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成豪(조갑제닷컴)
2013년 11월28일字 <조선닷컴>에 따르면, 법륜은 지난 26일 이 모임에서 통일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고 한다. 그는 “성장 동력이 거의 소진된 한국 경제의 상황을 타개하려면 통일을 통한 북한 개발로 성장 동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륜은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민족을 재통합하려면, 이에 대한 북한의 반발을 과감하게 포용하는 정책만이 한국을 중심으로 한 재통합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본다”고도 했다.
법륜의 강연은 정의화 의원의 부탁으로 이뤄졌다. 鄭 의원은 “17대 국회 때 對北(대북) 인도 지원 관련 법안을 준비하면서 법륜 스님을 알게 됐다”며 “통일에 대한 관심과 식견이 남다르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강연을 부탁했다”고 밝혔다(발언출처: 2013년 11월28일字 <조선닷컴> 보도). 이 모임에는 새누리당 의원 24명과 민주당 의원 4명이 참여하고 있다.
------------------------------------------------
<2012년 8월16일字 보도 再錄>
南北관계의 본질은 민족사적 정통성과 삶의 방식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다. 북한정권이 민족사의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는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이 없다. 대한민국 헌법도 이러한 역사관에 입각하여 북한지역을 대한민국 영토의 일부로 선언, 북한정권을 反국가단체로 규정한 것이다.
‘안철수의 멘토’로 알려진 승려 법륜(現 평화재단 이사장)은 신라 삼국통일의 의의를 貶下(폄하)하고 한반도 역사의 정통성이 고구려와 발해에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북한정권에 정통성이 있다는 발언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법륜은 1988년 ‘정토회’라는 참선과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단체를 설립했다. 정토회는 현재 한국 古代史(고대사) 기행과 역사강연 등을 기획, 청년들을 모으고 있다. 이 단체는 27개 국내 지부와 18개 해외 지부 등 대규모 조직을 갖추고 있다. 법륜은 또 2004년 평화재단을 설립, 통일문제에도 관여하고 있다. 이 단체는 북한 어린이에게 식량 보내기 등 對北(대북)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각종 보고서 발간과 세미나도 주관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안철수를 대권후보 반열에 올려놓는 데 영향을 끼친 ‘청춘콘서트’의 기획을 담당한 단체가 바로 평화재단이라고 한다. 법륜은 현재 평화재단을 비롯해 정토회, 좋은벗들, 에코붓다라는 단체의 이사장 직함을 갖고 있다.
“신라는 민족사 정통의 자격 없어”
법륜은 2009년 10월16일,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열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 제1부’ 강연에서 “신라는 민족사의 정통의 자격이 없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 가운데 대동강 이남 일부만 차지할 수 있었다. 이것을 두고 우리가 통일신라라고 부르는데, 이 시대의 신라를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즉시 발해는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된다. 발해가 없다고 보면 신라가 3국을 통일했다고 볼 수 있으나 발해를 놓고 삼국통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고구려의 정통성은 발해로 갔다고 봐야 한다. 신라는 처음에 독립적 연호를 썼지만, 시간이 지나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연호를 없앴다. 그래서 민족사 정통의 자격이 없다. 발해는 끝까지 연호를 쓰고 독립국가로서 위상을 가졌다.” (발언출처: 2010년 1월13일字 인터넷 <한겨레신문>)
《삼국사기》‘광개토대왕’ 편에는 “광개토대왕이 재위 9년 봄 정월에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九年 春 正月, 王遣使入燕朝貢)”고 쓰여있다. 같은 책 안원왕(고구려 23대 왕) 本紀에도 “東魏(동위)에서 조서를 내려 왕에게 驃騎大將軍(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모두 이전과 같게 했다.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했다(四年 東魏詔加王驃騎大將軍 餘悉如故 遣使入魏朝貢)”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뿐 아니라 고구려도 중국의 제후국에 朝貢을 한 것이다.
당시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삼국 모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 倭(왜, 注: 일본)와 활발한 교역을 했으며, 이는 상호간의 조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당시 조공의 의미는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예물 등을 바치는 것’이라기 보다는 국가 생존차원에서의 교역이란 뜻이 더 정확하다. 그럼에도 법륜은 신라가 중국에 事大(사대)ㆍ굴종한 것처럼 묘사했다.
법륜은 신라가 독자적 年號(연호)를 쓰다가 없앴다고 했지만, 사실 삼국 중 독자적 연호를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나라는 신라였다. 신라는 무려 114년간 7개의 독자적인 연호를 썼다. 고구려는 5개의 연호를 사용했으나, 광개토대왕 때 사용했던 ‘永樂(영락)’이란 연호를 제외하고는 정확한 연대를 측정하기 어렵다. 백제는 확실하게 전해지는 연호가 아직 없다.
