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말의 해’ 갑오년(甲午年)의 새해가 밝았다. 오늘 아침 우리가 희망만을 이야기하기에는 갑오년의 역사적 그림자가 너무 무겁다. 1894년의 한반도를 기억하는가. 그해 갑오년은 동학농민운동으로 시작됐으며, 청일전쟁으로 막을 내렸다. 온 나라가 개화와 수구, 사대와 자주로 갈라져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1954년의 한반도도 잊을 수 없다.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1인당 소득 70달러의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섰다. 그 후 60년 동안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적을 이뤄냈다.
다시 갑오년을 맞는 우리는 기로에 섰다. 나라 주변의 불안정성은 높아지고, 내부적으로는 소통과 통합이 사라졌다. 오래전에 고도성장이 끝나면서 우리 앞에는 저성장의 장벽이 막아섰다. 한쪽에선 고령화에 신음하고, 20대 청년들은 좌절과 불만 속에서 “안녕들 하십니까”를 외친다. 기존의 성공신화는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다. 그나마 갑오년과 함께 우리의 뇌리에 경장(更張)이란 DNA가 깊이 각인돼 있는 게 다행이다. 늘어진 거문고의 줄은 소리를 낼 수 없다. 경장은 거문고 줄을 팽팽하게 조이는 것이다. 갑오년을 맞아 우리는 다시 한번 늘어진 거문고 줄을 당겨야 한다.
다시 거문고 줄을 조여야
지난 1년간 우리 사회는 극단과 극단이 충돌하면서 정치가 증발됐다. 민주당은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을 물고 늘어져 대선불복이란 과장되고 분열적인 투쟁으로 치달았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에 여전히 운동권 민주주의에 갇혀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법과 원칙’은 지켰을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과 약속했던 소통과 통합의 정치는 사라졌다. 새누리당은 원내 과반 의석을 갖고도 청와대의 눈치만 보는 허약하고 초라한 정파로 떨어졌다. 국민들은 만성적인 정치 피로증을 앓고 있다.
새해는 대외적으로 힘든 한 해를 맞이하고 있다. 미·중, 중·일의 갈등 구도가 고착화하면서 동북아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장성택 숙청에서 보듯 집권 3년차의 북한 김정은 정권은 종잡기 어려운 체제다. 방공식별구역 선포를 시작으로 중국의 굴기는 거칠어지고 있다.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세운 일본의 군사대국화 행보도 예사롭지 않다. 취임 첫해의 외교적 업적과 달리 박근혜정부의 외교적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동맹국인 미국과 전략적 협력 동반자인 중국 사이에서 독자적인 공간을 확보하기 쉽지 않다.
경제성장 회복이 최우선
한국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저성장이다. 성장률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지 못하면 양질의 일자리와 복지 재원 마련은 불가능하다. 인구의 고령화에다 내수경기는 부진에 빠져있고, 밖으로는 세계경제의 장기 침체와 아베노믹스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 철도 파업과 서비스산업의 규제 완화 좌절에서 보듯 기득권층의 반발은 한층 집요해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 경제가 실속(失速)하면 경제 재도약의 가망은 영영 없어질지도 모른다. 자칫 일본식 장기불황의 늪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마저 고개를 든다.
우리 사회가 도전하고 풀어야 할 난제는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 의사들은 원격의료와 의료법인의 영리자회사에 반발해 동네병원 파업을 선언한 상태다. 통상임금 개편은 새로운 노사 갈등과 춘투(春鬪)를 예고하고 있다. 이제는 지역·이념·계층을 넘어 세대 갈등까지 가세하고 있다. ‘안녕들 하십니까’의 이면에는 젊은 세대의 좌절과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사안들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위력을 더해가고 있다.
거문고 줄을 조율할 때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중도다. 6개의 줄을 너무 팽팽하지도, 너무 느슨하지도 않게 조여야 최고의 소리를 낸다. 맨 먼저 조율을 시작해야 할 곳은 정치권이다. 대통령과 여야가 정치다운 정치를 해야 한다. 지난 연말에도 예산안과 국정원 개혁 법안이 막판까지 진통을 거듭했다. 더 이상 과거의 덫에 걸려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가 표류해선 안 된다. 올해는 6월 지방선거가 또 하나의 시금석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현 정부의 중간평가가 될 것이다. 새누리당과 민주당, 그리고 제3의 세력의 진흙탕 싸움이 언제 도질지 모른다.
