조국가에서의 왕의 존재는 오늘날 시민들이 상상할 수 없는 특권의 화신이었다. 그것은 거의 인권적인 차원이 아니고 신권적인 경지였다. 사람의 생사를 말 한마디로 빼앗을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바로 왕이라는 존재였다. 사실, 서애 류성룡과 정탁이 임금 앞에서 이 두 장수의 생명을 구해주십사하고 상언하는 것은 곧바로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는 것이다. 인격적인 대화가 통하는 사이가 아닌 임금과 신하 사이에서는 뭐든지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말을 듣고 따르는 오직 일방적인 소통만이 가능할 뿐이다.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면 영의정이건 어떤 당상관이건 하루 아침에 삭탈관직되어 변방으로 유배를 가거나 참형을 받아야만 했다.
극도로 임금의 미움을 받는 두 장수를 위해 그들의 생명을 구하려고 옹호의 변을 임금에게 쏟아놓을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류성룡과 정탁의 용기가 가상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번째로 이 두 장수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 전통적으로 조선사에 흘러내려오는 무신 경시의 풍조였다. 백척간두에 선 조국의 운명을 건져올리는 위대한 장수의 출현같은 것은 구조적으로 조선사회에서 불가능하였다.아무리 위대한 장수도 그냥 싸움꾼의 대장일 뿐이었다. 군의 최고 책임자는 문신인 도체찰사였다. 장수가 아무리 전쟁을 잘 치러도 전공은 그 장수를 거느린 도체찰사에게 돌아간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쟁을 정리하는 뜻에서 전쟁 중 기여한 인물들에 대한 훈장이 수여되었은데, 일등무공훈장은 문신이 80 여명이었던데 비해, 막상 목숨걸고 싸운 무신들은 겨우 18명이었다. 80명 문신 훈장자는 자신의 몽진을 도와준 신하들과 의주까지 호종한 환관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그래서 아무리 위대한 전공을 세운 장군도 수시로 불려가 볼기를 맞았다. 도무지 그의 전공에 합당하는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신립장군의 도순변사로 임명받고 즉시 병을 모집했으나 단 한 사람도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다. 문신인 서애 류성룡이 나서서 병을 모집했더니 약 8000명이 모였다는 사실은 장수의 존재가 얼마나 무력하였나를 알 만한 자료이다. 이런 무신 차별대우에서 발병한 것이 충청도의 이몽학의 반란이었다. 이몽학은 초모군 한현의 선봉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신을 우습게 아는 관군과 조정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가졌다.
광해군과 류성룡과 이순신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정치세계에서는 아무리 체제가 바뀌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의 지지도이다. 선조의 장남 임해군이 함경도로 피난을 가서 모병에 나섰으나 아무도 응모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함경도선비 국경인에게 체포되어 가또오 기요마사에게 넘겨진 사실을 보아도 알만하다.
그러나 동생 광해군은 평안 황해 함경 강원을 돌면서 수만의 근왕병을 모집하였다.
류성룡의 인기는 대단하여, 사실 진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이 이긴 전쟁으로 모습을 일신한 것은 류성룡의 면천법 탓이었다. 노비도 일군의 수급을 베어오면 면천 시켜주고, 수급을 2개이상 베어오면 벼슬을 준다는 법을 만들어 공표했던 것이다. 그는 제승방력 전술에서 진관체제로 바꾸어 전승 아니면 전멸의 전세에서 벗어나, 지역적 지연전투를 가능하게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서애가 파면되었을 때, 즉각적으로 이 면천법은 무효화되고, 양반은 군포를 내지 않고 징병의 의무가 없는 구체제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인기는 무서울 정도로 높아서 그가 한양으로 압송되어갈 때에 길거리에 나온 백성치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언제나 신출귀몰하는 전설을 달고 다니는 김덕령 장군이 가혹한 고문으로 생을 마감했을 때 전 백성 특히 호남인들의 절망과 좌절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선조는 이런 전쟁영웅들이 싫었던 것이다.
조선에는 오직 단 한 사람 제왕인 자신만이 있고, 나머지 어떤 백성도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신하일 뿐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제왕인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게 위해 초개처럼 자신의 생명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수많은 부하졸병들이 죽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은 건재하지 않는가. 괘심하다. 자신은 류성룡 이순신 김덕령의 인기가 아무리 치솟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도 자신의 신하일 뿐이고 자신이 그들의 생명을 말 한마디로 빼았을 수 있는 존재임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선조는 제왕인 자신의 인기를 능가하고 있는 이들 류성룡 이순신 짐덕령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그들을 잡아와서 지옥에 보낼 수도 있고, 초죽음이 되도록 고문을 가할 수도 있는 초월적인 사림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이것이 그가 이순신과 김덕령을 살이 튀어나올 정도로 가혹하게 고문한 이유이고, 류성룡을 전쟁 중 파면조처한 이유이다.
신립이 탄금대에서 무너지자 말자, 한양에서 제일 먼저 자신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피난 준비(파천)를 한 사람이 선조였고, 여기에 분노한 한양백성들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불랄랐다. 의주까지 도망친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을 요청했으나 거부되었다. 국경을 넘어오면 만주벌판의 버려진 관아건물 하나를 대여해 주겠다는 싸늘한 대답이었다.
자기 휘하의 병사보다 수십배 많은 적병을 맞아 과감히 전승하는 이순신과 김덕령이 선조에게는 고맙기도 했지만 자신의 도망자로서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불충한 신하였을지도 몰랐다.
오늘날 이순신과 김덕령은 충무로와 광화문광장의 호국의 조각상으로 남고, 광주광역시의 충장로와 충장사로 남았지만, 그들을 초죽음으로 고문한 선조는 어떤 기념물도 남기지 못한 졸열한 왕으로서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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