법륜은 독자적인 연호를 폐지했다는 이유로 신라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절하했으나, 사실 신라는 황제국가로서의 位相(위상)을 지녔었다. 김창겸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신라국왕의 황제적 위상’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국유사》‘태종춘추공조’에서 당대인들이 신라를 ‘聖代’라고 한 것은 신라를 이상국가로 일컬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태종무열왕의 太宗이라는 諡號(시호)는 황제의 시호였다. 이때 당에서 이 시호를 폐지하라는 압력을 가했으나, 신라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황복사금동사리함명문에서 효소왕의 어머니를 ‘神穆太后’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朕(짐)이라 했고 죽음을 崩(붕)이라 했다.”
金 연구원은 “신라 국왕이 주변국을 제후국에 봉했다”며 “耽羅國(탐라국)을 속국으로 朝貢(조공)을 받았고 고구려의 귀족 출신 安勝(안승)을 고구려왕(뒤에 報德國王)으로 책봉하고 表文(표문)을 받았으며 大祚榮이 발해를 건국하자 그를 大阿湌(대아찬)에 책봉하므로써 탐라와 報德國(보덕국)과 발해를 번국으로 설정하고 그 우두머리를 제후에 임명했다”고 밝혔다. 이는 신라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법륜은 같은 강연에서 고려 초, 徐熙(서희)가 거란의 蕭遜寧(소손녕)과 벌인 강동 6주 담판을 언급했다. 그는 “고려가 싸우지 않고도 외교술로 강동 6주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올바른 역사관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신라 사람들이라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 없었다”고 자문자답했다. 그는 또 “광활한 대륙이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는 당나라가 대동강 이남 땅을 준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감격했다”며 “신라는 문화적으로 뛰어나고 부유했지만 역사관이 부족해 이런 문제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발언출처: 上同).
법륜은 신라가 당나라로부터 영토를 下賜(하사)받은 것처럼 묘사했으나,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에서부터 원산만까지의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唐과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서였다. 신라는 매소성 전투에서 승리해 羅唐전쟁에서의 결정적 勝機(승기)를 잡을 수 있었고, 唐은 이 전투에서 패해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철수시키는 치욕을 당했다. 안동도호부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 唐이 평양에 설치한 軍政(군정)기관으로, 옛 고구려領을 집어삼킬 의도로 설치한 기관이다. 초대 도호로 임명된 唐將(당장) 薛仁貴(설인귀)는 2만여의 군사와 함께 진주하면서 고구려 땅을 9都督部(도독부)·42州(주)·100현縣(현)으로 나누어 다스릴 방침이었다. 그러나 신라와의 전투에서 패해 唐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법륜은 이런 사실관계는 간과한 채 민족사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왜곡하고 자학적으로 묘사했다.
‘신라 삼국통일’ 폄하는 북한이 조작ㆍ왜곡한 역사관과 相通(상통)
법륜이 신라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정하고 고구려와 발해에만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건 북한에 정통성을 주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한 의도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신라 이전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모호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민족은 갑자기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공통의 가치관, 풍습, 언어, 정치제도, 인종적 유사성을 가지고 함께 살아야 민족의식을 갖게 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민족의식을 가진 민족집단이 생기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기점으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역사적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신라는 통일 후 약 250년 간 富國强兵한 一流국가를 존속시켜 나갔다. 반면 발해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거란에 망한 이후 나라를 되찾지도 못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발해 문화는 전무하다. 언어, 성씨, 문화, 제도 중 현재까지 韓民族의 역사적 전통으로 이어지는 것은 없다는 이야기이다. 신라가 확보한 한반도란 공간은 민족의 생존 터전이 되었다. 신라어는 한국어의 原型이 되었고, 신라불교ㆍ신라의 문화재ㆍ신라의 학문과 예술 등은 한국인의 현재의 삶 속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다. 발해가 아니라 신라가 민족사의 정통이란 이야기이다.
고구려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신라를 부정하는 억지도 유행이다. 고구려의 ‘對唐ㆍ對隋(대당ㆍ대수) 항쟁’을 들어 신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일부 좌파 사학자들은 고구려가 긴 시간에 걸쳐 수나라와 당나라와 결전한 것을 근거로 민족사적 우수성과 자주성을 부각시키고 신라가 당이란 外勢(외세)를 빌어 고구려를 친 것을 비판한다.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민족이란 개념이 없었으므로 外勢란 말도 지금 의미로 쓰면 안 된다. 사실상 삼국은 서로 다른 민족들의 집합체였던 셈이다.