일상적 민주주의를 고민하자
결국 국민이 중심을 잡아야 나라가 산다. 민주주의는 선거만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승자독식의 구조가 정당한지도 의문이다. 기존의 정당제도가 무력화되면서 무당파는 급증하고 있다. 제도적 권위를 보완할 새로운 합의시스템이 나타나야 한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에 더해, 생활 속에 민주주의적 태도가 스며드는 일상적인 민주주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일상적 민주주의의 요체는 설득과 타협이다. 여야는 스스로 극단을 밀어내고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생활을 이야기해야 한다. 정치를 복원하는 가장 중요한 리더십은 대통령에게 있다. 경험적으로나 헌법적으로나 대통령은 그 자체가 정치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좀 더 적극적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외교·안보에도 쉽지 않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결국 우리가 주도적으로 풀 수 있는 남북관계에서 실마리를 찾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미국과 중국이 핵 억제 등 북한문제에 협력적 관여(engagement)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진다. 우리가 김정은 정권의 폭압성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가동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막연한 기대에 근거한 대외정책으로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도전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창조적 사고는 경제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아웃 오브 박스(out-of-box) 외교’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경제는 성장의 밑그림부터 다시 그릴 필요가 있다. 고용률 70% 달성에만 매달려선 경기 회복도, 경제체질의 개선도 기대하기 어렵다. 유례없는 미국·유럽의 양적완화와 일본의 아베노믹스도 그 본질은 성장률 회복이다. 현 정부의 ‘창조 경제’ 역시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에 다시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돌아보면 그동안 동반성장·골목상권 등을 내세워 경제성장을 사전적으로 제약한 측면이 적지 않다. 경제는 순수한 진공 속에서 자라는 게 아니다. 성장률을 끌어올리려면 위험을 무릅쓰는 기업가의 ‘동물적 본능(animal spirit)’과 ‘창조적 파괴’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이로 인한 불균형은 사후에 세금 징수와 복지제도로 보완하는 게 올바른 수순이다.
시민의 상식이 지배해야 분열 막는다
정상 궤도를 이탈한 정치와 경제를 바로 세우려면 원칙은 딱 한 가지다. 가장 하기 싫고 가장 어려운 일부터 먼저 하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 현실의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다음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시절이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미래 세대를 아우르는 공동체 정신과 희생정신을 발휘해야 지금의 난관을 넘어설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눈앞에 다가온 정년 연장과 근로시간 단축, 연금 문제 등 수많은 난제를 풀 길이 없다.
우리 사회에는 인터넷·SNS 등 새로운 소통 수단을 통해 수많은 단어가 쉴 새 없이 교환되고 있다. 그럼에도 모두 자기 진영을 향해 외칠 뿐 상대 진영을 향한 언어의 흐름은 단절돼 있다. 사람들은 파편화되고 끼리끼리 무리 지을 뿐이다. 이런 곳이야말로 괴담과 포퓰리즘이 서식하기 쉬운 최적의 환경이다. 좌우의 극단이 사회를 지배하면 삶의 질 악화와 민주주의의 후퇴,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위기를 야기하게 된다. 대개 진실은 가운데에 있다. 합리적 이성을 지향하는 건강한 시민의 상식을 존중하고, 상식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해야 한다. 새로운 소통 수단을 통해 상대 진영과의 소통을 늘려야 사회분열을 막을 수 있다. 양 극단의 건조한 외침이 사라져야 우리 사회의 거문고가 제대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된다.
다시 갑오년을 맞는 우리는 기로에 섰다. 나라 주변의 불안정성은 높아지고, 내부적으로는 소통과 통합이 사라졌다. 오래전에 고도성장이 끝나면서 우리 앞에는 저성장의 장벽이 막아섰다. 한쪽에선 고령화에 신음하고, 20대 청년들은 좌절과 불만 속에서 “안녕들 하십니까”를 외친다. 기존의 성공신화는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다. 그나마 갑오년과 함께 우리의 뇌리에 경장(更張)이란 DNA가 깊이 각인돼 있는 게 다행이다. 늘어진 거문고의 줄은 소리를 낼 수 없다. 경장은 거문고 줄을 팽팽하게 조이는 것이다. 갑오년을 맞아 우리는 다시 한번 늘어진 거문고 줄을 당겨야 한다.
다시 거문고 줄을 조여야
지난 1년간 우리 사회는 극단과 극단이 충돌하면서 정치가 증발됐다. 민주당은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을 물고 늘어져 대선불복이란 과장되고 분열적인 투쟁으로 치달았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에 여전히 운동권 민주주의에 갇혀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법과 원칙’은 지켰을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과 약속했던 소통과 통합의 정치는 사라졌다. 새누리당은 원내 과반 의석을 갖고도 청와대의 눈치만 보는 허약하고 초라한 정파로 떨어졌다. 국민들은 만성적인 정치 피로증을 앓고 있다.
새해는 대외적으로 힘든 한 해를 맞이하고 있다. 미·중, 중·일의 갈등 구도가 고착화하면서 동북아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장성택 숙청에서 보듯 집권 3년차의 북한 김정은 정권은 종잡기 어려운 체제다. 방공식별구역 선포를 시작으로 중국의 굴기는 거칠어지고 있다.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세운 일본의 군사대국화 행보도 예사롭지 않다. 취임 첫해의 외교적 업적과 달리 박근혜정부의 외교적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동맹국인 미국과 전략적 협력 동반자인 중국 사이에서 독자적인 공간을 확보하기 쉽지 않다.
