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겨놓고 싸운다.
육군소장 군사학박사 김국헌 | 2014-08-01 14:02:16
일본군에서 대좌로 복무하였으나 성남학원을 건립하여 교육자로 헌신한 김석원 장군은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매년 이순신 장군의 현충사를 참배하였다. 그는 일본군에 복무할 당시 해군성 정문에 놓여 있는 닻에 ‘敵將 이순신이 쓰던 닻’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하며 이를 전교생 훈화시간에 소개하여 청년학도를 感奮시켰다. 이순신은 적장이지만 일본인에게도 聖雄으로 존경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노일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운 일본해 해전의 영웅 東鄕平八朗가 승전 축하연에서 그를 이순신에 비교하자 혹시 넬슨 제독에 비교한다면 모르겠으나, 이순신에 비유하는 것은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는 이야기에 감명을 받았다고도 하였다. 이것이 참교육이다.
이순신은 23전 23승 전승이었다. 그는 이겨놓고 싸웠다(先勝而後求戰). 이순신은 이길 수 밖에 없는 싸움을 하였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먼저 정보였다. 그는 갖가지 探望을 통하여 적의 동태를 손바닥에 올려놓은 듯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형지물-특히 해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활용하였다. 그리고 이를 종합하여 승전으로 구현케 한 것은 우수한 무기체계였다. 일본 함선은 기본적으로 수송선이었다. 그들은 적선에 올라 短兵接戰으로 승부하는 전법으로 싸웠다. 반면에 조선 수군의 거북선과 판옥선은 화포를 사용하는 본격적인 戰船이었다. 육전에서는 조총이 위력을 발하였으나 작동이 복잡하고 장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燧發銃이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창안한 ‘제대별 일제사 이후 돌격’ 전법은 보병전술로서는 탁월하였으나 바다에서는 화포가 우수한 이순신의 조선수군에 압도당했다. 이순신은 이 강점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전략적으로도 이순신은 탁월하였다. 1592년의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은 일본 수군을 연파하여 호남을 보존하고 왜군이 한양으로 북상하지 못하게 막았다. 若無湖南이면 是無國家라 함은 이를 말함이다. 이는 왜란 전반을 통하여 한중일 전체에서 가장 탁월한 전략적 판단이었다. 더불어 백성이 있어야 국가가 있고 국가가 있은 후에 임금도 있는 것이라는 애민사상은 ‘兵의 기본은 道-명분-이다’는 손자병법의 眞髓와 통한다,
영화 鳴粱은 보기 드믄 작품이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보고서 ‘이제야 한국에도 세계에 내놓을만한 감독이 나왔구나!’ 했던 것은 1950년대 라쇼몬의 구로자와 아키라를 연상하였기 때문이다. 명량은 캐스팅도 훌륭하였고 김한민 감독이 해전 연출은 장면은 톰 크루즈의 Last Samurai에 방불하며, 북경 올림픽을 연출한 중국의 장애모를 능가한다.
鳴梁은 한국 국민은 물론 일본인, 중국인들도 보는 것이 좋겠다. 이들은 여기서 16세기 동양을 흔든 大戰役의 실상을 알아야 한다. 아베가 동북아가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유럽과 같다고 하는 것이 주제넘고 방정맞은 소리이기는 하지만 未嘗不 전혀 엉뚱한 말은 아닐 수 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던 1894년으로부터 두 갑자가 지난 갑오년을 맞아 중국 전역은 大國屈起와 해양사상, 애국주의가 범람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썩 반가운 조짐은 아니다. 지금 한중일 3국은 흡사 17~19세기 영국, 불란서, 독일이 자웅을 겨루던 시기를 재현하는 것 같다.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 잘 되는 것 보지 못하였다. 夫兵久而國利者 未之有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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