고구려가 隋·唐과 싸워 한반도를 지켜낸 것은 사실이지만 신라가 당과 동맹한 것을 비판해선 안된다. 더구나 신라가 당의 힘을 빌어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한반도를 속국으로 만들려는 당과 결전, 한반도를 민족의 공간으로 확보한 것을 폄하하는 것은 민족 생성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고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중국을 통일하고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한 강대국과 너무 오래 전쟁을 한 것은 고구려의 외교적ㆍ군사적 실패였다는 것이 학계의 衆論(중론)이다. 고구려가 兩國과 싸움을 벌여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결국 이 전쟁으로 망하여 한반도에서 역사적 大勢를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강대국과는 친하게 지내야 한다.
신라의 金春秋(김춘추, 太宗武烈王)와 金庾信(김유신)은 뛰어난 외교력과 군사적인 힘을 바탕으로 羅唐(나당)동맹을 결성,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통일을 주도했다. 이들은 통일 이후 唐과 결전을 벌여 이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신라가 外勢(외세)의 힘을 빌어 통일했다’는 비판이 설득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가변적 상태에 있던 한민족 국가들이 최초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로 탄생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안정된 영토’와 ‘안정된 국가’를 구심점으로 해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더 나아가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생겼다. 민족적 정체성 확보는 통일신라가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통일신라가 우리 민족사의 大勢(대세)…발해는 支流(지류)
故 李基白(이기백) 前 한림대 교수(2004년 별세, 前 국사편찬위원)는 한반도의 역사를 가장 객관적으로 연구한 학자로 꼽힌다.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서 수없이 많은 씨족공동체가 산재해 있었고, 청동기 시대에서는 각기 독립된 수백 개의 성읍국가 혹은 부족국가들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정복과 동맹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로 통합 정리되어 삼국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 신라의 통일에 의해 민족의 틀이 거의 완성된 것입니다” (발언출처: <月刊朝鮮> 2001년 11월호 인터뷰)
그는 “통일신라가 우리 민족사에서 大勢(대세)를 차지했고, 발해는 支流(지류)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李 교수는 또 신라가 唐과 동맹한 것을 ‘反민족적 事大(사대)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문제가 있는 시각”이라며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하기를 원했지만, 고구려가 거절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唐과 동맹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정권도 법륜의 주장처럼 고구려와 발해에 역사적 정통성이 있다면서 신라의 삼국통일은 줄곧 폄하해왔다. 이 같은 역사의식의 뿌리는 日帝시대 申采浩(신채호) 같은 소위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定說(정설)이다.
신채호는 反외세ㆍ反제국주의를 표방하는 ‘민족주의’ 사관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방편 중 하나로 고조선과 부여의 역사 등 上古史(상고사) 연구에 주력했다. 그 결과 부여와 고구려, 발해에 역사적 정통성이 있다고 본 반면, 신라의 삼국통일은 外勢를 끌어들였다는 이유로 과소평가하거나 평가절하 했다. 신채호는 자신의 著書 《朝鮮上古史(조선상고사)》 11편에서 “김유신의 음모로 고구려의 古土를 잃었다”고 했다. ‘신채호類(류)’의 역사관은 일제강점기 때에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으나, 건국 이후 남북한 대치 상태가 지속되면서 북한의 역사왜곡에 빌미를 주었다.
北의 ‘신라 三國통일’ 폄하는 ‘대한민국=미국과 결탁한 反민족적 정권’으로 매도 위한 것
‘김일성 王朝’인 북한은, 자신들의 異端性(이단성)에 정통성을 덧입히고자 역사를 왜곡ㆍ조작했다. 북한정권은 자신들이 ‘고조선-고구려-발해’를 계승했다고 강변하며 민족주의 사관을 惡用(악용)했다.
북한이 펴낸 1991년版(판)《조선통사》는 “저들의 영토 야욕을 채우려고 외래 침략세력을 끌어들인 신라 봉건 통치배”로 평가절하하고 “고구려 유민이 세운 강성대국 발해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유신과 김춘추를, 外勢를 끌어들인 ‘反민족적 봉건통치배’로 비난했다. 이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부각시키고자 ‘북한정권=주체정권’, ‘대한민국=미국과 결탁한 反민족적 정권’으로 매도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실제로 2001년 6월15일, 북한의 <평양방송>은 1960년 김정일이 썼다고 주장하는 ‘삼국통일 문제를 다시 검토할 데 대하여’라는 논문에 대해 보도한 적이 있다. 방송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근거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통일적인 주권국가’를 세우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논문은 “신라 통치배들은 령토를 넓히려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우리 나라를 침략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당나라의 침략세력을 끌어들이는 죄악적인 행동을 감행했다”고 비난했다. 또 “그는 당나라 통치배들과 신라와 당나라가 련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대동강 이남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대동강 이북의 넓은 고구려 땅은 당나라가 차지할 것으로 흥정했다”고도 했다.
반면, 이 논문은 고구려와 발해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시각을 보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운데서 삼국을 통일하려는 지향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줄기찬 투쟁을 벌려온 나라는 고구려였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7세기 말부터 1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등의 주장이 그것이다.
