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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한양답사 [3] 서울문묘와 성균관 ①/ 시니어조선

鶴山 徐 仁 2013. 11. 20. 12:07

 

걸어서 한양답사 [3] 서울문묘와 성균관 ①

 

 

입력 : 2013.11.19 18:39

 

'걸어서 한양답사'. 그 첫 순서로 혜화동 길, 두 번째로 성북동 길을 걸었다. 이곳은 종로구와 성북구의 접경지역으로 도심에서 멀지 않은데다 제법 볼만한 것이 많은 곳으로 먼저 추천하였다. 이 두 곳은 하루에 돌아봐도 괜찮다. 서로 가깝고 도로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허락한다면 혜화동 길을 걷기 앞서서 바로 그 옆 명륜동부터 가보길 권한다. 성균관 대학교 자리에 있는 서울 문묘와 성균관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은 어디일까? 서울대학교? 고려대? 연세대? 정답은 조선 태조 7년 (1398)에 창건한 국립대학, 성균관이다.

우리나라 국립 최고학부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해 수도에 태학을 설립해서 자제들을 교육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왕조시대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던 본교의 역사는 바로 이 고구려의 태학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본교에서는 건학원년을 서기 1398년으로 잡고 있다. 그 이유는 성균관이라는 교명과 현 학교 위치를 고려해서이다. 즉 조선조 개국 후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중앙 국립최고학부의 개설을 서둘러 동북방 숭교방(현 명륜캠퍼스 위치)에 성균관을 설립했으니, 이가 바로 본 대학교의 개교다. (성균관 대학 홈페이지)

서울 문묘와 성균관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태조 7년 (1398년)에 창건한 조선시대 국립대학이자 공자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당이다.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중건하였으며, 제사 공간인 문묘와 강학 공간인 명륜당으로 나누어지는데 제사 공간은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 서무, 삼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학 공간은 명륜당과 동재, 서재, 존경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륜당 마당에는 대사성 윤탁이 심었다는 500년쯤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우리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전국 각지의 서원들은 강학 공간이 앞에 있고, 제사 공간이 뒤에 있는 前學後廟(전학후묘)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데 비하여 이곳은 앞쪽에 제사 공간이 있고 뒤쪽에 강학 공간이 있다. 그러나 정문인 대성전 삼문은 제향 때 외에는 늘 폐쇄되어 있어 동쪽 측면으로 들어가 돌아보아야 한다.

성균관 대학교 정문. 들어서면 왼쪽에 탕평비각과 하마비가 있다.

탕평비각에는 1742년 영조가 지었다는 탕평 문구가 새겨진 비석이 있어 御書碑閣(어서비각)으로도 불린다. 성균관 유생들에게 당쟁의 폐해에서 벗어나 참다운 인재가 되기를 권장하기 위함인데 1980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바로 옆에 선 하마비도 중종 조인 1519년에 문묘 洞口(동구)에 세워졌으나 현 위치 탕평비각 옆으로 이전되었다.

이 탕평비각과 하마비 맞은편, 그러니까 정문을 들어서서 오른편이 문묘와 성균관이다. 사적 제143호이며 문묘 대성전과 삼문, 동무, 서무 그리고 명륜당 건물은 보물 제141호이다.

 

맞은편 문묘 정문 삼문. 굳게 잠겨있다.

 

삼문이 잠겨있어 부득이 측면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문묘의 옆구리는 유료주차장으로 다소 볼썽사납다.

 

관리사무소가 보이고 그 뒷편은 왕이 문묘에 거동할 때 타고온 가마를 내려놓는 곳 下輦臺(하련대)다.

먼저 앞쪽 제사 공간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대성전(①)을 중심으로 정면은 아까 굳게 잠겼던 삼문(②)이고 좌우로는 동무(③)와 서무(④)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삼문을 포함한 정면 담장의 좌우 동서로 다시 작은 문이 하나씩 있는데 각각 동말문(⑭), 서말문(⑮)이며 마당에는 묘정비각(⑤)이 하나 있다.

또한, 서문 뒤쪽 공간에는 제기고(⑦), 수복청(⑧), 전사청(⑨), 포주(⑩)등 부속건물들이 시선을 거슬리지 않게 약간 물러나 있다. 그 밖에도 제관들이 머무는 향관청(⑪)과 동, 서월랑(⑫,⑬)은 뚝 떨어져 가장 북쪽 외진 곳에 따로 위치한다.

제사 공간 대성전 지역.

大成殿(대성전)은 공자의 신위를 봉안한 곳으로 정기적인 향사를 올리는 곳이다. 孔子(문성왕)와 四聖(사성), 孔門十哲(공문십철), 宋朝六賢(송조육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문묘 향사를 거행하는 곳이다.

