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 방아쇠 당긴 사라예보의 총성 100년
100년 전 사라예보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쓰러졌다. 19세 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저격 성공이다. 1914년 6월 28일 , 세상은 뒤집어졌다. 발칸 의 총소리는 전쟁의 뇌관이었다. 한 달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암살 드라마는 우연의 결합이었다. 우연은 운명으로 돌연변이했다. 우연은 우연처럼 오지 않았다.
‘사라예보 박물관’ 앞에 선 박보균 대기자.
저격자는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나이 19세. 그의 손에 브라우닝 권총이 들려 있었다. 탄환 두 발은 명중했다.
그곳은 제국의 식민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ia & Herzegovina)의 수도다. 동유럽 발칸 반도의 왼쪽이다. 프린치프의 거사는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의 배후에 세르비아왕국의 군부가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압박했다. 최후통첩에 이은 전쟁 선포. 발칸의 화약고가 폭발했다.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
사라예보 암살 사건-. 그 드라마는 우연의 결합이었다. 행운과 불행이 절묘하게 얽혔다. 행운의 여신은 양쪽을 오갔다.
100 년 후 나는 사라예보에 들어갔다. 도시의 이미지는 우울하다. 지배와 저항, 전쟁과 죽음이다. 1차 대전의 진원지, 유혈의 내전(1992~95년), 종교·민족 대립. 친근한 기억도 있다. 냉전시대 세계 탁구선수권(1973) 개최지. 이에리사·정현숙의 단체우승은 그 시대 한국인의 기쁨이었다. 동계올림픽(1984) 한국 출전.
사라예보 공항은 초라하다. 터미널은 서울역보다 작다. 나는 친숙한 기억을 먼저 찾아갔다. 동계올림픽 경기장-. 폐허의 충격이다. 경기시설은 잡초투성이다. 마스코트 부코(Vucko·아기 늑대)의 희미한 흔적은 사라진 영광이다. 경기장 주변은 공동묘지 터로 바뀌었다. 내전 희생자들 무덤이다.
그곳을 안내한 아브두키치(Avduki ·58)는 말했다. “사라예보는 다민족, 다종교의 압축이다. 공존은 매력이지만 불안하다. 민족주의가 개입하면 내전의 광기(狂氣)로 폭발한다. 러시아 소치보다 30년 빠른 올림픽이었지만 참혹한 내전으로 망가졌다.”-. 그는 옛 유고 연방 시절 문화부분 공직에 있었다.
다리 한쪽 건너편에 사라예보 박물관(Muzej Sarajevo)이 있다. 그 앞이 암살 장소다. 전시실은 교실 세 개쯤 합친 크기다. 오스트리아 점령 40년(1878~1918)을 간략히 담았다. 밀랍인형이 눈길을 끈다.
피살 당시 황태자 부부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51세)와 조피(Sophie Chotek·46세)의 모습이다. 황태자의 하늘색 기병대 예복 위에 화려한 훈장, 황금색 깃에 은색 별. 황태자비 조피의 드레스와 모자는 모두 흰색이다.
암살단 7명의 사진이 붙어 있다. 10대가 주력이다. (프린치프 등 19세 3명+17세+18세=5명). 흥미로운 나이 구성이다. 틴에이저 암살단이 세상을 뒤엎었다. 황태자의 동선과 사진, 암살단 배치표, 신문 등이 전시됐다. 나의 역사 안내자 아브두키치는 “프린치프의 큰 눈동자에는 식민지 젊은이의 분노와 고뇌가 담겨 있다고 한다”고 했다. 나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소개했다.
그는 내게 빛바랜 신문을 보여줬다. 사건 55 주년(1969년) 특집 기사. 생존한 암살단원 포포비치(Popovi ·사건 당시 18세)의 인터뷰와 회고다. 포포비치는 1차 대전 종전 후 출옥했고 대학교수를 지냈다(1980년 사망). 전시물과 신문은 타임머신이다. 사건은 재구성된다.
그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6월 28일 일요일 아침 비가 그쳤다. 맑고 더웠다. 여름이 시작됐다. 도시는 분주했다.” 오전 9시20분 페르디난트는 사라예보 역에 도착했다. 그는 며칠 전 보스니아 땅에서 군 기동훈련을 참관했다. 환영 예포가 터졌다.
그는 합스부르크(Habsburg) 가문의 제위(帝位) 계승자, 대공(大公·Archduke)이다. 황태자 부부는 오픈카에 올랐다. 그래프 운트 스티프트(Grf & Stift) 최고급 리무진. 그는 자신의 위엄을 군중에게 드러내고 싶었다. 경호는 삼엄하지 않았다.