한국통일연구원 이교덕 연구원은 2010년 2월2일 <자유아시아방송>에서 발해의 성격에 대해 언급했다. 李 연구원은 “우리 국사학계에서는 발해가 우리나라냐, 우리나라 역사에 포함될 수 있는 국가냐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며 “발해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세운 국가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성격이 우리나라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김창진 고려대 사학과 교수도 同年 7월13일 같은 매체에서 북한의 ‘발해正統論’에 대해 “정권자체가 북쪽에 있다 보니 그런 것 같다”고 설명했다. 金 교수는 “북한 정권의 특색이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주체사상을 강조하다 보니 더욱더 정통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며 “지도자의 입장을 강조하고 그러다 보니 지도자의 정통성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단군 遺骸(유해)’ 발견됐다고 거짓말한 북한의 底意(저의)
李基白 교수도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역설하면서 “독재국가(注: 북한)는 한국사에서의 정통성을 주장할 자격이 없다. 그 독재를 뒷받침 해주고 있는 이른바 ‘주체사학’은 한국사학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일례로 북한정권은 1993년 단군 遺骸(유해)가 발견됐다며 대대적인 체제선전을 했다. 이후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기슭에 ‘단군릉’을 조성하고 북한정권이 단군조선을 계승한 것처럼 조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내 사학자들은 단군의 遺骸가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李 교수는 북한이 단군 유해 측정에 사용했다는 ESR(Electron Spin Resonance, 전자 스핀 공명) 측정법에 의문을 표하며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 ESR 측정법은 대략 10만년 이전의 구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에 대해 응용되고 있으며, 5000년 전 정도의 ‘나이 어린 뼈’를 試料(시료)로 한 분석에서는 정확한 연대측정을 기대할 수 없는 방식이다.>
그는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李鮮鰒(이선복)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5000년 전 정도의 뼈라면 ‘탄소연대측정법’을 통한 보다 정확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터인데, 북한 측에서 굳이 ESR측정법을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고 밝혔다. 탄소연대측정에서 어린 뼈가 나왔기 때문에 측정결과를 상대적으로 쉽게 조작할 수 있는 ESR 측정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법륜, ‘천부인’ 언급하며 고조선 이전부터 청동기 사용했다고 강변
법륜도 고조선 역사와 그 이전의 桓因(환인)과 桓雄(환웅)에 대해서도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한반도의 민족사의 흐름을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조선나라, 해모수의 부여, 고주몽의 고구려, 왕건의 고려, 이성계의 조선”이라고 주장했었다(발언출처: 2009년 10월16일,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 제1부’). 또 ‘청년, 역사를 만나다 제2부 강연’에서는 환웅의 神市(신시) 건설을 언급하며 ‘天符印(천부인)’에 대해 설명했다. 천부인은 환인이 환웅에게 下賜(하사)한 것으로 환웅이 이 세상에 올 때 가지고 왔다는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을 말한다. 법륜은 이를 근거로 “이들이 발달한 청동기 문화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신화를 바탕으로 한 하나의 說(설)로 전해지고 있어 역사적 사실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법륜의 주장대로라면, 고조선 이전 환웅의 시대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다는 것이 되므로 이는 역사의 흐름 상 앞뒤가 맞지 않다.
북한정권도 단군릉을 복원할 때 그 안에서 金銅冠(금동관) 파편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문명사적으로 보았을 때 세계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획기적인 大발견이라고 한다. 李基白 교수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반도에서는 황하유역에서 청동기를 만들기 시작한 때보다 1000년 이전에 이미 고도의 청동금속문명이 등장했음을 의미한다”며 북한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청동기가 발명된 이후부터 다른 부족을 征伐(정벌)할 수 있게 되었고, 농경지도 일굴 수 있게 돼 문명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李 교수도 단군조선의 건국연대에 대해 “청동기 시대 이후여야 하므로 기원전 10세기 경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신석기 시대에 국가를 세웠다고 강변하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고, 장가도 들었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법륜의 시각에서 북한은 ‘포용하고 감싸안아야 할 대상’일 뿐
법륜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도 매우 우호적이다. 북한정권에 대한 비판도 찾아보기 힘들며 그의 시각에서 북한은 ‘포용하고 감싸안아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는 앞서 언급한 강연에서 북한이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용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았다.
<북쪽에 있는 저 북한은 현재 우리하고 먼 것 같지만 북한 국호가 무엇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그럼 이 조선은 어디서 왔는가? 조선왕국에서 왔다. 왕이 주인인 국가에서 저 사람들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기 때문에 첫째는 專制(전제)정치가 아니고, 民主(민주)정치다. 그 다음에 왕이 주인이 아니고 民이 주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붙였다. (발언출처: ‘청년, 역사를 만나다 제1부’ 강연 中)>
그는 “청나라나 원나라는 우리와 한참 올라가도 만나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다른 민족이라고 말한다”면서 “북한은 우리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정권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민주주의 국가인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법륜은 북한정권이 자행한 대량학살을 비롯한 집단餓死(아사), 건국 이후 김일성 父子가 저지른 수 백여 건의 南侵(남침) 사례는 언급하지도 않았다.