四聖(사성)은 공자의 수제자인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말하며 孔門十哲(공문십철)은 공자의 제자 중 학덕이 뛰어난 안연, 자공, 자로 등 10명을 말하고 宋朝六賢(송조육현)은 송나라의 여섯 명현 주돈이, 정이, 장재, 정호, 소홍, 주희를 말하는데 이렇게 21위가 대성전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우리나라 東國十八賢(동국18현)을 대성전으로 올려 현재 39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東國十八賢(동국 18현)은 역대 우리나라 성현으로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조광조, 이황, 이이, 송시열 등을 말한다. 大成殿(대성전)은 태조 7년(1398) 창건된 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5년(1602)에 중건하였다. 정면 5칸, 측면 4칸이나 전면 1칸을 퇴칸으로 개방하여 향사 시 제관 등의 동선으로 사용한다.

大成殿(대성전)모습. 현재 모두 39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현판은 한석봉 글씨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 측면에서 앞쪽 1칸은 개방하여 제관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대성전뿐 아니라 좌, 우로 늘어선 東廡(동무)와 西廡(서무)에도 공자의 72제자를 비롯한 중국의 역대 현인과 우리나라 동국 18현 등 112명의 위패를 봉안하였었으나 우리나라 동국 18현을 대성전으로 올려 봉안하고 나머지 공자의 제자와 중국 유학자들의 위패를 埋安(매안)하여 현재는 비워진 건물로 남아있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로 길게 자리잡은 동무, 서무. 정면 11칸에 측면 1칸 반인데 전면 반칸은 퇴칸으로 개방된 구조이다.

대성전 마당, 동남쪽에는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廟庭碑閣(묘정비각)이 서 있다. 커다란 귀부에 세워진 비석은 태종 10년(1410)에 처음 세웠고, 중종 6년(1511)에 비각을 건립하였는데, 변계량이 왕명을 받들어 글을 짓고 세웠으며, 임진왜란때 훼손된것을 인조 4년(1626)에 다시 세웠다. 비의 높이는 187cm, 글씨는 해서체이다.

대성전 공간은 前廟後學(전묘후학)으로 명륜당 앞에 배치되어 있으며 여러개의 문과 담으로 둘러 쌓여 있다. 앞쪽으로는 정문인 三門(삼문)과 그 좌우의 동말문, 서말문이 담장을 따라 있으며 동쪽으로는 임금이 드나드는 東三門(동삼문), 일명 御三門(대성전)이 있으며 뒷편에 위치한 강학공간인 명륜당과는 협문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또한, 서쪽 부분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관련 집기나 비품을 보관하며 관계자가 머무는 부속시설들이 모여 있어 측문으로 연결된다.

밖에서 보았을 때 굳게 닫혀있던 대성전의 정문, 삼문의 안쪽이다. 대성전까지는 神道(신도)가 잘 깔려 있다.

 

대성전에는 정문인 삼문 외에도 좌우 모퉁이 부근에 작은 문이 하나씩 있으니 각각 동말문, 서말문이다.

 

임금님은 어디로 문묘를 출입하였을까? 대성전 동쪽 측면, 주차장으로 난 문이 임금이 출입하는 御三門(어삼문)이다. 어삼문 옆은 東庫(동고), 즉 창고 건물인 듯하며 울타리 너머 또 다른 출입문은 외부에서 명륜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밖에 대성전 오른쪽 뒷편으로는 명륜당 공간으로 이어주는 협문이 있어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다. 대성전 옆구리에 넓은 단은 아마도 제례를 지내는 과정에서 제관들이 대기하거나 제물이 잠시 머물렀다가 이동하는 그런 공간인 듯하다.

대성전과 명륜강 공간을 이어주는 협문. 대성전 오른쪽 측면에는 제례 준비 과정에 필요한 공간인 듯 넓은 단이 있다.

그 밖에 제기고, 수복청, 전사청, 포주 등 제례에 쓰이는 제기의 보관이나 관리인의 거주, 제수용품 장만 공간 등은 대성전은 왼쪽, 서측에 한곳으로 모아 작은 담을 둘러 따로이 구분되도록 하였다.

대성전 서측공간. 좌측 2개는 제기고와 수복청, 전사청으로 드나드는 문이며 오른쪽 닫힌 협문은 명륜당으로 통하는 문이다.

 

문묘향사에 필요한 제기를 보관하는 祭器庫(제기고)와 관리인이 거처하던 載學堂(재학당). 守僕廳(수복청)이다.

 

제수용품을 장만하고 준비하던 典祀廳(전사청). 마주 보이는 곳은 석전제의 제물을 준비하는 疱廚(포주)다.

이렇게 대성전과 부속 건물들은 남쪽에 한 공간으로 모여 있는데, 다만 향사 시 제관이나 집사들이 숙식을 하는 향관청이나 월랑은 문묘에서 벗어나 명륜당 뒷편 가장 북쪽에 따로이 준비되어 있다.

문묘와 명륜당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享官廳(향관청). 문묘 향사시 제관들의 숙식처이다.
향관청 앞에 동, 서로 마주하여 들어선 東月廊(동월랑), 西月廊(서월랑). 문묘 향사 시 제 집사들의 숙식처이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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