한국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저성장이다. 성장률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지 못하면 양질의 일자리와 복지 재원 마련은 불가능하다. 인구의 고령화에다 내수경기는 부진에 빠져있고, 밖으로는 세계경제의 장기 침체와 아베노믹스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 철도 파업과 서비스산업의 규제 완화 좌절에서 보듯 기득권층의 반발은 한층 집요해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 경제가 실속(失速)하면 경제 재도약의 가망은 영영 없어질지도 모른다. 자칫 일본식 장기불황의 늪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마저 고개를 든다.
우리 사회가 도전하고 풀어야 할 난제는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 의사들은 원격의료와 의료법인의 영리자회사에 반발해 동네병원 파업을 선언한 상태다. 통상임금 개편은 새로운 노사 갈등과 춘투(春鬪)를 예고하고 있다. 이제는 지역·이념·계층을 넘어 세대 갈등까지 가세하고 있다. ‘안녕들 하십니까’의 이면에는 젊은 세대의 좌절과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사안들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위력을 더해가고 있다.
거문고 줄을 조율할 때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중도다. 6개의 줄을 너무 팽팽하지도, 너무 느슨하지도 않게 조여야 최고의 소리를 낸다. 맨 먼저 조율을 시작해야 할 곳은 정치권이다. 대통령과 여야가 정치다운 정치를 해야 한다. 지난 연말에도 예산안과 국정원 개혁 법안이 막판까지 진통을 거듭했다. 더 이상 과거의 덫에 걸려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가 표류해선 안 된다. 올해는 6월 지방선거가 또 하나의 시금석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현 정부의 중간평가가 될 것이다. 새누리당과 민주당, 그리고 제3의 세력의 진흙탕 싸움이 언제 도질지 모른다.
일상적 민주주의를 고민하자
결국 국민이 중심을 잡아야 나라가 산다. 민주주의는 선거만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승자독식의 구조가 정당한지도 의문이다. 기존의 정당제도가 무력화되면서 무당파는 급증하고 있다. 제도적 권위를 보완할 새로운 합의시스템이 나타나야 한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에 더해, 생활 속에 민주주의적 태도가 스며드는 일상적인 민주주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일상적 민주주의의 요체는 설득과 타협이다. 여야는 스스로 극단을 밀어내고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생활을 이야기해야 한다. 정치를 복원하는 가장 중요한 리더십은 대통령에게 있다. 경험적으로나 헌법적으로나 대통령은 그 자체가 정치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좀 더 적극적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외교·안보에도 쉽지 않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결국 우리가 주도적으로 풀 수 있는 남북관계에서 실마리를 찾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미국과 중국이 핵 억제 등 북한문제에 협력적 관여(engagement)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진다. 우리가 김정은 정권의 폭압성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가동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막연한 기대에 근거한 대외정책으로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도전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창조적 사고는 경제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아웃 오브 박스(out-of-box) 외교’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경제는 성장의 밑그림부터 다시 그릴 필요가 있다. 고용률 70% 달성에만 매달려선 경기 회복도, 경제체질의 개선도 기대하기 어렵다. 유례없는 미국·유럽의 양적완화와 일본의 아베노믹스도 그 본질은 성장률 회복이다. 현 정부의 ‘창조 경제’ 역시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에 다시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돌아보면 그동안 동반성장·골목상권 등을 내세워 경제성장을 사전적으로 제약한 측면이 적지 않다. 경제는 순수한 진공 속에서 자라는 게 아니다. 성장률을 끌어올리려면 위험을 무릅쓰는 기업가의 ‘동물적 본능(animal spirit)’과 ‘창조적 파괴’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이로 인한 불균형은 사후에 세금 징수와 복지제도로 보완하는 게 올바른 수순이다.
시민의 상식이 지배해야 분열 막는다
정상 궤도를 이탈한 정치와 경제를 바로 세우려면 원칙은 딱 한 가지다. 가장 하기 싫고 가장 어려운 일부터 먼저 하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 현실의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다음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시절이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미래 세대를 아우르는 공동체 정신과 희생정신을 발휘해야 지금의 난관을 넘어설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눈앞에 다가온 정년 연장과 근로시간 단축, 연금 문제 등 수많은 난제를 풀 길이 없다.
우리 사회에는 인터넷·SNS 등 새로운 소통 수단을 통해 수많은 단어가 쉴 새 없이 교환되고 있다. 그럼에도 모두 자기 진영을 향해 외칠 뿐 상대 진영을 향한 언어의 흐름은 단절돼 있다. 사람들은 파편화되고 끼리끼리 무리 지을 뿐이다. 이런 곳이야말로 괴담과 포퓰리즘이 서식하기 쉬운 최적의 환경이다. 좌우의 극단이 사회를 지배하면 삶의 질 악화와 민주주의의 후퇴,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위기를 야기하게 된다. 대개 진실은 가운데에 있다. 합리적 이성을 지향하는 건강한 시민의 상식을 존중하고, 상식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해야 한다. 새로운 소통 수단을 통해 상대 진영과의 소통을 늘려야 사회분열을 막을 수 있다. 양 극단의 건조한 외침이 사라져야 우리 사회의 거문고가 제대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