2012년 8월1일, 김미영 세이지코리아 대표(前 한동대 교수)는 <조갑제닷컴>에 기고한 칼럼에서 법륜이 과거 자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정통성이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고 폭로했다.
<이 글을 쓸 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슬쩍 뽑아 옆으로 치워두었다. 13년 만에 이제 공개하게 되는 그 사실이란 당시 법륜스님을 서초동 정토회에서 만났을 때 ‘그래도 정통성은 북한에 있지’라고 했던 말이었다.>
9도연방제·낮은단계연방제 등 주장
법륜은 2005년 10월15일 열린 ‘햇볕정책을 넘어 평화로 통일로’라는 토론회에서도 “평화통일로 나아가려면 북이 주장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든 우리 측에서 주장하는 ‘남북연합’이든 서로 얼마든지 협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헌법의 영토조항 및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주장했다.
그는 2007년 9월, 尹汝雋(윤여준) 前 의원과 가진 대담에서도 “우리가 북한을 단순히 남한과의 대립 관계로만 봐서는 안된다. 북한을 우리 역사의 범위 안에서 어떻게 다룰 거냐 이렇게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말은 북한에 동조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북한을 남이 아닌 우리 가족의 일부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발언출처: 2007년 9월14일 ‘윤여준의 정치카페’ (http://www.yooncafe.net/78)]
법륜은 또 평화재단이 개최한 2008년 7월10일 ‘건국 60주년 통일코리아를 바라보다’ 토론회에서 ‘9도 연방제’를 제안했다. 그는 “남한을 서울과 5도로 나누어 연방 형태를 준비하고 북한을 3도로 나누는 것”으로 “남과 북이 ‘헤쳐모여’하는 방식으로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이라고 주장했다.
[ 2013-11-28, 10:09 ]
세계은행 평가, 한국의 民事사법제도는 189개국중 2위
신속한 소송진행과 경제적 소송비용이 주요 원인, 전자소송 시행도 한 몫.
대법원
세계은행 ‘계약분쟁 해결’ 사법제도 - 3년 연속 세계 2위 *세계은행(World Bank)은 매년 세계 각국의 기업환경에 대한 조사 결과를 기초로 기업환경보고서(Doing Business) 발표. 2013. 10. 29. 공개된 'Doing Business 2014'의 '계약분쟁 해결을 위한 사법제도'(Enforcing Contracts) 부문에서 우리나라는 조사 대상 189개국 중 2위에 랭크 - 'Doing Business 2012' 이래 3년 연속 *2008년 이후 6년 연속 '계약분쟁 해결 사법제도' 부문 TOP 10에 오름 *세계은행 민사 사법제도(계약분쟁해결) 부문 평가 3년 연속 2위 ▪아시아 1위, 인구 5천만 명 이상 국가중 1위 - 독일, 미국, 프랑스, 홍콩에 앞서 ▪신속한 소송진행과 경제적 소송비용이 주요 원인, 전자소송 시행도 한 몫 ▪우리나라 사법 종합순위는 7위, 효율적인 사법제도가 對外신인도 提高에 기여
정몽준·오세훈이 박원순을 이기는 民心
좌익세력에 대한 혐오감이 저변에 퍼진다
올인코리아
"정부가 KAL기 폭파범이라고 발표한 김현희는 가짜"
2003년 11월 자칭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서 중 일부.