그날은 부부의 결혼 14주년 기념일. 황태자는 황제(프란츠 요제프·1830~1916)의 조카다. 황제의 아들(루돌프)은 연인과 자살했다. 황제는 조카를 황태자로 지명한다. 하지만 황제는 조카의 결혼을 못마땅해 했다. 황태자비(妃)가 하급 귀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발칸은 재구성되고 있었다. 발칸의 지배자 오스만 튀르크(터키)는 후퇴했다(1878년 베를린조약). 400년 이상 이슬람 문화를 심은 뒤다. 세르비아 왕국은 독립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편입(보호국)됐다. 1908년 오스트리아는 그 땅을 합병했다.
세르비아 왕국은 민족주의 열기를 제국으로 전파했다. 보스니아 내부의 세르비아계 주민이 합세했다. ‘대(大)세르비아’ 야망은 제국의 질서와 충돌했다.
프린치프는 보스니아의 시골 오블리야(Oblija)에서 태어났다(1894년 7월 25일). 아버지는 가난한 우편배달부였다. 혈통은 세르비아계. 프린치프는 13세 때 사라예보로 갔다. 중학교에 들어갔다. 남슬라브 민족주의 운동인 ‘젊은 보스니아’(Mlada Bosnia)에 참여했다. 그는 시위로 퇴학당했다(1912년).
그는 세르비아왕국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갔다. 거기서 학업을 이어가려 했다. 그는 ‘흑수(黑手)단’에 가입했다. ‘통합 아니면 죽음’을 내건 비밀결사다. 배후에 세르비아 군 정보본부가 있었다.
프린치프는 황태자의 사라예보 방문계획(신문보도)을 알았다. 그와 친구 2명은 저격훈련을 받았다. 그는 거사의 리더였다. 무기와 자살용 청산가리가 제공됐다. 그들은 사라예보에 잠입했다.
비도브단(Vidovdan)-. 6월 28일은 ‘성(聖) 비투스(St. Vitus) 날’이다. 세르비아가 오스만 튀르크에 패망한 날이다.(1389년 6월 28일, 코소보전투) 세르비아 민족에겐 장엄한 패배 속 비장한 항거를 의미한다.
우리 3·1절 비슷한 날의 식민지 순시-. 그것은 제국의 오만이다. 19세 젊음의 저항 열정과 분노는 폭발했다. 그날의 상징들은 격돌한다. “군중들이 강둑 도로로 몰려왔다. 우리 7명은 적당히 거리(500m)를 두고 서 있었다. 권총과 수류탄, 청산가리를 주머니에 넣었다.”(생존 단원 회고)
황태자의 모터케이드 대열이 아펠 강둑(Appel Quay)길로 들어섰다. 6대의 차량 행진이다. 황태자 오픈카는 두 번째다. 첫 번째 암살단원은 겁이 나서 포기했다. 10시15분 두 번째 단원 카브리노비치(Nedeljkoabrinovi·19세)는 수류탄을 던졌다. 운전기사는 반사적으로 페달을 밟았다. 차는 속도를 냈다. 황태자 부부는 무사했다. 행운의 여신은 미소를 지었다.
10초 뒤 수류탄은 뒤쪽 차량 바퀴에서 터졌다. 그 차에 탔던 수행원 2명과 구경꾼 10여 명이 다쳤다. 황태자 일행은 5분 뒤 목적지(시청 청사)에 도착했다. 환영 리셉션에서 황태자는 수류탄 폭발에 화를 냈다. 어설픈 암살 계획은 실패로 끝나는 듯했다.
반전이 일어났다. 황태자는 자비심을 표출했다. “수행원이 입원한 병원으로 위문 가겠다”-. 주변에서 “위험하다”고 만류했다. 그의 뾰족하게 위로 말린 콧수염은 고집스럽게 보였다. 그 돌출은 경호수칙 위배다. 운명을 거역한 거만이었다. 황태자는 둔감했다. 행운의 여신은 분노했다.
1차 대전의 방아쇠, 프린치프의 브라우닝 M1910 권총(사진 위쪽·빈 군사박물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저격범 프린치프(사진 아래).
“우리는 암살이 실패했다고 낙담했다. 프린치프는 달랐다. 그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나왔다. 카페 건물 앞에서 서성였다. 수심에 잠겨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그 순간 황태자 오픈카가 그의 앞으로 왔다.”(생존 단원 회고)
프린치프는 우연을 낚아챘다. 우회전→정지→후진 순간이다.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브라우닝 FN M1910(38구경 6연발, 일련번호 19074). 표적과 거리는 1.5m. 방아쇠를 당겼다. 전광석화의 결행이었다.
박물관에 벨기에 브라우닝 권총 2정이 걸려 있다. 암살단원 무기다. 프린치프 권총은 오스트리아 빈(군사박물관)에 있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 권총도 브라우닝 제(M1900)다.