조갑제닷컴
여기서 우리는 수많은 의혹 중 우선 그동안 분명하게 밝혀진 몇 가지 사례만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정부가 KAL기 폭파범이라고 발표한 김현희는 가짜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1) 김현희가 자신이 북한에서 자랄 때 찍었던 사진이라고 제시한 사진 속의 인물들은 김현희가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밝혀졌습니다. 사진에 나타난 인물들은 모두 `동그란 귀` 모양을 가지고 있으나, 김현희의 귀 모양은 `칼 귀`로서 서로 다른 인물임이 너무나 명백합니다. (2) 김현희가 자필진술서나 기자회견 등에서 사용한 용어 중 `TV`, `속죄`, `약주병`, `밧데리,` `조선항공기`, `변소`, `환승로비`, `여자경찰관` 등은 북한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입니다. 또한 김현희가 썼다는 자필 맹세문의 `규율`이란 단어가 북한에서는 `규률`이라고 쓴다는 지적을 받자 당국은 맹세문의 용어를 황급히 고쳐 발표한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3) 정부는 김현희의 아버지가 앙골라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 수산대표 김원석이라고 발표하였으나, 확인 결과 그러한 인물도 그러한 직책도 없었음이 밝혀졌습니다. (4) 수사발표에 나타난 김현희의 행적에 대해 일본기자가 조작임을 제시하자 김현희는 그 뒤 자기가 썼다는 수기에서 수사 당시 발표된 행적을 슬그머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5) 김현희는 정예공작원으로서는 상식적으로 할 수 없는 행동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증거들을 소지하고 다니는가 하면, 도주할 수 있었음에도 도주하는 시늉만 내다가 체포되었다는 사실 등입니다. (6) 김승일과 김현희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없습니다. ------------------------------------------------------------- 천주교 당국은 위의 성명서에 서명한 162명의 신부들이 끝까지 사죄나 반성을 거부한다면 파문해야 할 것이다. 거짓으로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신부들이다. 거짓말도 성의 있게 해야 하는데 위에 열거한 주장은 2003년 당시엔 전부가 허위로 확인되어 있었다. 더구나 <김승일과 김현희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없습니다>는 용서할 수 없는 저질 막말이다.
김대중의 월남참전 사과에 화를 내던 故 蔡命新 장군의 추억
趙甲濟
월남 주둔 한국군 사령관을 지냈던 蔡命新(채명신) 장군이 87세를 一期로 별세하였다. 월남전에 참여한 한국군은 연 30만 명이었다. 이들은 지금 60~80代이다. 채명신 장군과 함께 '맹호는 간다'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던 세대이다.
"자유통일 위하여 길러온 힘이기에 조국의 이름으로 어딘들 못가리까." 2001년 8월23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방한중이던 월남의 찬 둑 루옹 대통령에게 '불행한 전쟁에 (한국군이) 참전하여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 사실상 사과를 한 셈이다. 그 직후 만났던 채명신 장군이 화를 내던 장면이 떠오른다. 金 당시 대통령의 발언은 정통 역사관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과도 맞지 않았다. 첫째, 대한민국이 국군을 월남전에 보낸 것은 월남의 자유뿐 아니라 한국의 안보를 튼튼히 하고 우리의 체제와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미군은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을 빼내 월남에 보내려고 했다. 이것을 간파한 朴正熙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견제하기 위하여 전투 사단 파견을 결심했던 것이다. 둘째, 박정희 정부는 월남파병을 계기로 하여 많은 實益(실익)을 챙겼다. 월남특수란 것이 일어났다. 월남에 많은 한국 회사가 진출하여 돈을 벌었고 미국 존슨 정부는 한국에 많은 원조를 주었다. 한국의 공업화에 큰 기여를 한 KIST, 즉 한국 과학기술원은 월남전 파병에 대한 존슨의 선물이었다. 월남전에 진출한 장병들과 노무자들이 벌어들인 돈과 배운 건설 기술이 경부 고속 도로 건설에 투입되었다. 월남전선에서 한진, 현대 같은 회사들이 성장했다. 특히 건설회사들이 이곳에서 기술을 터득하여 70년대에 중동으로 뛸 수 있었다. 셋째, 월남전에 대한민국이 파병한 것은 정의로운 일이었다. 미군은 6.25전쟁 때 5만 명의 젊은이를 희생시켜가면서 한국을 구해주었다. 그 미국이 파병을 부탁하는 데 혈맹인 한국이 의리를 지킨 것이다. 이 일 덕분에 韓美 동맹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월남전쟁의 도발자는 17도선 이북의 공산 월맹이었다. 그들은 국제협정을 무시하고 정규사단을 17도선 남쪽으로 내려보내 공산혁명을 노린 게릴라 전을 주도했으며 월남의 베트콩 부대를 부렸다. 명백한 남침이었다. 이 침범행위에 대해서 자유세계가 군대를 보낸 것이다. 호주, 필리핀 등도 파병하였다. 1975년 월남 전역이 공산화되면서 미군 편에 섰던 한국은 勝戰國(승전국)이 되지는 못했으나 결코 사과할 나쁜 일을 한 적은 없다. 넷째, 한국군은 국제법을 위반한 월남 공산군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다. 바로 우리가 피해자인 것이다. 그들은 전쟁규칙을 위반하여 군인 복장을 하지 않고 민간인으로 행세하면서 우리 국군을 괴롭혔다. 약 5000명이 전선에서 죽었고 1만 명 이상이 다쳤다. 나는 당시 이런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이상의 관점에서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일방적 사과를 반대하고 규탄하는 바이다. 김대중 개인이 사과하는 것도 문제인데 하물며 국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한국 현대사의 정통성을 보위해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우리의 자랑스런 과거를 무효시하는 사과를 국민과 국군의 동의 없이 했다는 것은 중대한 과오이다. 그의 사과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첫째,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사과는 대한민국이 사과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관은 월남참전은 자랑해야 할 일이었지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일부 언론과 좌파에서 검증도 되지 않은 학살설을 들고 나와 월남파병을 죄악시하는 주장을 폈으나 다수 국민과 국군의 생각은 월남파병이 우리나라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이런 역사관을 바꾸려면 많은 논의와 토론을 거쳐야 하고 아주 조심해서 해야 할 일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김숙희 장관이 월남파병에 대해서 용병 운운 했다가 군 장교들의 반발로 사직했던 적이 있다. 이번 김 대통령의 발언이 가진 무게는 김 장관과 비교할 바 아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의 사과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뒤흔든 것이다. 공산 국가의 원수한테 그 공산 국가의 불법적인 침략행위-혁명기도를 막으려 했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사과한 셈인데, 그렇다면 공산화를 당연한 것으로 본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월남의 공산통일이 월남 사람들에게 과연 행복을 가져다 주었는지 불행을 가져다 주었는지 아직은 속단할 일이 아니다. 공산화 후 발생한 보트 피플의 비극은 공산통일이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했고 경제를 낙후시켰음을 증명한다. 뒤늦게 월남정부가 자본주의 시장 논리를 받아들여 개혁 개방에 나서고 있다. 김 대통령의 사과는 공산통일은 善(선)이고 이를 막으려고 했던 자유세계의 反共(반공) 행동은 사과할 만한 惡(악0이란 느낌을 줄 가능성도 있다. 셋째, 김 대통령의 사과는 1960년대 - 1970년대를 살았던 세대로부터 추억을 빼앗아가는 행동이다. 젊은이들이 월남에 가서 고생하고 있으니 국내에 있는 우리도 더 열심히 일하자는 식의 사회 분위기가 고양되어 있었다. 전선을 가지고 있는 국가는 늘 긴장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 긴장을 국가 건설에 잘 활용한 경우이다. 우리의 가슴 한 구석에는 '용사는 말없이 바다를 건넜다. 자유보다 더 귀한 것, 있으면 말하라'는 軍歌(군가) 가사처럼 우리도 이제 다른 나라의 자유를 지켜줄 만큼 컸구나 하는 자부심이 있었다. 김 대통령의 사과는 이 자랑스럽고 영광된 시절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월남전 세대의 자부심과 추억을 앗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제 엎질러진 물이다. 다시 담으려면 새로운 물을 길어와야 한다. 우선 월남참전 단체와 제대 군인들이 김 대통령의 사과를 취소시키는 방향으로 의견과 행동을 모아야 할 것이다. 월남전 세대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내 청춘을 돌려다오!> 이하의 글은 필자가 쓴 박정희 傳記(전기) 중 관련 부분이다.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미군 지휘관 회의에서 소신표명을 계속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을 존경합니다. 한국전 때 웨스트 장군은 제82공정사단의 대령으로서 북한 순천 상공에서 부하들과 함께 낙하산으로 뛰어내려 용맹을 떨친 지휘관이십니다. 저 분의 지휘권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저 분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군 지휘관들도 이해하는 분위기로 돌았다. 이로써 한국군의 지휘권은 미국-월남측과 협의하여 행사하는 쪽으로 정리되었다. 게릴라 전술의 전문가 채명신 소장은 육군본부에서 작전참모부장으로 일하면서 월남전을 연구했는데 비관적인 판단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월남전의 작전개념을 수립하면서도 나 자신은 월남에 가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디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베트콩은 군복을 입은 정규군이 아니라 민간인 행세를 하는 게릴라들이었습니다. 월남정부는 민심을 떠나고 있었고 월맹 지도자 호지명의 인기는 높아가고만 있었습니다. 아홉 살짜리 꼬마의 호주머니 속에 수류탄이 들어 있고 어린아이를 업은 아낙네의 옷속에 권총이 숨겨져 있는 이런 상황에서 과연 미군의 작전개념인 '수색 및 섬멸작전'이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만 생겼습니다.' 채명신 장군의 작전개념은 '분리 및 섬멸'이었다. 민간인 속에 숨어 있는 베트콩들을 대민심리전을 통해서 분리하여 산속으로 격리시킨 뒤 군사작전을 통해서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채명신 장군은 '미군과 함께 활동하다가 보니 그들이 아시아의 역사 문화에 얼마나 미숙한지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1964년 월맹은 정규군을 월남의 중부고원지역으로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이들은 월남에서 조직된 베트콩을 지원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했다. 