강둑 도로에 원색의 아담한 트램(노면 전차)이 다닌다. 박물관 입구 샛길은 100년 전 그대로다. 경차용 좁은 2차로. 거기서 후진과 정지, 오픈카 노출. 머릿속 현장검증을 해보았다. 암살에 최적 상황이다.
프린치프는 작고 허약했다. 흑수단은 그의 잠재력을 몰랐다. 왜소한 체구 때문이다. 그는 흑수단 비밀 군사조직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집념과 가치를 증명하고 싶었다.
행운의 미소는 그의 소망 위로 옮겨 앉았다. 행운의 여신은 간절함에 반응한다. 우연이 운명으로 진화했다. 우연은 우연처럼 오지 않았다.
총알은 황태자의 목에 맞았다. 조피는 배를 맞았다. “조피 죽으면 안 돼. 아이들을 위해 살아줘.” 황태자의 마지막 절규다. 박물관 벽에 석판이 있다. “From this place on 28 June 1914 Gavrilo Pincip assassinated the Heir to the Austro-Hungarian Throne Franz Ferdinand and his wife Sofia”(이곳에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위 계승자 페르디난트와 그의 부인 조피를 암살하다.)
역사의 가정(假定)은 무의미한가. 아브두키치는 “사라예보 총성은 예외”라고 했다. 황태자가 문병 가지 않았다면, 운전기사가 샛길로 가지 않았다면, 후진하지 않고 달렸다면, 프린치프가 카페 앞에 없었으면 ···. 역사는 달랐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은 없었을 것인가. 전쟁은 최소한 늦춰졌을 것이다.
나는 옛 시가지 바슈카르지아 쪽으로 갔다. 이슬람 사원 모스크가 있다. 가톨릭 성당이 나온다. 세르비아 정교(正敎) 예배당이 보인다. 유대교 예배당(시너고그)도 만난다. 종교의 집결과 공존이다. 명동보다 작은 공간이다. 이 나라는 무슬림,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주민이 함께 산다. 그런 풍광은 사라예보의 독보적인 매력이다. 그 속에 종교 갈등과 문명 충돌이 잠복돼 있다.
사건은 기묘한 조합의 연속이다. 프린치프는 대역(大逆)죄로 다스려졌다. 합스부르크 법정은 품격을 지켰다. 그는 사형당하지 않았다. (20세 미만 사형 금지 법률). 20세에서 27일(암살일 기준) 모자랐다. 그는 20년 징역형을 받았다. 암살단 7명 중 사형수는 20대 1명(다른 20대는 도주)이다.
오스트리아는 암살단의 배후를 캤다. 세르비아 군부 일각의 지원 내용이다. 세르비아를 응징할 수 있는 카드다.
프린치프는 감옥소에 들어갔다. 그는 심한 결핵으로 한쪽 팔을 잘랐다. 1918년 4월 28일 결핵으로 숨졌다. 1차 대전 종전 7개월 전이다. 사라예보에 그의 무덤(St. Mark cemetery)이 있다. 다른 암살단원과 같이 묻혀 있다. 묘비명은 ‘비도브단의 영웅들’이다.
늙은 황제는 황태자 피살에 슬퍼하지 않았다. 페르디난트 부부는 소유지인 아르트스테텐(Artstetten)성(城)에 묻혔다. 그곳에서 1차 대전 첫 전사자로 기록됐다. 전쟁은 1918년 11월 11일 끝났다. 황태자 오픈카 번호판은 ‘A 111 118’이다.
사라예보=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발칸반도와 화약고=발칸 역사는 종교·민족·문명의 공존과 충돌이다. 강대국 각축장이었다. 오스만 튀르크(터키)의 장기 지배, 19세기 이후 오스트리아·러시아의 진출과 대립. 약소국들의 독립 투쟁, 약소국 간 맹주 다툼이 있었다. 사라예보 암살은 1차 대전의 화약고로 각인됐다. 1990년대 옛 유고연방 해체 뒤 6개국(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으로 갈라졌다. 그 과정에서 내전의 화약고가 터졌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iH)= 발칸반도의 약소국 비애를 담고있다. 세 종교, 세 민족의 나라다(인구 462만). 보스니아 무슬림(인구의 48%), 세르비아계(37%, 정교), 크로아티아계(14%, 로마 가톨릭)다. 민족 뿌리(남 슬라브족)는 같다. 면적은 한반도의 약 4분의 1. 1인당 국민소득은 4488달러(2012년 IMF).
그 후 1국가 2체제의 나라로 재출발했다. BiH연방(무슬림-크로아티아계)과 스릅스카 공화국(Srpska, 세르비아계)으로 나뉘었다. 사라예보가 통합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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