무기표준화를 통해서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은 같은 공용화기를 쓰게 되었다. 1965년 초 미국은 월맹의 4개 정규 사단이 월남에서 작전중임을 확인하고 '롤링 선더'(Rolling Thunder) 작전을 시작했다. 이는 정규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북위 19도선 이남의 월맹 군사기지들을 폭격하는 작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정규사단의 남침은 계속되어 1965년말 현재 6만4000명이 월남에서 작전중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월남의 민족해방전선은 인민혁명당이란 명칭을 가졌으나 공산당의 위장조직에 불과했다. 혁명당 당수는 구엔 반 린. 1964년 월맹은 구엔 치 탄 장군을 남파하여 민족해방전선의 군사부문을 총지휘하게 했다. 린은 탄 장군의 보좌관이 되었다. 월남전을 하노이에서 지휘하고 있던 월맹 국방장관 지압은 시간이 공산군 편이란 확신하에서 월남전을 정치전쟁적인 성격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전쟁에서 승패는 전장이 아니라 여론과 언론의 영향을 크게 받는 국내정치 무대에서 결판난다. 국제법상 월남전은 월맹에 의한 불법적인 남침이란 성격을 지닌다. 1954년 제네바 협정에 의하여 월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월맹은 17도선을 무시하고 군단 규모의 정규군을 남파했던 것이다. 남파의 방식이 김일성의 남침처럼 기습적인 총공세가 아니라 장기간의 위장침투였기 때문에 국제여론의 반격을 피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베트콩이 월남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반정부 세력인 것처럼 선전했고 세계의 많은 언론들이 '월남정규군의 명백한 남침'을 경시하는 보도 태도를 취했다. 박정희의 입장에서는 국제법을 위반하여 자유진영 국가를 무너뜨리려고 남침한 공산세력을 물리치는 데 파병할 도덕적이고 국제법적인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 월남파병을 통해서 주한미군을 월남전선으로 빼돌리려는 미국측의 의도를 사전에 봉쇄하는 한편, 파병에 따른 경제적 이득과 국군현대화에 대한 미국측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실리와 명분을 고루 갖춘 파병이었던 것이다. 그 뒤 월남과 미군이 졌고 월남이 월맹에 흡수통일되었다고 해서 한국의 파병 이유까지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는 없는 것이다. 평가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국가이익과 국제법,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여야 하는 것이다. 통일된 월남이 이제 와서는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개혁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월맹이 승자였다고 해서 월맹의 공산혁명노선이 옳았고 그에 반대한 한국의 파병은 나빴다고 해석하는 것은 승패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논의가 될 것이다. 1965년에서 70년까지의 6년간 월남파병에 따른 미국측의 대한 지원총액은 9억2700만 달러였다. 그 주된 내용을 보면 월남에서 한국회사들이 미군과 맺은 구매 또는 공사계약이 3억500만 달러로 가장 많았다. 미군에게 한국측이 공급한 물건값이 1억4400만 달러, 미군이 부담한 한국군에 대한 각종해외수당지급액이 1억3000만 달러, 월남파병을 계기로 유보되었던 군원이관 계획(한국측이 분담해야 할 군사비)액수가 9300만 달러, 한국군의 군수물자 조달에 대한 미군측의 지원이 5000만 달러 등등. 1966∼71년간 월남에서 한국회사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5억3700만 달러에 달했다. 공사 및 용역제공, 한국인 기술자들의 송금, 그리고 군수물자 수출을 통한 외화가득이었다. 월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8년엔 1억1340만 달러, 69년엔 1억420만 달러, 70년은 9700만 달러에 달했다. 최성기엔 80여개의 한국회사와 1만6000명의 기술자들이 주로 미군과 계약하에 활동했다. 월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8년의 경우 무역외 수입으로 분류되는 공사-용역 등 월남으로부터의 각종 외화가득은 그해 상품수출액의 36%나 되었다.> 채명신 장군은 5.16 군사혁명 때는 5사단장으로서 병력을 이끌고 박정희 지지에 나섰던 사람이다. 1군 참모장이던 박정희 소장 아래서 참모로 일하였고 육사 5기 생도로서는 박정희 중대장으로부터 배웠다. 채 장군은 한국전 때 유격부대를 지휘, 敵陣(적진)에 침투, 많은 공을 세웠다. 월남전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었다. 轉役(전역) 후 좌파정권 시절 애국운동에도 앞장섰다. 평생을 對共戰線(대공전선)에서 보낸 분이다. 冥福(명복)을 빈다.
|
'一般的인 news' 카테고리의 다른 글
寒波 녹인 추모열기… 사랑하는 부하들 곁으로/ 조선일보 (0) | 2013.11.29 |
---|---|
[사설] 눈먼 政爭에 내팽개쳐진 올 한 해 서민 경제/ 조선일보 (0) | 2013.11.29 |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김일성 주석의 영생을 빈다" (0) | 2013.11.24 |
국민의 武器/ 조갑제닷컴 (0) | 2013.11.24 |
국민의 武器/ 조갑제닷컴 (0) | 2013.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